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문학

존 맥스웰 쿳시, <추락>을 읽고

장기균형 2025. 5. 13. 13:21

영문학 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제자인 멜라니 아이삭스와의 성추문으로 해임되는 ‘불명예’를 입은 뒤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가 딸 루시와 함께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흑인 괴한 세 사람에게 습격을 당하고, 딸인 루시는 강간 피해를 당한다.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여기서 루리 교수가 역지사지의 깨달음을 얻고 반성과 회개를 거쳐 ‘개과천선’하는 것으로 종교적 감흥을 유발하는 구성을 취했을 것이다. <추락>의 비범함은 이런 방식의 서사구성에 철저히 저항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역사적 화해와 통합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냉정하게 성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성 비위는 단지 낭만주의자다운 자연성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둥,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데이비드 루리는 ‘습격’ 이후 아이삭스 가족을 방문해서 사죄를 하긴 하지만, 소설은 루리가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무엇보다 불가해한 것은 루리의 딸 루시의 태도다. 그녀는 강간피해를 당하고서도 아버지 루리만큼 가해자에 대해 분노하고 있지 않고, 가해자의 친척인 페트루스와의 결혼을 일종의 동맹의 형태로 받아들이려고 하며, 심지어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를 출산하려고까지 한다. 이것은 ‘백인’인 그녀의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는, 아프리카적이고 시골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루시는 이것을 기이한 침묵 속에서 받아들인다. 루리가 제자를 상대로 한 간음행위에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국주의 문명의 (바이런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적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 한 인물이라면, 루시는 농촌의 ‘동물적인’ 전근대성을 아프리카적 현실 속에서 수용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때 쿳시는 서구적 근대성의 폭력성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것이 제3세계의 전근대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없다는 탈식민적 균형감각을 전형적으로 발휘하고 있다. 스피박식으로 말한다면, 루시는 서구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제3세계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중으로 침묵을 강요당한 ‘서발턴(subaltern)’이다.

<추락>은 궁극적으로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흑인과 백인 사이의 정치적 화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에 불과한지를 폭로하고자 한다. 루리 교수가 아이삭스 가족에게 전하는 미진한 사죄와, 페트루스가 ‘루시의 안전을 위해’ 제안하는 결혼은 모두 진정한 문제를 일단 덮어놓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루리와 루시의 이와 같은 불화와 차이는 한 세대와 그 다음 세대, 남성과 여성, 도시와 시골, 사람과 동물, 그리고 남아공 정치사의 맥락에서 백인과 흑인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절망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개’의 표상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신과 역사적 상흔을 상징하는 것으로, 소설적으로는 루시가 임신한 태아와 그 이미지가 겹친다. 루리가 개의 안락사를 받아들이고 화로에 개의 시체를 집어넣으면서 그 개를 ‘단념’하였다고 읊조리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지나치게 자조적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화해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드러내는 시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허울과 형식뿐인 화해로써 도모하는 미래란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와 다를 것이 없다는 쿳시의 잔혹한 일침이다. ‘작가는 이러한 윤리적 불가능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쿳시는 가능한 유일한 윤리적 태도로서 ‘절망적 중립’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고통스러운 중립은 <추락>의 미덕이자 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