백수린, <여름의 빌라>를 읽고
백수린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는데, 오랜만에 괜찮은 단편집이었다. 최근 한국 단편소설들이 특정 소재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관찰이나 성찰을 게을리하곤 한다는 나의 (근거 있는) 불만은 백수린의 소설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 여성작가가 쓴 단편소설에 동성애자가 등장하지 않기만 해도 미학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혐오이다)
백수린의 화두는 ‘관계’일 것이다. 이때의 관계는 대개 ‘마지못해 현실적인 인물’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낭만적 인물’이 맺는 관계이다. 백수린은 전자가 후자에 대해 갖는 동경과 질투라는 양가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시간의 궤적>에 등장하는 ‘주재원 언니’, <폭설>에 등장하는 ‘엄마’가 대표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175쪽) 사는 여자들이라면, 주로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1인칭의 30대 여성들은 전자에 해당한다. 백수린의 1인칭 ‘나’들은 낭만적 인물들에게서 과거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신과 달리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기질을 타고나서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낭만적 인물들을 일정하게 경멸하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청소년기까지는 대부분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갈 것을 주문받지만, 실제로는 그럭저럭 타협해 살아가기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점에서 백수린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양가감정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백수린의 예리함과 가능성은 관계가 망가진 것에 대한 책임을 그와 같은 얄미운 타자들에게 손쉽게 지우지 않고, 오히려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104쪽) 살아가는, 이러나 저러나 ‘이젠 상관없는’(167쪽) 1인칭 ‘나’의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은… 거대한 체념’(165쪽)에서 찾는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인물들의 ‘체념’을 대놓고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유의 조심스러움과 신중함이야말로, 그것이 소극성으로 비추어질지라도, ‘MZ에티켓(미덕)’의 일부라는 것을 작가는 충분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낭만적 인물들은 귀책당사자이기보다는 끝내 불가해한 미지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딸에게 호되게 책임을 추궁당한 뒤에도 태연하게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138쪽)라고 말하는 ‘엄마’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작가는 판단하지 않고 있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2016)에서도 그렇고, 근래 한국 단편소설들에서 굳건한 연대나 진취적 투쟁보다 ‘체념’이 중심 정서일 때 문장과 구성이 보다 호소력 짙어진다는 것은 되새겨야 하는 대목이다. 한 세대 전의 작가인 은희경의 ‘태연함’(<태연한 인생>)이나 ‘위엄과 냉소’(<새의 선물>)도 그다지 전투적 자세가 아니었는데, ‘체념’은 그보다도 후퇴한 것이 아닌가. 나는 이 후퇴를 아쉬워하거나 못마땅해하는 입장은 아니고, 그것이야말로 현 세대의 생활감각의 일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강렬한 것은 <폭설>이었고, 형식적으로 가장 원숙한 것은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였지만) 정치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은 역시 <흑설탕 캔디>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 <흑설탕 캔디>에서 묘사되는 할머니의 연애사는 화자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일기장을 토대로 창작한 것으로서 1인칭 ‘나’가 비로소 미지의 낭만적 타자에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작품 속 ‘할머니’는, 남들이 보기에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여자’(175쪽)였지만, 실제로는 ‘평생 동안 배신을’ 당한 끝에 인생에 무엇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199쪽) 인물이기도 했으므로 ‘체념적 1인칭 대 낭만적 타자’라는 백수린의 인물 유형론으로 포착할 수 없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할머니’는 체념적인 동시에 낭만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백수린의 문제설정을 초과하고 넘어설 수 있는 단서이자 가장 리얼하고 입체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이요, 동경 혹은 질투의 대상이었을 뿐인 타자가, <흑설탕 캔디>에서는 화자의 재구성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체념하는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이해할만한 대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동시에 소설적으로 형상화된 ‘할머니의 삶’은 체념 속에서도 ‘내 것’을 간직하는 삶의 방식(“이건 내 것이란다”(204쪽))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화자의 증명이자 주장이다.
특별히, 타지인 프랑스에서 할머니가 느꼈을 외로움에 대한 묘사가 작품을 읽고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비밀이 있는 인간은 외롭기 마련인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에 대한 연민에 기초하고 있는 백수린의 묘사는 연민이야말로 삶의 비의적 진실에 다가가는 좋은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