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사회 일반

빈곤과 불안정노동

장기균형 2025. 4. 26. 17:30

강지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훨씬 더 어둡고 참담한 내용을 각오했는데,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인생사는 각오했던 것만큼 어둡지만은 않았다. 빈곤에 대해 떠올릴 때에 나태함과 무기력, 그리고 각종 일탈행위로 점철되어 있는 ‘빈곤의 문화’나 도무지 벗어날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의 대물림만을 연상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또다른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는 오히려 강인한 생활력과 정신력을 지닌 경우도 있었고,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이들일수록 정상가족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커져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생활인으로 거듭나는 경우도 많았다. 생활력과 절박함, 이른바 ‘실속’의 측면에 있어서는 중산층 가정출신인 나보다 그들이 훨씬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롭게 사색하며 이리 저리 재보고 고뇌하는 것도 가난한 이들에게는 사치인 것이다. 저자가 교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아동 청소년의 발달과정에 입각한 서술이나 시각도 돋보였다. 다른 빈곤사회학 논의와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학교, 복지센터, 청소년보호소 등 각종 사회연결망이나 조직이 제공하는 ‘인간관계’의 역할이 가난한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배울 수 있었다. 가령 학교와 또래집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어렸을 때 그곳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는데, 가족이 일차적 사회조직으로서 애착형성이나 기본적인 사회화 기능을 수행해주지 못하는 빈곤가정 아이들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사회관계가 절실히 필요한 것이었다. 이런저런 관계로부터 벗어나 있고 싶은 나의 성향도 사치였던 셈이다. 뻔한 얘기지만, 몇몇 활동가들의 선한 의지와 남다른 사명감에 의존해서 ‘센터’를 운영하는 일을 계속해선 안 되고, 지속가능한 복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학교와 사회가 가난한 아이들에게 사회적 관계망을 제공해줄 수 있도록 정책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는, 또 정치권은 빈곤에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도 그렇고, ‘불평등 해소’ 같은 거대담론이 아니라(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당장의 ‘생존’ 의제에 의식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빈곤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불평등의 결과라고 진단하는 일 사이에서, 어쩌면 전자가 좀더 시급하고 해결가능한 문제인 것이 아닐까?

이승윤,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

사회정책학 연구자인 저자의 ‘연구노트’다. 나름대로 유익했지만, 솔직히 단행본으로 출간할 만큼 완결된 글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자의 글이라기엔 다소 두서없고 신변잡기적이다.

먼저 학술적으로 ‘불안정 노동’, ‘액화노동(melting labor)’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노동의 변화 양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의 이른바 ‘플랫폼 자본주의’,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는 이전의 산업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의미다. 전통적인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은 정규직 노동이었고, 그 개념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비정규직-프레카리아트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던 것이 이른바 노동 측면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기업-정규직 및 전문직으로 이루어진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으로 노동시장이 분절되어야 있다는 관찰(이중노동시장, 노동시장 내부자-외부자 이론)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노동이 획일화되어 있지 않고, 노동시장 내부에서도 다양한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해서 조직노동의 구성도 쉽지 않다는 관찰이 비교적 최근까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에 대한 주류적 접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불안정 노동’은 그것으로도 설명이 안된다. 다양한 형태의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는 물론, 종속적 자영업자와 플랫폼 대기업에 의해 일종의 ‘고객’으로 취급 받는 플랫폼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불안정’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시장 외부자’ 개념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를 테면 2022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최저운임비(안전운임제)를 요구했던 화물트럭운전사들은 대표적인 종속적 자영업자들이다. 화물기사들은 형식적으로는 개인사업자 또는 자영업자이지만, 화주(운송위탁자)와 운수사업자에 의해서 결정된 운임을 지급받는 노동자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당시 정부가 이들의 파업을 쟁의행위가 아닌 ‘집단운송 거부’로서 노조 소속회원의 사업활동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공정거래사건’으로 취급한 것은 바로 노동자 정체성과 자영업자 정체성 사이에 ‘끼어 있는’ 종속적 자영업자들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사회정책학 연구자인 저자는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표준으로 하여 설계된 사회보장제도와 노동법이 (노동시장 외부자는 물론,) ‘불안정 노동’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나 기본소득 구상은 바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불안정 노동’에 대한 제도적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저자는 이 불안정 노동자 계층의 상당 부분이 청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여성청년보다 남성청년이 그러한 불안정 노동에 쉽게 유입되는 경향이 있다는 흥미로운 경험자료를 제시한다. ‘세대’와 ‘젠더’를 가로지르는 ‘불안정노동’ 개념을 동원하여 21세기 자본주의의 균열을 바라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읽힌다.

두번째 부분은 사회정책학 연구자로서 이론과 실천의 괴리에 대한 저자의 고뇌와 ‘여성 연구자’로서 학계 내부에서의 소감이다. 저자의 진정성은 충분히 느껴졌지만,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골몰해왔던 독자 중 한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아주 새롭거나 깊이 있는 성찰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