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사회 일반

안희제, <증명과 변명>을 읽고

장기균형 2025. 4. 26. 17:54

이러 저러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저자의 오랜 친구(‘우진’)가 자살을 계획했다.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저자는 친구에게 자살하기 전에 함께 인터뷰 책을 출간해보고 자살계획을 재고해보자고 제안했고, 친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인터뷰 책’이다. 저자는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선언하고 있다. 저자와 친구의 진정성을 폄훼하거나 조롱할 생각은 없지만, 두 사람의 다소 과한 자의식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 특유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직접적으로 그려져서(나도 저자들과 동년배 남성이다) 독서 초반은 불편했다. 불필요하게 엄숙하달까(원래 자기 자신의 삶은 좀 담백하게 바라봐야 하는 법이다).

친구의 신상보호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고 주저하는 저자의 태도도, 그것을 굳이 이렇게까지 반복적으로 드러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저자가 독자보다 친구를 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것이 일종의 인류학적인 접근인 이상, 연구대상에 대한 일반화나 단순화를 지양해야 하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고(독자가 결과적으로 연구대상을 비난해도 그것은 저자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연구자와 연구대상 사이에서 인식의 괴리가 드러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저자가 그것을 강박적으로 반복 강조하는 것은 독서를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그렇게까지 개인적인 글이라면 출판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이럴 바에는 아예 학술적 글쓰기의 모델을 지켜서 정갈하게 재구성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장르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하한 기획 상의 과잉을 차치한다면,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한국 청년 남성’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가장 국지적이고 구체적 대상에 대한 질적 접근으로부터 어떤 보편적 경향성을 길어올리는 인류학적 접근의 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저자들과 동년배 남성인 나부터도 책을 읽으며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친구들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길거리에서 또래 여성의 번호를 반복적으로 수집하는(‘번따’) 친구 K, 수능에 여러 차례 도전하면서 특유의 능력주의 논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친구 H, 주식투자에 대해 대단히 심오한 의미를 담아 나름대로의 철학을 정립해두고 있는 친구 M까지. 구체적인 맥락이나 상황은 다 다르지만, 책 속 ‘우진’의 삶의 테마들은 나의 또래 지인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한국적인 ‘청년 남성성’이라는 어떤 경향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저자는 ‘번따’, ‘수능’, ‘주식’이라는 작중 ‘우진’의 삶의 테마를 ‘증명 강박’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낸다. ‘번따’ 강박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수능’ 파트를 읽고 나서 그것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 ‘수능파트’ 서술까지 읽고 나니, 한국 청년(남성)들에게 수능이란 단순한 대입시험이나 통과의례를 넘어 최초의 ‘증명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후의 모든 ‘증명’ 과정에 대한 원형적 체험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제한형 객관식 형식을 취하는 수능시험의 형식 자체가 가장 극단적이고 노골적인 방식으로 한국인들에게 ‘증명’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었고, 이것은 너무나 강렬한 체험인 것이어서, 한국인들은 이후의 모든 삶에서도 그와 같은 형식의 서열주의적 규격화를 스스로에게 강요하게 된다. 끔찍한 일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과 달리 모든 청년남성들이 ‘군대 체험’ 자체를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이 책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우진’이 스스로 증언하고 있듯이, 군대체험 역시 한국남성으로서의 정상성 규범을 충족하기 위한 당연한 통과의례라고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군대야말로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규범에 가장 근접하게 소속되어 있을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다만 이 책이 제시하는 ‘증명’의 테마가 결국 ‘이상화, 정형화된 정상성’에 대한 강박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저자의 발견이 대단히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아울러 이 책의 또다른 키워드인 ‘변명’에 대해서는 저자가 다소 얼버무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우진의 ‘증명’이 어떤 ‘변명’을 요하는 것이라면, 누구에게 하는 무엇에 대한 변명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요즘 맥락에서 좀 도발적으로 굴어보자면, 그러니까 우진은 1찍인가, 2찍인가, 라는 물음은 매우 결정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이 물음이 시의적절하고 타당한 물음이라면, 우진의 변명은 다름아닌 민주진보진영의 386-기성세대와 2030여성들을 상대로 한 변명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근본적으로 ‘변명’을 요하는 것인지, ‘변명’을 함으로써 정상참작이 되는 문제인지를 본격적으로 다루었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우진이 ‘1찍인지 2찍인지’ 밝히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대남 문제의 핵심은, ‘증명 강박’이 ‘2찍 내지 극우화’로 귀결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규명에 있다고 할 텐데, 그 문제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 들어 있지 않다. 이 책이 전체적으로 산만한 것은 그와 같은 문제설정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저자의 문화연구는 정치경제학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이 이 책의 한계다.

여담으로, 연세대학교의 대학원생 연구자들이 잇따라 단행본을 출간하면서 이제 한국에 ‘연세대 문화연구 학파’로 묶일 수 있을만한 어떤 지식그룹이 출판시장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 그룹의 논문과 단행본을 자주 인용하는데, 그와 같은 상호인용과 참조를 자생적 학파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시그널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그룹의 문화연구 작업들에 대해 시큰둥한 편이긴 하다.

... 요즘은 사라 아메드를 참 많이 읽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