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 자기서사의 무의식: 김두식, 문유석, 박주영의 에세이와 착한 법조인들
법조인 자기서사의 무의식:
김두식, 문유석, 박주영의 에세이와 착한 법조인들
한국인이 쓴 에세이를 썩 좋아하지 않고, 한국의 법조인들에 대한 존경심도 별로 없는 나로서는 ‘한국의 법조인이 쓴 에세이’를 굳이 손에 집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법조인 에세이가 곧잘 팔리는 한국의 출판환경에서 일종의 ‘베스트셀러의 사회학’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동기와 더불어, 패륜적인 사법부에 대한 문제제기와 사법개혁 논의가 한창인 오늘에 이르러 그 내부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하는 동기가 작동하여 굳이 시간을 내어 최근 20년간의 대표적인 ‘법조인 에세이’를 일별하여 읽었다.

1. 김두식, <헌법의 풍경>(2004, 2011), <불멸의 신성가족>(2009, 2019)
이 장르의 개척자는 현재 경북대 로스쿨 교수인 검사 출신 형사소송법 학자 김두식이었다. 그의 첫번째 히트작인 2004년작 <헌법의 풍경>은 출간 후 노무현 대통령의 직접적인 추천이 있기도 했고, 그 해에 고등학생 권장도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듬해엔 한국출판문화대상을 받는 등 다양한 경로의 추천에 힘입어 법학교양서로는 드물게도 수년간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차지해왔다(가장 최근 언급된 것은 2021년 9월 노무현재단의 공식 유튜브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 북스’에서였다). 김두식의 이후 저작은 <불편해도 괜찮아>(2010), <욕망해도 괜찮아>(2012) 같은 청소년 교양서와 <불멸의 신성가족>(2009, 2019), <법률가들>(2018) 같은 법조계 내부비판서로 나뉘는데, <헌법의 풍경>은 이후의 두 경향이 교묘하게 합쳐져 있다. 경어체를 사용하는 등 청소년교양서적인 측면이 강하여 ‘애들 보는 책인가?’ 싶어질 때 즈음 당대의 정치시사이슈나(유시민의 국기에 대한 경례 비판 사건, 한나라당의 차떼기 사건, 노무현 대통령의 ‘검사와의 대화’, 송두율 사건 등) 법조계 문화에 대한 신랄한 코멘트가 등장하는 식이어서 확실히 오랜 시간 독자들에게 읽히는 책다운 입체적인 면모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청소년이 아닌 2025년의 독자가 법치주의에 대한 온건하기 짝이 없는 중학생용 교양을 갖추기 위해 20년도 더 된 이 책을 굳이 찾아 읽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헌법의 풍경>은 헌법학의 기본권론에 대한 청소년 교양서로서 훌륭하다기보다 2004년 당시 정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전관예우나 검찰개혁 같은 법조계 내부의 문제들에 대한 기초적 해설서로서 탁월하다. 군법무관 훈련소에서의 경험담을 통해 얼굴이 화끈해지는 사법연수원생들의 ‘내면화된 특권의식’을 폭로하는 대목이나, ‘20대 판사, 30대 검사, 50대 변호사로 이루어진 법정’으로 전관예우 문제를 단숨에 요약해내는 것은 확실히 이 책의 강점이다(차기작인 <불멸의 신성가족>에서도 법조브로커나 법원과 검찰 내부의 ‘용돈’ 문화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소구력은 출간 당시 40대가 안되었던 검사 출신 교수인 저자가 일종의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면서 법조계 내부의 전근대적인 문화를 폭로하는 입장을 취한 것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태도가 2004년 당시의 시대정신, 이름하여 ‘사상으로서의 친노주의’와 공명했던 것이야말로 이 책이 ‘성공’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책이 ‘스테디셀러’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상으로서의 친노주의’ 및 그 요체로서 ‘검찰(사법)개혁 의제’의 유효성(steadiness)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야 한다. 2004년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태와 그 역풍으로 인한 열린우리당 과반의 국회가 만들어졌던 정치적 격변기였다. 한국 역사상 최초였던 진보 과반 의회가 밀어붙였던 ‘4대 개혁 입법운동’의 성취와 실패는 2004년의 시대정신을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이 출간되었던 2004년 6월의 정세로부터 이 책과 저자를 떨어뜨려놓고 파악할 수는 없다. 2021년에 유시민이 재차 이 책을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방송에서 소환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스쿨 체제가 자리잡기 시작한 요즘엔 흔한 일이지만, 2004년 당시 저자 김두식은 박사학위 없이 실무가 출신으로서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던 특이하고 운이 좋았던 케이스였다(당시 한동대 교수). 저자의 사법연수원 동기들은 오늘에 와서야 법조인으로서 ‘원로’가 되어가고 있는데(대법관 마용주, 국회의원 박범계, 심지어 내란수괴 윤석열이 그의 동기다), 검사 출신 법조인으로서 2004년 당시에 변호사개업도 하지 않고 지방 사립대학에서 ‘시민생활과 법’ 같은 교양강의를 하는 것에 만족했던 저자의 캐릭터가 어딘지 반골스럽게 여겨졌던 것도 이 책의 성공에 일조했을 것이다.
확실히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이제는 조금 촌스러운, 2000년대 특유의 ‘리버럴함에 대한 과시’다. 당시는 김어준이 인터뷰 상대인 정치인들에게 ‘오늘 팬티 색깔이 무엇인지’를 묻고 다니는 것이 어떤 해방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기였는데, 이 책 <헌법의 풍경>에도 ‘음란’ 개념을 설명하거나 국가폭력에 대해 서술하는 장면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세밀한 서술이 눈에 띄었다(청소년교양서에 가까운 책의 전체적인 톤에 비추어 그 대목이 튄다). 그것을 굳이 그렇게 자세하고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기꺼이 꺼리지 않는’ 태도가 당시의 리버럴리즘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잡종 변호사’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똥개 변호사’라고 지칭한 것도 과시적 리버럴리즘의 발로이다. 문화적 자유주의자의 태도를 과시하는 것이 그 자체로 비난거리는 아니다. 문제는 그 과시적인 태도가 모종의 개혁성으로 오인된 결과, 과시적 제스처가 진보적 문제설정을 방기하는 것에 대한 교묘한 알리바이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요즘 맥락에서는 리버럴한 제스처가 대안우파의 감수성을 자극하여 괜한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도 문제다). 김두식의 ‘법조인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신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온건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도덕률의 틀 안에서 평이하게 이루어진다.
대표적으로 법조인 사회가 안고 있는 폐단의 원인을 ‘원만함 이데올로기’로 집약하는 저자의 관점은 매우 문제적이다(<불멸의 신성가족>). 그는 전관예우와 같은 병리현상의 중요한 원인을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내면화된 특권의식이나 법조인 사회 내부에서 통용되는 처세술에서 찾는다. ‘공부만 잘했던 모범생들’의 ‘튀지 않으려고 하는’ 성정 따위에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다 보니 해법도 단순하다. 변호사 수를 늘리면, 이른바 ‘튀는’, ‘반체제적’ 법조인들(저자의 표현으로 ‘똥개 변호사’)도 많이 등장할 것이므로 법조계의 퇴행적 문화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물론 ‘해법으로서의 똥개 변호사론’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 김두식의 후속작 <법률가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법률가란 기본적으로 이른바 ‘재조 법조인’인 판사와 검사였다. 한국에서는 모든 법조인이 ‘전관’이었고, 이런 순혈주의 전통은 사법시험 합격자 전원이 3년간 동고동락하도록 되어 있는 사법연수원 시스템 하에서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영미식 법조일원화 시스템이 모든 법률가가 ‘변호사’로 출발해서 경력에 따라 판사나 검사로 진출하는 구조라면, 한국은 대부분이 ‘판사나 검사’로 출발해 퇴직 후 준(準)원로로서 변호사로 전업하는 ‘뒤집어진 법조일원화’ 체제를 오랫동안 지속해왔다. 이 ‘뒤집어진 법조일원화’ 시스템은 서열문화와 결합하여 한국의 법 문화를 심각하게 왜곡해왔다. 새파랗게 젊은 20대 판사에게 60대 피고인의 운명을 건 판결을 맡길 수 없다거나, 전관 변호사들이 서초동 일대에서 이름만 빌려주고 수십억을 벌어들이는 것이 재야 변호사 입장에서 보기에 불공정해서가 아니다(물론 그것도 문제다). 한국의 ‘뒤집어진 법조일원화’ 체제는 근본적으로 법의 지배 이념을 형해화하고 인습과 (사법)관료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패륜적 사법부의 중요한 기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로스쿨 시스템을 도입하여 사법연수원으로 일원화되어 있던 법조인 양성기관을 형식적으로나마 다원화하고, 경력판사제도를 통해 영미식 법조일원화로의 길에 다가간 것은 일단 반길만한 일이다. 변호사 공급을 파격적으로 늘린 것은 단순히 변호사의 단가를 낮추고 법률시장 내 경쟁을 촉진하여 법률소비자들의 편익을 증진하는 차원이 아니라, 법조인 사회 자체를 ‘전관(판검사) 위주’에서 ‘변호사 위주’로 바꾸기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였다고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로스쿨 시스템이나 법조인 공급정책이 하나의 해결방법일 수 있음은 별론으로 하고, 김두식의 입론은 문제의 근본 원인을 끊임없이 법조인들의 ‘내면화된 특권의식’이나 처세술, 그리고 내부자들 간의 인간관계 관리술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불멸의 신성가족>). 그의 대안은 결국 기성 법조인들보다 더 리버럴하고 ‘MZ한’ 법률가들—이를테면 ‘똥개 변호사’—의 등장과 ‘워라밸’을 선호하는 개인주의적 라이프스타일의 대세화로 한국 법조계의 봉건성이 자연스레 해소될 것이라는 나이브한 낙관론에 기대고 있다.
한국의 법조인들은 하나같이 ‘공부만 하던 모범생’ 출신이라서 필연적으로 ‘튀지 않으려는 성정’을 지녔기 때문에 오늘날 법조인 사회가 ‘자기도 모르게’ 타락했다는 김두식의 진단과 달리, 일정한 지위 이상에 오른 법조인들은 놀라우리만치 불량하고, 때로는 거의 혁명적일 만큼 일탈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전관예우나 법원행정처발 사법농단과 같은 폐단이 단순히 순치된 성정이나 타성에 젖은 관료제의 산물이 아니라, 제도화된 특권구조가 빚어낸 결과임을 시사한다. 구조화된 특권이 원인인 이상, 법조인들의 성정 개조 노력이나 의식화운동 따위를 통한 자체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해야 한다. 김두식의 논의는 사법부 내부의 자성을 촉구하고 법조인들에게 겸양의 미덕을 갖출 것을 권고하는 목사님의 훈시로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러한 자기반성은 그래봐야 ‘앞으로는 잘하겠다(잘해보자)’는 의미이므로 오히려 사법부 외부로부터의 개혁 가능성을 봉쇄하는 결과를 낳는다.
사법부 스스로에 의한 개혁을 시도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법원 바깥의 민주화에 상응하는 법관들 스스로의 개혁운동으로서 3, 4차 사법파동이 있었고(이를 주도했던 것이 바로 법원 내 진보적 판사모임으로 알려진 ‘우리법연구회’였다 - 우리법연구회가 좌경판사단체라는 보수 일각의 낙인 찍기 시도가 있지만, 한국현대사의 맥락에 비추어 우리법연구회는 사법부도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한다는 법관들의 모임으로서 역사적 ‘본류’를 대변하는 집단인 것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 후 이용훈 대법원장과 ‘독수리 5형제’로 상징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실질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사법부의 자체 개혁 시도는 이명박 정부 당시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관여사태’(이른바 5차 사법파동)와 6차 사법파동이라고 부를 만한 양승태 코트의 ‘사법농단 사태’라는 반동으로 좌절되고 만다. 특히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에 대해 법원이 스스로 문제를 수습하지 못한 결과, 또다른 반동세력인 검찰이 나서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법리로 사법부를 단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라는 반동으로 인해 문제는 더욱 감정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양상으로 변질되어버렸고, 앞으로 법관과 검사들 스스로는 문제해결이 불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이상의 서술은 이춘재(2013), 권석천(2017) 참조). 여기에 2025년 조희대 코트가 충격적인 전원합의체 판결로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사법부를 최종적으로 망가뜨려버렸다. 강력한 입법조치나 시민사회의 개입을 통한 사법부 바깥으로부터의 개혁이 불가피한 이유다.
로스쿨 제도가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었다면, 그것은 로스쿨 체제가 법조계의 탈-판검사화를 통해 특권구조를 해소할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지, 단순히 양적으로 늘어난 법조인 가운데 ‘리버럴한 법조인’도 일부 섞여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특권구조의 해소’와 ‘법조계의 탈관료화’라는 본질을 제쳐둔 채 ‘변호사 수 늘리기’와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라는 구호 아래 로스쿨 시스템이 성급하게 도입된 결과, 연간 1700여명의 변호사를 배출하는 현행 로스쿨 시스템 하에서도 특권구조는 해소되지 않고 있다. 상대평가식 변호사시험으로 인해 로스쿨이 ‘학원화’되어 ‘법학교육의 본질’이 훼손되었다는 것은 귀여운 투정에 속한다. 어느 로스쿨 출신인지에 따라 진로가 정해지다시피 하는 강고한 학벌주의로 인해 로스쿨 재학생이 재차 입시를 거쳐 ‘한 급 높은’ 로스쿨로 진학하는 ‘반수’가 성행하고 있고, 로스쿨 서열에 따른 변호사 시장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법조시장 안에서도 일종의 ‘이중 노동시장’이 형성되어 ‘인서울대형 로스쿨-대형로펌 출신’의 ‘성골’들은 과거 법조인들과 같은 특권구조의 수혜를 그대로 누리는 반면, ‘지방대 로스쿨 출신’들은 생존경쟁에 내몰린다. 그러다 보니 성적이 우수한 지방대 로스쿨 학생들은 막연히 과거와 같은 전관예우 혜택을 기대하고 ‘공직’ 루트에 해당하는 ‘검사’와 ‘재판연구원’ 진로를 우선적으로 지망하게 되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명문로스쿨-대형로펌 출신’ 변호사를 ‘신성가족’의 일원으로 ‘모시는’ 후관예우가 성행한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변호사들은 무한경쟁의 법조시장에 내몰리게 되므로 김두식의 기대대로 ‘똥개 변호사’가 되어 공익활동에 헌사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성골’들로 이루어진 ‘그들 만의 세계’가 유지되는 한, 불량한 법조인들의 일탈적 행태는 다음 세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저자가 내부자로서 체험한 ‘그 시절 법조계’의 ‘선민의식’과 ‘서열에 대한 집착’에 방점을 찍는 것도 그만 둘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문화심리적 요인을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환원하는 것은, 우선 문제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아니기도 하고, 제도적 병폐의 원인을 법률가 개인의 ‘의식’의 문제로 전가하여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방식으로는 사안을 보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수도 없다. 김두식의 ‘똥개변호사론’은 법조인 스스로에 의한 변화의 가능성이 남아 있던 2004년의 맥락에서는 부분적으로 유효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양승태 코트와 ‘이명박근혜’ 시대,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쿠데타, 그리고 로스쿨 제도의 사실상의 ‘실패’ 이후로는 폐기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김두식은 조국, 금태섭과 함께 형사법 진영에서 대중적 리버럴리즘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주지하듯이 조국은 형사법학자 출신이고 금태섭은 검사 출신이다 – 비교적 최근의 인물로는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 정도를 추가할 수도 있겠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때까지도 SNS를 통해 현안에 대한 언급을 멈추지 않던 김두식은 2018년 <법률가들> 출간을 끝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장 최근의 대외활동은 2019년 2월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정운호 게이트로 시작되었던 박근혜 탄핵 국면과 양승태 코트의 사법농단 사태가 한국 법조인들의 망동의 정점일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2025년에 이르러 지귀연 재판부의 일탈적인 구속취소 결정과 조희대 코트의 문제적인 초고속 전원합의체 판결로 김두식이 그토록 문제시했던 ‘법조인 사회’의 패륜성이 점입가경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시적 리버럴’이자 ‘형사소송법 학자’인 그의 침묵은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필자가 확인하기로 김두식은 지난 내란 국면에서 그 흔한 시국선언에 이름 하나 올리지 않았다). 특히 지난 내란 국면은 장삼이사도 한 두 마디 얹을 수 있는 사태였다.
박근혜 탄핵국면과 윤석열 내란국면의 중요한 차이점은 여론 분포였다.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덜한 일이었지만, 윤석열 내란국면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게도) 반대진영으로부터의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여겨졌다(이것은 분명히 거대한 퇴행이다). 하지만 법 문언과 실무관행에 반하는 일탈적인 구속취소 결정과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 그리고 대선 직전의 극히 이례적인 형사사건 유죄취지 파기환송심은 이전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정치화된 법원과 검찰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박근혜 탄핵국면에서 목소리를 내고도 윤석열 내란국면에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비겁함이라기보다 정치적 맥락에 놓이는 것을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법조인 특유의 중립지향적 무의식의 발현이다.
결국 김두식은 이 맥락에서, 구체적 정치세력으로 거듭난 ‘사상으로서의 친노’ 그룹과 그들이 제시하는 강력한 사법개혁 의제 및 제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판단하는 것을 끝내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소극성은 어느 진영에 속하기를 극히 꺼리는, 그리하여 구체적 실천과 대안제시로는 나아가기 힘들되, 단지 ‘서열에 집착하며 선민의식에 젖은 법조인 부류’에 대해 도덕적 비난을 가하는 것으로 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고 자신하는 김두식 방식의 개인주의적 리버럴리즘이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실망할 일은 아니라고 하겠다.

2.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2015)
전체적으로 산만하기 짝이 없는 <개인주의자 선언>에는 ‘개인주의’와 관련이 없는 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논평의 가치가 있는 것은 본문이 아니라 제목이다. 이 책이 발산하는 대중적 호소력의 핵심은 ‘개인주의자임을 ‘선언’하겠다는 제목에 있다고 해야 한다. 호기로운 제목과 달리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저자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두 가지 측면에서 호소하고 있다.
첫째, 저자는 책 제목을 통해 본인이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하고 있다기보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이 책의 제목은 <공산당 선언>의 패러디다). 이것은 거창하게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조차 아니고, 단지 본인을 정치에 연루시키지 말아달라는 호소이다. 이를테면 그는 ‘정답이 없는 세상’ 운운하며 정치적 양비론을 옹호하고, 당파적 진영논리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내며 ‘좌우 자판기를 철거’해야 한다고 웅변한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균열을 두고 ‘조용필 세대와 서태지 세대가 서로 ‘울 오빠’의 업적이 더 뛰어나다고 싸우는 꼴’이라고 묘사하며 초등학생 수준의 사회인식을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드러낸다. 저자는 그런 것을 무려 ‘합리적 개인주의자’의 정치관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이고, 이 책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도 그것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저자는 책 제목을 통해 자신이 ‘집단주의자가 아님’을 호소하고 있다. 이때 집단주의자는 구체적으로 386-운동권을 지칭한다. 책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88학번’인 저자는 자신의 대학시절을 회고하면서, 그 시절의 한국사회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그 토대인 합리적 개인주의가 결핍되어 있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일갈한다. 본인은 당시에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가장 중요한 인간’이었으므로 ‘당시 대학가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이 체질적으로 어려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다. 문제는 그러면서 80년대 운동권의 이념을 ‘마르크스주의’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북한, 소련, 중국 같은 전체주의 사회에 사는 것’을 ‘남들에게 권하는’ ‘죄악’이었다고 단정하며 강렬한 가치판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80년대 대학가의 마르크스주의 및 주체사상 편향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80년대와 90년대 초반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항거와 노동자-민중에 대한 하방운동 전체를 ‘죄악’이라고 일반화해서 폄하할 필요도 없다(그것이야말로 저자가 소리 높여 반대하는 ‘집단주의적 사고’ 아닌가). 지금에 와서 그 당시 386의 집단주의나 군사주의를 비난하는 것에는 아무런 용기도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 세대의 내부자이기도 한 그가 새삼 ‘개인주의’ 운운하며 그 시대의 일면에 대해 냉소적으로 구는 것은 비겁하기까지 하다.
결국 저자가 내세우는 ‘합리적 개인주의’의 정치적 실질은 ‘탈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한 ‘안티-386’이라고 할 수 있다(이 대목에서 문화적 편력을 과시하는 또다른 법조인인 한동훈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교활하게도 저자는 이 정치적 실질에 대한 알리바이로 사이비 정치철학과 라이프스타일로서의 리버럴리즘에 대한 옹호를 덧대어 자신의 정치적 편향성을 은근슬쩍 감춘다.
먼저 그는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괴이한 방식으로 서구 민주주의 사상사를 요약한다. 그는 서구 민주주의가 ‘인간성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민법, 상법, 소송법(?)을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불신에 기초해(?) 정교하게 상호 견제가 가능하도록 만든 부분들’이 그렇게 감탄스러웠다며 역시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 서구식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개인주의(?)’만 한 것이 없다고 뿌듯해한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혼동하는 귀여운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캐치프레이즈인 ‘개인주의’에 어떤 사상적인 아우라를 덧붙이고 싶어서 서구 정치사상사 전체를, 왜곡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상상해서 창조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저자는 한국의 서열주의나 비교와 질투문화 등을 ‘집단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개인주의를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재차 옹호한다. 아마도 이 책의 가장 강력한 대중적 호소력은 이 대목에서 기인했을 텐데, 이를 테면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 남들과 다르게 비치는 것, 튀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 ‘인정투쟁의 소용돌이’는 집단주의 문화의 발로라면서 ‘개인주의자가 될 것’을 권면하는 식이다. 이 책에서 거의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대목이긴 한데, 이것을 앞서 언급한 ‘탈정치적 중립성’, ‘안티-386’, ‘사이비 정치철학’과 나란히 놓고 보면 이들을 결코 ‘개인주의’라는 이름 아래에 뭉뚱그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과연 한국의 서열주의 문화가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의 결과인 것인지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문제점은 서열주의 자체나 ‘개인주의의 부재’ 보다 ‘공공성 개념의 부재’에서 비롯한 바가 더 크고, 오늘날 한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충분히 개인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충분히 정의롭지 않아서’ 더 문제다.
저자는 친근하고 쿨한 리버럴리즘을 내세워 내심의 정치적 편향성과 인식의 편협함을 성공적으로 감추고 베스트셀러 에세이 작가가 되었다. 이런 방식의 이중, 삼중의 왜곡과 견강부회를 거친 안전한 ‘중립’으로의 귀결은 동시대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정치관 형성논리를 압축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진부하고 식상한 것인데, 이 글에서는 특별히 이를 ‘베스트셀러 법조인 에세이’의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써 이것이 사법부 핵심 내부자의 자기서사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김두식의 저작들과 이 책을 관련 짓고, 두 책의 저자와 독자들에게서 어떤 유사-자유주의적 연속성을 읽어 내기는 어렵지 않다. 김두식은 67년생-연수원 23기(검사) 출신이고, 문유석은 69년생-연수원 26기(판사) 출신으로 두 저자는 동년배 법률가들이다. 순진하게도 그들은 단지 ‘합리적 개인주의자’ 내지 ‘온건 자유주의자’가 많아지는 것으로 법조계와 한국사회의 모순과 병폐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저자들 스스로가 전관 법률가로서 경험한 봉건적인 한국 법조계의 서열문화에 과하게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편향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 문제를 법조인사회 내부의 에티켓과 교양, 처세, ‘서열과잉’의 문제로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대로 한국 법조계의 봉건성과 후진성은 개인들이 노예근성을 벗어 던지고 단단한 자유주의자 내지 개인주의자로 거듭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봉건적이고 후진적인 법조계가 사회적 상식과 기초적인 정치적 감수성으로부터 유리된 채 과다한 권위를 가지고 한국사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구조 자체가 문제다.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면 두루뭉술하게 ‘서열주의’에 질색하며 한국인들의 습속(이른바 ‘종특’)을 개탄할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제왕적 대법원장’과 그 비서실 노릇을 하는 ‘법원행정처’로 대표되는 ‘사법관료화’ 자체를 정확하게 타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루어지면 법률가들은 곧장 ‘사법의 독립’이라는 이념으로 도망쳐 버림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정치화하여 이권수호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애당초 사법의 독립이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고, 어떤 시대의 권력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판단은 철저히 정치적 판단이므로, 사법의 독립은 그 말을 사용하는 이가 놓인 맥락과 진영에 의해 자의적으로 구부러뜨려서 갖다 붙이기 좋은 말이다. 요즘 ‘사법의 독립’이라는 말을 통해 한국의 법률가들은 스스로를 ‘누구로부터 독립시킬지’ 결정한다. 이것은 독재에 해당한다(선출권력이 비선출권력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지 어떤 지에 대한 설익은 정치철학적 논의는 불필요하다). 특정 법률가 집단 자체가 권력화, 이권화 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사법의 독립이란 어떤 거대한 월권행위의 정당화 기제일 뿐이다.
‘착한 법조인들’인 것처럼 보이는 김두식과 문유석은 왜 이 문제를 충분히 정확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 맥락에서, 각자 대단히 합리적인 체하면서도 현실정치의 구체적 맥락에 연루되는 것을 극히 꺼린다는 점은 법률가인 두 저자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공통점이 된다. 김두식이 문유석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 더 신랄해 보이지만, 그것은 2004년과 2015년의 ‘정세’의 차이에서 비롯한 착시일 뿐이다. 2004년이 탄핵 역풍으로 인한 민주당(열린우리당)-친노의 강세 국면이었다면, 2015년은 민주당의 혼란기이자 약세 국면이었다. 김두식이 <헌법의 풍경> 정도로라도 신랄할 수 있었던 것은 2004년의 맥락에서 그것이 ‘튀는’ 주장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문유석이 <개인주의자 선언> 수준으로 냉소적이었던 것은 2015년의 맥락에서 민주당 계열 정당과 86세대 정치인들을 싸잡아 비웃는 것이 별로 정치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해, 2004년의 맥락이라면 문유석도 <헌법의 풍경> 정도의 톤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2015년의 맥락이라면 김두식도 <개인주의자 선언> 레벨로 퇴행했을 것이다. ‘사법의 독립’이라는 이념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으면서 단지 좀 착하거나, 리버럴하거나, 교양 있거나, 쿨한 것에 불과한 ‘똥개 변호사’나 ‘개인주의자’는 한국 법조계를 변혁할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해야 한다.
법조인 특유의 기계적 중립성에 대한 강박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정치적 냉소주의와 사법 물신주의로 귀결된다. 그러나 한국의 법률가들은 태생적으로 중립적이지도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특정한 방식으로 대단히 편향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뒷짐지고 ‘중립’을 지키며 판사 노릇을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군사쿠데타가 벌어져도 그렇게 하는 것이 중립인가? 김두식과 문유석처럼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법률가들조차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는 그러하다는 점은 저자들이 제공하는 법조인 자기서사로부터 발견할 수 있는 법조인 일반의 중요한 한계이다. 10년 간격으로 출간된 베스트셀러 법조인 자기서사물인 <헌법의 풍경>과 <개인주의자 선언>은 ‘착한 법조인’의 개인서사가 왜소한 정치철학을 경유하여 한국사회의 사법 물신주의를 윤리적으로 정당화하는 교묘한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비판적 독자는 여기서 한국적인 사법의 정치화 내지 정치의 사법화 현상의 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3.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2019), <법정의 얼굴들>(2021)
또다른 86세대 인물로서 변호사 출신 경력법관인 박주영의 <어떤 양형 이유>와 <법정의 얼굴들>은 저자가 현직 판사로서 형사재판 실무현장에서 경험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형사사법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생하게 묘사하는 에세이다. 저자는 판결문을 쓸 때 상대적으로 형식에 덜 구애되는 ‘양형이유’ 부분을 독특하게 작성하는 것으로 알려진 판사였는데, 그 지점을 확장하여 단행본으로 구성한 것이 두 책의 컨셉이다.
각종 형사사건에 연루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소외된 이들인 경우가 많다. 법정에서 그들을 매일 마주하는 판사인 저자는 책에서 그때마다의 인간적 고뇌와 괴로움, (심지어) 회의감을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적인 판사’의 모습을 그린다. 이 책이 지닌 대중적 호소력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형사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가리고 누군가를 처벌함으로써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을 할 것으로 생각되는 판사이지만 그조차 한 사람의 확신 없는, 고뇌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접하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이 이 책을 흥미롭게 만든다(물론 법원과 판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독자는 그 사실이 그다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다).
<법정의 얼굴들> ‘심증’ 챕터에 나타난, 형사재판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법관의 심증 형성 과정에 대한 저자의 자세한 묘사는 형사적 정의(正義)의 불완전함과 위태로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형사재판의 진실 규명 절차에서 법리적 영역, 이른바 ‘법 기술 영역’은 진술증거 등이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따지는 증거채택 과정뿐이고, 일단 증거법의 문턱을 넘어선 이후의 심증형성은 오롯이 법관의 자유다(자유심증주의). 그런데 사실인정을 적법하게 마치고 나면, 최종적으로 피고인이 무죄인지 유죄인지, 유죄라면 어떤 형벌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 지의 문제는 반드시 판사만이 ‘옳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저자는 실제 사건에서는 그 실체가 애매모호하거나, 채택된 증거만으로는 도저히 사실인정이 어려운 순간이 오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사법연수원에서 꾸며 만든 시험문제용 사건기록과 달리 실제 사건기록의 이면에는 ‘실존하는 진짜 사람’의 삶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에 대해 고독한 근심의 시간을 거쳐 ‘판결문을 납품’해야만 한다. 재판(사법)의 독립의 본 의미는 바로 그 고독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법관의 심증형성 과정이 저자가 고백하는 바대로 일종의 인간적 고뇌를 수반하는 영역인 이상, 재판의 독립은 판사의 독단이나 독재를 의미하는 것일 수 없다. 형사법원의 판결은 좁게는 검사의 항소와 상급심에 의해 견제 받고, 근본적으로는 이른바 사회적 상식과 ‘법 감정’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국민참여재판의 실제 모습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흥미롭다. 현실에서는 범죄자들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엄벌주의 여론이 기세 높지만, 실제 국민참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한 일반 시민들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극히 꺼름칙해하는 편이고, 그래서인지 양형도 낮은 편이라고 한다(<법정의 얼굴들>, 291쪽). 그런가 하면 조현병 환자에 의한 범죄에 대해서는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반영하여 유독 가혹하게 판단하는 편이다. 저자는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는지 여부에 따라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도 그 양형이 천차만별이 된다면, 그것을 ‘공정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실제 판사의 양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정치적 색깔이 가미된 사건이 아닌 이상, 법원에 대한 국민적 불신의 중심에는 파렴치범과 강력범죄자에 대한 판사의 관대한(?) 양형이 있다. 그토록 잔인한 범죄자를 어째서 극형에 처하지 않느냐는 식이다. 범죄를 다루는 시사 프로그램 영상에는 언제나 범죄자보다 그를 ‘풀어준 판사가 더 나쁜 놈’이라는 식의 댓글이 반드시 달린다. 특히 주취감경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다. 형사적 정의에 대한 일반 시민의 관점이 주로 ‘양형’에 몰입하고 있는 만큼 이 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명(?)은 책에서 가장 유익한 부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주취감경은 ‘악질적인 범죄자를 봐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법정형 자체가 대단히 무거운 것에 비해 구체적 사실관계를 들여다보면 피고인을 그 죄책으로 의율하여 징역형에 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경우, 아무리 작량감경을 해도 집행유예를 할 수 없어(3년 이상의 징역형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다) 양형이 부당한 경우가 실무상 발생하는데, 주취감경은 이런 경우에 ‘아주 제한적으로 적용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판사들 사이의 묵계라고 한다(<어떤 양형 이유>, 262쪽). 얼른 생각해보아도 판사들이 굳이 강력범죄자에게 무리하게 화끈한 감형을 해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저자는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정의라면, 양형에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도록 하는 주취감경은 ‘오히려 정의에 부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현장실무자로서 ‘법정형을 무겁게 하고 판사의 재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옳게 단언한다(264쪽).
저자는 어떤 범죄의 양형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생각되는 경우라도 이를 단지 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이나 피해자에 대한 공감능력의 결여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 설명한다. 살인죄의 법정형 자체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범죄의 양형을 파격적으로 높일 수 없다는 입법적 한계를 제외하면, 주로 원인은 양형의 일관성 유지에 있다. 그러니까 법적 안정성과 형평의 요청상 한 재판부가 맡고 있는 서로 다른 사건들 사이에서 양형의 일관성을 지킬 필요가 있고, 나아가 재판부 사이의 양형편차를 너무 크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누적된 양형실무와 상급심의 양형을 고려하면 특정 재판부가 특정 사건에 대해서만 튀는 양형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범죄의 양형은 대체로 ‘일정한 양형군에 수렴’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과적으로 ‘양형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정의에 부합하는 측면도 있게 된다. 개별 범죄의 양형 자체에 몰두하여 엄벌주의에 환호하는 한국사회의 평균적인 여론은 결국 응보적 정의관에 잠식당한 한국인들의 협소한 정의관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저자는 20세기 초반부터 강조되기 시작한 형사재판에서의 ‘피해자 소외’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현직 판사다운 균형을 지키고 있다. 피해자 보호가 강조되면서 관련된 제도도 정비되었지만, 여전히 피고인 중심 사고가 만연한 것이 저자가 접하는 법원 현장의 모습이다. 특히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증인신문 과정에서 벌어지는 2차 가해나, 살인죄 양형기준상 감경사유인 ‘피해자 유발’의 기계적 적용 때문에 양형 이유에 피해자의 나쁜 행실 등 ‘피해자가 살해당할 만했던 상황’을 반영하는 관행에 대한 묘사는 실제 재판 과정에서 벌어지는 피해자 소외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쯤 되면 이 책은 형사정책에 대한 개론서로 읽을 수도 있다. 저자는 소년범, 여성대상 범죄, 마약범죄, 정신이상자(조현병 환자)에 의한 범죄의 실제 처리과정을 소상하게 밝히면서 그야말로 실무가로서의 고민을 고백한다. 당장 감방에 집어넣어도 형기를 마치고 나면 머지않아 다시 형사법정으로 불려올 것이 뻔한 ‘회전문 피고인’들을 자주 접하는 저자는 그들을 당장 감옥에 집어넣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미국식 치료사법 이념을 소개하면서, 응보보다는 예방이, ‘양형’보다는 ‘양형 이유’가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유무죄를 다투는 사건이 아닌 자백사건인 경우, 결국 형사재판이란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실무관행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 타당성을 기하여 양형을 조정하는 숙의과정에 가까운 것이고, 습벽범죄 등에 대해서는 치료사법과 예방사법의 이념을 받아들여 사실상 준-행정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판사는 정의의 선포자라기보다 균일한 품질의 판결문을 납품하는 공무원에 가깝다는 느낌도 든다. 그렇다면 형사법원은 기계적인 3권분립의 틀에 갇힐 것이 아니라 법무부 등 행정부와의 협업을 통해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박주영에게서도 발견되는 법조인 특유의 협소한 정의관과 후견주의적 무의식이다. 저자는 법원이 ‘사회의 문제점을 미리 막아내지 못한다’(<법정의 얼굴들>, 62쪽)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치료사법의 이름으로 법원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자신하고 있다. ‘문제해결을 통한 분쟁예방을 목적으로 하고, 당사자주의적 경쟁절차보다는 협동적 절차’를 중시하는 ‘문제해결법원(problem solving court)’을 이상으로 삼으면서(<어떤 양형 이유>, 220쪽) 법원의 후견적 역할을 옹호하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당사자주의 소송구조 체계에 대한 반성적 조정과정으로서 회복적 사법 이념을 도입하고 있는 미국의 상황과, 직권주의적 소송구조 체계 하에서 공판중심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해 검찰을 비롯한 국가기구의 재판관여도를 줄여 나가는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 특히 검찰제도를 두고 있는 한국에서 검찰이 아닌 법원이 형 집행과정에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그 선의는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나치게 법원주의자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법무부와 검찰의 영역인 형 집행에 대해 법원이 월권하는 것이라는 전통사법측의 비판이 타당해 보인다. 법원은 그보다는 재판 자체의 충실과 공판절차를 통한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양형조사나 보호관찰 제도를 넘어서서 법원이 피고인과 피해자들의 복지센터 역할까지 수행하게 된다면 자칫 개별 재판의 충실과 공정성에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차라리 자신들의 본래 역할인 ‘인권옹호직무’를 태만히 하며 정치개입과 권력 놀음에만 여념이 없는 정치검찰과 검찰에 잠식된 법무부의 직무유기를 비판하는 것이 보다 적확한 방향 설정일 것이다.
생각건대 저자는 무의식적으로 직권주의 소송구조에 기울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거기에 깃든 내면화된 가부장주의다. ‘소년범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종호 판사가 소년범들에게 진심을 담아 호통을 치거나, 박주영 판사가 판결문을 통해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어 만져주거나, 문형배 판사가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피고인에게 ‘자살을 10번 말하게 하고 그 안에서 ‘살자’라는 말을 듣게’ 함으로써 생의 의지를 북돋워주는 등의 법정 에피소드들을 접하면 물론 가슴이 따뜻해진다. 개별 피고인이나 피해자들의 삶의 구체를 사려 깊게 살피는 판사는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선심성 퍼포먼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가 법원의 이름으로 개인의 삶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훈계하거나 위무하는 것이 어떤 무의식적인 가부장주의의 발로라는 점 역시 지적되어야 한다. 법원과 판사는 법정의 왕이자 아버지이므로 국민에게 그 정도 훈계는 마땅히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전제가 없다면, ‘호의’의 이름으로 그러한 월권을 감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국가기관도 개인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4. 착한 법조인: 김예원, 박준영, 그리고 조희대
이런 편향은 얼마전 검찰개혁 입법청문회에 나서서 민주당의 검찰개혁 입법에 맹렬하게 반대했던 김예원 변호사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공익소송을 많이 담당해온 ‘착한 법조인’인 김예원 변호사는 검찰이 보완수사권까지 빼앗길 경우, 형사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서민’과 ‘사회적 약자’ 사건들의 신속한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범죄피의자들만 판치는 ‘범죄 국가’가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자신은 정치적 입장도 없고, 정치검찰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단지 ‘정의의 수호자’인 검찰의 힘을 빼는 것은 ‘범죄옹호행위’라는 식의 편협하고 이분법적인 인식을 주저 없이 드러낸다.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는 구제불능인 ‘일반 서민과 사회적 약자들’을 공명정대한 국가기관인 검찰이 나서서 구제해줘야 한다는, 나아가 피해자들이 못다 한 사적보복을 국가의 이름으로 ‘신속하게’ 대신해주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비슷한 유형의 ‘착한 법조인’은 ‘재심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다. 재심을 통해 과거 사법폭력에 희생된 억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매진해온 그는 지난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을 계기로 검찰을 옹호하고 민주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검 과거사 진상조사단에서 활동하던 박준영은 ‘김학의 사건’이 민주당의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박탈)’ 입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매우 주관적인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갑자기 진상조사단 보고서 원문을 공개하면서 공익제보자 행세를 하는가 하면, 당시 ‘김학의 출국금지 사건’을 두고는 법무부장관이었던 추미애를 공격했다. 재심 전문 변호사로서 사법폭력 희생자들을 구제해왔던 그가 갑자기 검찰이나 김학의를 두둔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어떤 경우에도 형사사법 시스템을 정치적으로 ‘건드려선’ 안 되며 사법 시스템을 정치적으로 흔드는 것은 논리 필연적으로 ‘정의에 반한다’는 왜소하고 가부장적인 정의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박준영의 이런 인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은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그들 스스로의, 혹은 보수정권 인사(김학의는 박근혜 정부의 법무부차관이었다)의 범죄행위는 필사적으로 비호하는 기소독점주의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으로서 그 자체로 검찰개혁의 명분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건이었다. 김학의 사건의 본질 자체가 검찰권의 폐해인 상황에서 ‘민주당이 검찰개혁을 하기 위해 ‘김학의 사건’을 ‘이용한다’는 것이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 자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연이어 문제 삼았던 ‘김학의 출국금지 사건’ 역시 해외도피를 시도하는 권력형 성범죄 피의자를 법무부가 출국금지 조치한 것에 절차 위반이 있다는 의혹을 이유로 검찰이 거꾸로 당시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 관련자들을 기소했던 충격적인 사건으로서, 뭔가에 씌이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21세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노골적인 검찰의 정치 행위였다(검찰이 기소했던 관련자들은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당시 검찰은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이광철을 연결고리 삼아 조국 당시 민정수석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2024) 참조)
결국 박준영 역시 다른 착한 법조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논리에 연루되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법부나 검찰은 일체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진 진공상태에서 사심 없이 ‘정의’를 수호하는 기관인데, 민주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시스템을 손상(?)시키는 것은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는 소영웅주의다. 이들 순진하고 착한 법조인들은 고위권력자나 정치인 수사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자신의 ‘사심 없음’과 ‘비정치성’을 호소하고, ‘힘 없는 구제불능의 사회적 약자들’만 생각하면 직권주의 소송구조가 필요하고 타당하다고 인식한다. 그들은 정치논리를 뒤집어쓰는 순간 자신들의 순수성이 오염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정치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검찰과 사법부 자체가 정치화되어 있는 상황은 보지 못하고 막연히 정치에 대한 법치의 우위를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정의’ 자체가 형사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몇 년의 징역형을 선고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로, 재심을 통해 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무고한 자에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문제로 축소된다. 편협하고 일도양단적인 형사법 논리가 정치영역을 비롯한 사회일반을 잠식한 결과 법원의 판결과 양형이 정의의 기준이 되고, 국가형벌권의 집행자인 검찰은 정의의 수호자가 되고, 검찰을 개혁하자는 민주당은 범죄옹호집단이 된다. 민주당은 범죄옹호집단이지만 사법부와 검찰은 성접대를 받아도 쿠데타를 벌여도 일단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후견주의 및 직권주의 편향의 가부장주의적 무의식과 정치적 보수성의 내적 연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검찰과 사법부가 정치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위권력자나 정치인 수사가 놓인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법조인으로서 소리 높여 자랑할 일이 아니다. 애써 정치논리를 회피하려고 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정치적으로 심하게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 ‘선한 법조인들’의 인식은 단순히 가부장적이고 후견주의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다. 앞선 책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나 김예원, 박준영 변호사 같은 ‘착한 법조인’들의 직권주의 편향은 한국인들의 ‘양형 몰입형 정의관’, 즉 형사법적 유무죄 및 그 양형에 모든 정의의 바로미터를 의탁하고 정치를 배제하는 왜소한 정의관과 결합하여 매우 테크노크라트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논리에 따라’ 일체의 토론이나 논쟁도 차단되어야 한다(토론은 법정에서만 해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그것은 토론과 정치를 차단하는 파쇼 사회다. 그런 경직된 사회에서 김예원이나 박준영 같은 선량한 법률가들–그들은 김두식이 대안으로 제시했던 ‘똥개변호사들’이기도 한데-이 총대를 메고 열심히 애를 쓰면 사회적 약자들과 서민들은 ‘구제’될 수 있는 것인가. 문유석이 말하는 ‘개인주의자’로서 정치논리 바깥에서(정치 따위는 적당히 비웃어가면서) 법원의 판결만을 넋놓고 기다리며 각자의 좁고 얕은 정의를 선포하고 과시하는 일에 도취되는 것은 법률가로서 충분히 책임을 다하는 것인가.
한국인들의 형사법적 정의관, 검찰의 기소독점주의, 그리고 사법부의 관료-가부장주의가 결합해서 발생했던 사건이 바로 대선 직전 조희대 코트의 초고속 전원합의체 판결이었다. 아마도 조희대 대법원장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나라가 걱정되었을 것이다. 형제끼리는 으레 투닥거리며 성장하는 것이므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나 법원에 폭도들이 난입한 것은 흔히 있는 정치 싸움과 여론전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재명과 같은 ‘범죄자’가 대통령이 되어선 절대로 안 된다고, ‘아비된 심정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구국의 심정으로’ 이례적인 전원합의체 판결선고 장면을 생중계하면 국민들도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파기자판도 아니고 파기환송이었으니 너그러운 아버지다운 자제심도 발휘했다. 정치인의 특정 발언이 ‘일반 유권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인식되었을지’를 대법원에서 판단해주겠다는 법리조차 대단히 가부장적이다.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는 정치인의 표현이 ‘선거인에게 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관들이 제시한 핵심 법리인데, 정치인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유권자의 ‘전체적 인상’을 법원이 무슨 수로 판단하겠다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조희대 코트의 그 만행은 거대한 가부장주의 없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과연 김예원과 박준영, 또 김두식이나 문유석이나 박주영과 같은 ‘착한 법조인’들이, 조희대식 법원-가부장주의와 사법 물신주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따져볼 일이다. 그들은 ‘선하고 중립적인 아버지 법률가’의 이름으로 약자에 대한 자신들의 선의와 진심을 과시하면서 정치를 혐오하고, 무의식적으로 정치에 대한 법치의 우월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재생산한다. 그들은 정의가 정치와 상극에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정치와 무관하고 ‘중립적인’ 자신들만이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체의 정치적 논쟁과 거리를 둔다. 그러나 정의란 정치와 민주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상상할 수 없다. 정치를 혐오하는 착한 법조인들의 자기서사를 경계하고, 법치가 아닌 정치적 역동에 의하여 정립되는 ‘정의’를 기꺼이 끌어안아야 하는 이유다.
Reference (서평도서 외)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2017), <두 얼굴의 법원>(2019)
김두식, <법률가들>(2018)
문유석, <판사유감>(2019)
이춘재, <기울어진 정의>(2013), <검찰국가의 배신>(2024)
박준영 변호사는 왜 김학의 자료를 모두 공개했나? (노컷뉴스, 2021년 4월 22일)
https://m.nocutnews.co.kr/news/5540042
검사 2000명 놀게 하고... 돈 없고 힘 없는 서민만 옥죄는 '지옥문' 열린다 (조선일보, 2025년 8월 18일)
https://www.chosun.com/opinion/2025/08/17/XB2X3ACTQ5AXRKXD4MQNLYPAF4/
[로스쿨에서] “반수야, 어디 가니?”
https://www.lawschoo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21
[로스쿨에서] 법학교육과 변호사시험
https://www.lawschool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77
대법원 2025. 5. 1. 선고 2025도4697 전원합의체 판결 [공직선거법위반] [공2025상,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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