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주의라는 이름의 신념윤리: 박상훈, <청와대 정부>를 읽고

최장집주의라는 이름의 신념윤리:
박상훈, <청와대 정부>를 읽고
1. 최장집의 한국 민주주의론
박상훈의 <청와대 정부>는 최장집주의자의 정부관을 요약하고, 그에 입각하여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책이다(이 책은 문재인 정부 초창기에 출간되었다). 반론과 답변이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순식간에 읽을 수 있다.
최장집주의자인 박상훈은 이상적인 정당정치와 대의민주주의 옹호의 관점에서(이른바 ‘매디슨적 민주주의’) 대중동원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정치문화를 운동정치, 광장정치, 팬덤정치로 규정하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저자는 광장정치의 구체적인 해악으로 대통령 비서실과 수석보좌관 중심의 청와대가 ‘국민의 뜻’을 참칭하여 각종 개혁을 주도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군주처럼 행동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민주당 강성지지자들의 세계관에서는 ‘대선을 이겨도’ 바뀌는 것은 청와대 뿐, 관료도(‘관피아’), 의회도(‘수박과 적폐(내란)세력’), 사법부도(‘사법적폐’) 바뀌지 않는다. 이들의 관점에서는 청와대를 제외한 국가기관들은 이른바 ‘민주적 정당성’이 없으므로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된다. 강성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 초창기에 청와대 비서실과 수석이 중심이 된 ‘개혁’ 시도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친민중적인 황제와 귀족적인 정치인 집단(의회)의 대결은 로마시대(호민관과 원로원) 이래로 지속되어온 서양정치사의 고전적인 대립이다. 그 귀결인 폴리비우스식 정체순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도적 고안물이 바로 대표 제도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 민주주의였으므로, 대의제도를 우회하여 민중과 대통령이 직접 연결되는 현상은 위험한 징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민주주의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 최장집주의의 핵심이다. ‘청와대 정부’의 기원은 3선 개헌 이후 대통령실의 예산과 인력을 대폭 늘렸던 박정희 정부에서 찾아볼 수 있고, 민주당 진영에서 즐겨 사용하는 ‘적폐청산’이라는 용어 역시 최초에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사건의 원인으로 적폐를 지적하고 이를 척결하겠다고 선언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저자는 ‘청와대 정부’가 근본적으로 권위주의와 반정치주의(반의회주의)에 토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정권 초반 민정수석 주도의 개헌안 제출과 소통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던 청와대 국민청원을 강하게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책에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대목에서 문재인 정부 초기에 대통령과 비서실장, 민정수석, 경호원 네 사람이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모습을 두고 ‘청와대 F4’ 운운하며 열광하던 낯뜨거운 광경이나, 민정수석이 SNS에 ‘죽창가’를 올리며 반일여론을 주도했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문재인 정부의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는 의미에서의) 결과적 실패와 윤석열 정권의 대통령실 주도 군사 쿠데타까지 목도하고 난 시점에서 최장집주의자들의 관점은 한층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정권 초반이긴 하지만 현재 이재명 정부의 행보를 보아도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지자체장 출신 대통령의 개인기가 중심이 되는 ‘타운홀 미팅’이나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등이다. 일단 지지층은 효능감을 느끼며 환호하고 있으나 이것이 ‘청와대 정부’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가 동의어였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86세대 한국인들은 이런 식의 청와대주의나 대통령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자다운 거부감 자체가 없는 것으로도 보인다.
민주정치의 중요한 원리를 ‘책임’(견제와 균형)이라고 할 때, 저자는 기본적으로 의회를 중심으로 한 수평적 책임성을 강조하고, 이것이 민주정치의 또다른 중요 원리인 ‘참여’ 및 ‘대표’를 반영하는 수직적 책임성과 조화되도록 하기 위해 정당이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권력에 대한 그와 같은 ‘정치적 통제’가 제도적으로 원활히 이루어지는 ‘책임정부(정당정부)’를 최장집주의의 이상적 정부관으로 정리하고 있다. 대통령실 권한을 축소했던 김대중 정부, 당정관계 재정립을 위해 노력했던 노무현 정부와 달리, 의회를 무시하고 청와대 비서실 중심의 ‘개혁’에만 매몰되었던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성향만 반대인 권위주의 통치를 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미국 고전정치사상에 입각한 직접 민주주의 비판론과 비교정치학의 정치제도론, 그리고 헌법의 통치구조론을 조합하여 나름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춘 최장집주의자들의 이와 같은 입론은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반체제 정당으로 전락한 자칭 보수정당과 민주당의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와 특유의 광장정치에 대한 혐오는 언제 접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현실의 정치를 실제로 추동하는 것은 헌법적 표상 바깥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언론 용어로는 ‘시대정신’)과 유권자들의 정치적 정념을 시간차 없이 반영하는 변화된 언론환경(SNS와 뉴미디어 중심의 정치문화 – 이를 굳이 고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에 비견한 다음 근대민주주의의 대의제 옹호론을 진지하게 펼치는 저자의 논변은 조금 우스꽝스럽다)일 텐데, 이를 애써 무시하는 최장집주의자들의 관점은 기껏해야 관념적인 통치구조의 틀 내에서 사고한다는 점에서 매우 편리한 관점일 수밖에 없다.
2. 비교정치학의 부재
먼저 비교정치학의 관점에서 최장집주의의 한계를 살펴보자. 대통령실 정무수석의 역할은 여당 대표가 담당하면 충분하고, 국가안보실장도 필요 없다는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역할은 사실상 사라지게 된다. 장관과 국무회의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면 된다는 저자의 입장은 결과적으로 내각제주의자의 관점에서 대통령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대통령제의 고유한 특징에서 비롯한 한계를 의원내각제의 관점에서 꼬집는 것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한국의 대통령제가 다른 대통령제 국가들에 비해 유독 청와대주의와 대중동원주의로 경도된 원인을 적절하게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우리 헌법이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혼합’을 지향하고 있다고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대통령제적인 요소로는 무엇을 보충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혼합’이라면 동등한 비중을 할애해야 한다).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논리적 일관성은 인정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상당수의 장관을 현역의원들로부터 충당했는데(이는 현재 이재명 정부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내각구성에 반영했다고 해서 문재인 정부가 국무회의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주의는 대통령제의 한계라거나 운동권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대중동원의 결과였다기보다 여소야대 의회상황에서 마땅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던 현상이었다고 진단하는 것이 좀 더 진실에 가깝다. 그런데 여소야대 의회 환경에서 행정부와 의회의 대립은 그 자체로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한 대통령제의 본질이다. 저자가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실용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위해서는 다당제연합에 기반한 내각제적 정부운영을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모순처럼 들린다.
청와대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레이파트(Arend Lijphart)의 합의제 민주주의 옹호론을 원용하며 비례대표제와 다당제를 지지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최장집주의자들은 헌법학과 고전정치사상은 나름 열심히 하면서 특이하게도 (본업이라고 할 수 있는) 최신 비교정치학 업데이트가 늦다. 우선 레이파트의 헐거운 유형론은 한계가 많은 오래된 이론 틀이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나 어울리는 정부유형론에 비추어 한국의 의회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일치법과 차이법이라는 비교정치학의 기본 방법론이나 역사적 제도주의의 경로의존성에 둔감한 관념적인 방향설정이다. 최장집주의자들을 비롯한 많은 ‘진보적’ 정치학자들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다당제 연합정치나 노사 사회협약주의 따위를 이상적인 복지국가 이행모델로 전제하고 모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낡고 진부하며 한국의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한국형 복지국가는 동아시아 포스트-발전국가의 관료적 복지자본주의의 제한적 성공모델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비교정치경제론의 최신 관점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옹호하는 책임정당-정부는 포퓰리즘의 위협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환경에서는 강력한 양당제를 기반으로 해야 더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관찰도 이미 제출된 바 있다.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 이언 샤피로, <책임 정당>)
요컨대 저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가상의 이상적인 정부형태를 상정하고, 그것에 미달하는 한국의 정치제도를 신념윤리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가상의 ‘책임정부’가 수립되어 정치영역의 ‘제도적 선진화’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이 복지국가 및 포용적 사회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신념에는 이른바 ‘북유럽 복지국가’에 대한 낭만화 관성이 자리하고 있을 뿐 비교정치경제학적인 진지성이나 성실성은 찾아볼 수 없다. 정치적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최장집주의자들의 가장 약한 고리가 비교정치학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다.
3. 한국적 맥락의 탈각
저자는 박정희 정부를 ‘청와대정부’의 원형으로 제시하지만, 오늘의 ‘청와대정부’의 기원은 그보다 김영삼 정부로부터 연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첫 민간인 출신 대통령으로서 권위주의적 국가기구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위해 강한 대통령주의를 발휘해야 했다. 대통령 인사권을 이용한 하나회 숙군과 긴급명령권을 통한 금융실명제 도입과 같은 유명한 사례는 행정부 내에 청와대와 관료라는 이중 권력이 일종의 대결구도를 형성해야 했던 한국정치의 역사적 조건을 잘 보여준다. ‘강한 대통령주의’는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과정과 노무현 정부의 각종 개혁정책 운용과정에서 지속적으로 강화되었고, 특히 참여정부 이후로는 정권마다 정무직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대결양상(이명박 정부의 경우에는 검찰총장(한상대)과 중수부의 대결,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통령실과 검찰총장(채동욱)의 대결)이 반복되기도 했다. 저자는 ‘대통령실의 행정부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한국정치의 고유한 특징을 외면한 채 뜬금없이 정부와 의회의 대결을 부각하는데, 이는 개혁적 직선제 대통령이 떠맡아야 했던 ‘청와대의 책임성’에 대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사정 라인’인 민정수석-법무부-검찰 관계에서만 유독 그 갈등구조가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문제가 헌법적 표상 바깥의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윤석열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검찰개혁이야말로 한국정치의 중대한 시대정신이었던 것으로 (최소한 사후적으로) 밝혀졌는데, 이들 검찰 ‘세력’이 청와대와 법무부장관의 문민통제 시도에 매번 ‘저항’하고 그 수단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활용하여 (보수 야당의 비호 아래) 사실상의 정치투쟁을 펼치는 상황이 정권을 불문하고 반복되어온 것에는 한국사회의 이른바 법조엘리트들이 형성하고 있던 개혁적 선출권력에 대한 강력한 반감과 인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이권 수호라는 사회문화적 동기가 작동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를 정치적 힘의 논리로 정당하게 제압하는 것은 최장집주의자들이 협소하게 정의한 정치 개념에는 부합하지 않을지 몰라도 반정치주의나 권위주의로 쉽게 평가절하할 수 있는 현상인 것만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당시 추-윤 갈등 국면에서 문 대통령은 윤석열 총장의 손을 들어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청와대 정부의 증상이라고 진단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문제점은 대중 동원이나 대통령주의 자체였다기보다 어떤 갈등사안이 있을 때 대통령이 원칙 타령하며 뒷짐 지고 관망만 하며 정치적 책임을 끝내 회피했다는 데에 있다. 저자의 ‘책임정부’의 이상대로라면 이때 대통령은 원칙 타령하며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맞는데, 한국적인 정치지형에서는 그것이야말로 ‘무책임’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제도적 정치 바깥의 ‘권력’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이다. 저자의 ‘청와대정부’ 개념은 대통령실이 정부조직법상 행정부 소속이라는 데에만 주목하여 행정부 내부의 긴장관계를 무시하고 실제로는 부수적인 것인지도 모르는 정부와 의회의 대결구도를 과장하고 있다. 최장집주의는 ‘강한 정당’을 통해 정부의 관료적 기능과 정치적 책임이 통합될 수 있다고 보는듯하지만 행정부의 관료적 ‘기능’과 대통령실의 정치적 ‘책임’이 분리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이 ‘약한 정당’의 조건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일종의 순환논증이다.
저자는 정부여당이 야당의 협조를 구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고 편리하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국민의 힘과 민주당을 동등한 잣대로 평가하는 최장집주의의 맥락탈피적 중립성이 나타난다.
2010년대 한국정치를 지배하는 정념을 상대 정파에 대한 원한감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은 이명박 – 한나라당 정부의 반동주의였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점차 권위주의적 통치의 유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한국정치제도를 순식간에 퇴행시킨 것은 이명박 정부의 검찰을 동원한 정적제거와 국정원을 동원한 여론조작, 대통령 임명권을 이용한 언론사와 사법부 장악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과 검찰로도 모자라 군사 조직인 기무사까지 동원하여 국내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게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노골적으로 탄압했다. 윤석열은 대통령 비서실뿐만 아니라 감사원, 방통위원회, 인권위원회, 권익위원회 등 각종 정부기관을 정권의 친위부대로 활용해 임기 내내 야당 탄압과 정적제거만을 일삼았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내란을 획책하기까지 했다. 단순한 대통령 개인의 형법위반 행위나 정책에 대한 호오의 문제를 넘어서는 법의 지배 자체에 대한 공격과 중대한 헌정유린이 특정 정치세력이 집권했을 때만 반복적으로 발생하는데도 불구하고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모두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등한 의회구성원인 것으로 간주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야말로 지나치게 ‘민주주의적인’ 관점이라고 할 것이다.
반체제 정당으로 전락한 국민의 힘의 ‘야당심판론’ 같은 레토릭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서도 ‘의회독재’ 운운하며 야당대표인 이재명을 ‘공산전체주의 지도자’인 것처럼 묘사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내란죄 혐의로 탄핵되고 치러진 대선에서조차 그들은 민주당과 이재명의 독재를 진심으로 걱정하면서 민주당을 심판해달라는,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언어를 구사하곤 했는데, 이는 결국 한국사회의 ‘보수연합’이 민주당의 주류화 과정을 일종의 존재론적 안보 문제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실이 ‘청와대 정부’로 경도되어 촛불대중을 동원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 보수연합의 우파 대중주의가 발생했다는 해석은 이미 여러 단계의 가설과 해석을 도입한 곡예적 논증이다. 국민의힘과 극우대중의 결합은 헌법적 표상 바깥의 중장기적 세력교체에 따라 벌어진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자 정념의 표출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헌법적 표상에 토대하여 한국정치를 사고하는 것이 무의미한 현실적인 이유는 현실의 정치 행위자들이 누구도 그런 식으로 정치를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집권여부와 관계없이 보수연합에 의해 ‘거대 권력집단’으로 여겨진다. 민주당의 탄핵 남발이야말로 국헌문란행위라는(최소한 민주당이 과했다는) 범보수연합의 평균적인 인식은 헌법적인 발상 자체가 아니다. 이준석 같은 정치인은 노인세대의 냉전적 반공주의와 이십대 남성들의 포스트모던 극우주의의 세대연합을 통해 ‘위선적인 386 반국가 세력’을 포위하는 것을 전략이랍시고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이것은 한국정치가 대의제 민주주의가 선험적으로 가정한 원리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 통치구조적 오류가 아니라 어떤 사회적 전환기의 정치적 소란에 가깝다.
결국 2010년대 한국사회의 맥락을 망각한 채로 관용, 자제, 협치에 기반한 의회정치의 실현과 적대정치의 청산 및 국민통합을 웅변하는 것은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훈계일 수는 있어도 정치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한국의 정치현상에 대한 의미 있는 관찰일 수는 없다. 관용, 자제, 협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덕주의적 형상 바깥의 역사사회적 질료를 완전히 배제하는 관점은 학술적으로도 게으르고 불성실하다고 나는 말하고 있다.
4. 광장정치 혐오와 의회주의 이상화
최장집주의자들의 광장정치에 대한 혐오도 같은 맥락의 문제다. 나는 광장의 목소리를 낭만화하거나 이상화할 생각이 추호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진보적 의제를 억지로 길어 올리는 일에도 관심이 없지만(오히려 광장의 의제는 매우 보수적인 현상유지를 외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한국정치문화의 중요한 지탱점인 촛불을 극우시위와 다를 바 없다고 진단하거나 심지어 최장집주의자들처럼 그 자체가 민주적 현상이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본다. 여기엔 좋은 실험사례가 있으니, 바로 지난 내란-탄핵 국면에서의 1차 탄핵표결과 2차 탄핵표결 사이의 의석수 차이다. 모든 조건이 동일한 상황에서 일주일 사이에 광장의 군중동원만 새롭게 처치된 결과, 2차 탄핵투표에서는 1차 탄핵투표 때 참여하지 않았던 9명의 국회의원이 추가로 찬성표를 던져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1차 투표에서는 재석 195석으로 투표 불성립, 2차 투표에서는 204명이 찬성하여 가결). 바로 그 9명의 국회의원을 움직인 힘은 의회 바깥의 여론과 군중 동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데, 이것은 한국정치 특유의 환류 구조가 긍정적으로 작동한 사례로 보는 것이 공정한 관점이다.
적어도 지난 내란-탄핵 국면에서 최장집주의자들이 협소하게 정의한 의회정치에만 사태수습을 맡겨 놓았다면, 한국인들은 한덕수-한동훈 체제라는 해괴망측한 ‘정치적 타협안’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여야만 했을 것이다(박근혜 탄핵 국면에서도 의회가 처음 제안했던 것은 헌법에 존재하지 않는 ‘대통령 권한정지 및 중립적 거국내각안’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의회 내에서의 야합은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라고도 하는데, 이 한덕수-한동훈 체제라는 기괴한 ‘가능성의 예술’은 그가 꿈꾸는 정치의 이상에 근접한 것일까?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에서 컷오프 되었던 몇몇 다선 중진 의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당적을 옮겨 총선에 출마했는데 이는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일정 선수 이상을 기록하면 당파에 따른 정치적 책임성과는 무관한 어떤 초당적인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됨을 암시한다. 내각제 개헌 시 그와 같은 다선 중진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야합 정치가 횡행하리라는 민주당 지지층의 우려가 기우인 것만은 아닌 셈이다. 비명횡사 공천과 친명 사당화라는 비판 속에서 출범한 민주당 과반의 22대 국회는 내란 당시 신속하게 계엄해제를 의결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탄핵과 그것에 대한 책임정치의 실현으로서 정권교체까지 이루어냈다. 강성 민주당지지층의 정치 언어로서 ‘수박’이나 문자폭탄은 군주와 결합하고자 하는 위태로운 직접민주주의적 폭거가 아니라 미디어 정치 시대의 건강한 환류작용이자 의회정치의 보완재라고 평가하는 것이 결과론적일 수는 있어도 균형 있는 관점이라는 생각이다.
현 시점 한국의 의회가 제출하는 ‘타협책’은 해괴망측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反)법치주의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책임정부에 의한 정치적 통제 이전에 근대적 입헌주의에 기반한 법의 지배 자체가 특정 정치세력만 집권하면 위기에 빠지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기초적인 입헌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법치를 자주 부정하는 거대한 수구적 정치세력을 반대편에 둔 채로 ‘강한 정당’을 매개로 한 책임정부와 의회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도덕주의적 동어반복이다. 제도 바깥의 이러한 사회적 지형이나 의회 상황을 고려하면(국민의힘은 명백한 반체제 정당임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지역기반을 이용해서 상당기간 100석 안팎의 의석 수는 유지할 것이다) 대통령제는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통치구조인지도 모른다. 4년 중임제 개헌이면 몰라도, 내각제 개헌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아 보인다. 최장집주의자들은 단순히 공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충분히 책임윤리적이지도 않다.
5. 신념이 된 최장집주의
최장집주의가 광장정치와 민주당의 주류화에 대해서만큼은 보수-수구연합이 체감하는 위기의식을 공유한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지성사적 탐구대상이다. 이 위기의식이 민주당의 주류화 이후 민주당과 그 지지자 그룹의 보수화에 대한 좌파적 우려인 것이라면 ‘진보적’ 사회과학자의 일관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운동정치에 대해 강박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최장집주의자들은 노동중심의 좌파적 대안정당 건설이 아닌 현존하는 반체제세력과의 타협과 권력분점을 ‘현실정치’ 및 ‘책임 있는 의회정치’와 동일시하고 대안으로 치켜세운다. 이는 (최장집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비틀어) ‘비교정치 없는 정치사상’이라고 부를 만한 특유의 관념편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오늘날 비교 민주주의 연구의 화두는 1970년대의 ‘민주주의로의 이행(democratic transition)’에서 ‘민주주의 퇴행(democratic backslide)의 방지’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비교정치학계에서 ‘책임성(accountability)’ 개념에 관한 방대한 데이터셋을 구축하고 있는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 institute)의 주요 연구자들은 최근 기존의 수평적, 수직적 책임성에서 나아가 시민사회와 미디어에 의한 권력통제기능을 의미하는 ‘대각선적 책임성(diagonal accountability)’ 개념을 새롭게 도입했다. 루어만, 멕코바, 린드버그는 국제 비교연구를 통해 1900년부터 현재까지 정부의 ‘수평적 책임성’은 수직적 책임성과 대각선적 책임성이 원활한 국가일수록 유의미하게 지속되었다고 밝힌다. (Lührmann, A., Marquardt, K. L., & Mechkova, V. (2020). Mechkova, V., Lührmann, A., & Lindberg, S. I. (2019).) 한국의 광장정치-팬덤정치가 의회를 압박하여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로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퇴를 효과적으로 저지한 경험은 이 연구의 함의와 맥을 같이 한다.
수평적 책임성 개념은 원래 신생민주주의 국가에서 형식적으로 선거가 도입되었는데도 정치적 행위자들 사이에서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상의 한 원인으로서 기예르모 오도넬 등이 주목했던 것으로(O'Donnell, G. A. (1998)), 이미 양당의 선거경쟁을 통한 정권교체를 수차례 경험한 한국의 거버넌스 개선을 설명하기 위해 그와 같은 이행기 민주주의 연구의 개념을 동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교정치학계에서 수평적 책임성 개념은 주로 국제개발학 분과에서 제3세계 신생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제도적 지원책을 논의할 때 고려되며, 이 영역 안에서도 21세기 초반에 이미 제도 바깥의 사회경제적 영역에 더 주목할 것을 주문하며 ‘이행기 패러다임의 종말’이 선언된 바 있다(Carothers, T. (2002)). ‘정치적 참여’와 ‘제도 밖 권력통제기능’을 수평적 책임성 개념에 대하여 보조적인 것으로 (심지어 대립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최장집주의는 70년대적인 이행기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오늘날의 ‘책임성’에 대한 실증연구 경향에 관심이 없고 세계적 맥락으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최장집주의가 민주주의 거버넌스의 원리로서 견제와 균형을 의미하는 비교정치학의 ‘책임성(accountability)’ 개념과 막스 베버의 ‘책임윤리(ethics of responsibility)’ 개념을 교묘하게 뒤섞으면서 전자에 어떤 당위성(ethics)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1)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나 베버의 책임윤리 개념을 특정한 방식으로 소화한 다음 2) 70년대 미국정치학의 책임성(accountability) 개념을 원용하여 ‘정치’ 개념 자체를 운동배제적-제도편향적인 것으로 협소하게 재정의하고 3) 그러한 기초 위에서 ‘정치적 현실주의’와 ‘책임윤리’를 내세워 갑자기 한국정치의 맥락으로 난입하여 ‘신념윤리적인 운동권 정치인들’에 대한 훈계성 코멘트를 내리 꽂는다. 역사사회적 현실감각과 비교정치학적 성실성을 포기한 결과 운동을 배제해야 한다는 지향만이 남은 최장집주의는 이때 사회과학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고 하나의 ‘신념’으로 전락한다.
Reference
Rosenbluth, F. M., & Shapiro, I. (2018). Responsible Parties: Saving Democracy from Itself. Yale University Press. (한국어판: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 이언 샤피로, <책임 정당>. 후마니타스)
Lührmann, A., Marquardt, K. L., & Mechkova, V. (2020). Constraining governments: New indices of vertical, horizontal, and diagonal accountability.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114(3), 811-820.
Mechkova, V., Lührmann, A., & Lindberg, S. I. (2019). The accountability sequence: From de-jure to de-facto constraints on governments. Studies in Comparative International Development, 54(1), 40-70.
O'Donnell, G. A. (1998). Horizontal accountability in new democracies. Journal of democracy, 9(3), 112-126.
Carothers, T. (2002). The end of the transition paradigm. Journal of democracy, 13(1), 5-21.
'Book Review > Social Sci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브루스 딕슨, 자이니치, 알파고 (0) | 2025.12.03 |
|---|---|
| 법조인 자기서사의 무의식: 김두식, 문유석, 박주영의 에세이와 착한 법조인들 (0) | 2025.11.08 |
| 안희제, <증명과 변명>을 읽고 (2) | 2025.04.26 |
| 빈곤과 불안정노동 (0) | 2025.04.26 |
| 내란 이후 민주당 서사의 보편화: 한국적 사법통치와 검찰개혁 (0) | 2025.01.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