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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10. 19:29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을 읽고

폴 오스터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는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당히 난해한 소설이었다. 듣기로 폴 오스터는 90년대에 쿤데라, 하루키와 함께 국내 독자들에게 ‘힙한’ 작가로 소비되었다는데,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기엔 서사가 고전적인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쿤데라나 하루키랑 비교해보아도 (좋든 나쁘든) 고도로 철학적인 소설에 가까워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에 폴 오스터의 작품 대부분이 소개되어 있는 것에 비해 본격적인 비평이나 읽을만한 후기도 많지 않다(영문학 논문은 몇 편 보인다).1부와 2부는 구심점 없이 서사를 빙빙 돌린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카프카의 장편소설들을 연상시켰다. 카프카 장편의 특징은 읽는 동안은 지루해서 읽기가 힘든데, 다 읽고 곱씹어보면서..

2025. 4. 26. 17:54

안희제, <증명과 변명>을 읽고

이러 저러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저자의 오랜 친구(‘우진’)가 자살을 계획했다.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저자는 친구에게 자살하기 전에 함께 인터뷰 책을 출간해보고 자살계획을 재고해보자고 제안했고, 친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인터뷰 책’이다. 저자는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선언하고 있다. 저자와 친구의 진정성을 폄훼하거나 조롱할 생각은 없지만, 두 사람의 다소 과한 자의식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 특유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직접적으로 그려져서(나도 저자들과 동년배 남성이다) 독서 초반은 불편했다. 불필요하게 엄숙하달까(원래 자기 자신의 삶은 좀 담백하게 바라봐야 하는 법이다).친구의 신상보호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스..

2025. 4. 26. 17:30

빈곤과 불안정노동

강지나, 훨씬 더 어둡고 참담한 내용을 각오했는데,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인생사는 각오했던 것만큼 어둡지만은 않았다. 빈곤에 대해 떠올릴 때에 나태함과 무기력, 그리고 각종 일탈행위로 점철되어 있는 ‘빈곤의 문화’나 도무지 벗어날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의 대물림만을 연상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또다른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는 오히려 강인한 생활력과 정신력을 지닌 경우도 있었고,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이들일수록 정상가족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커져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생활인..

2025. 3. 13. 00:10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그것이 의도된 것일지언정 경박하고 상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박상영의 ‘옐로 저널리즘적 취향이 우려’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구도를 가지고 있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독해가 가능한 입체적 텍스트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속 ‘게이 청년의 연애사’는 ‘퀴어 서사’나 ‘여성서사’가 아니라 ‘불구화된 남성서사’로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게이인 주인공이 끊임없이 시도하고 갈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적 정상(?)연애’이고, 주인공의 성적 정체성 자체는 (중요한 설정이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형적인(?) 청년 남성의 생애주기와 취향을 따르고 있으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좌절도 헤테로 남성청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2025. 1. 30. 15:08

황정은, <디디의 우산>을 읽고

와 ,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는 좋았고, 는 좋지 않았다. 두 작품이 각각 세월호 사건을 맥락화하는 방식이 좋음과 좋지 않음을 결정했는데, 그 차이가 바로 황정은과 한국소설들이 직면해 있는 딜레마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에서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은 d의 상실과 병치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 사건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오갈 수 없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144쪽)의 세계에 놓여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에서 ‘혁명’은 정치사회적 의미의 도약을 의미하기보다 피안과 차안 사이의 오고 감, 나아가 미지근한 사물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종교적 극복의 문제다.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2025. 1. 29. 17:25

백수린, <여름의 빌라>를 읽고

백수린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는데, 오랜만에 괜찮은 단편집이었다. 최근 한국 단편소설들이 특정 소재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관찰이나 성찰을 게을리하곤 한다는 나의 (근거 있는) 불만은 백수린의 소설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 여성작가가 쓴 단편소설에 동성애자가 등장하지 않기만 해도 미학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혐오이다)백수린의 화두는 ‘관계’일 것이다. 이때의 관계는 대개 ‘마지못해 현실적인 인물’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낭만적 인물’이 맺는 관계이다. 백수린은 전자가 후자에 대해 갖는 동경과 질투라는 양가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에 등장하는 ‘주재원 언니’, 에 등장하는 ‘엄마’가 대표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하고 싶은 ..

2025. 1. 19. 16:07

내란 이후 민주당 서사의 보편화: 한국적 사법통치와 검찰개혁

(완성하지 못한 글이나 시의성이 상실되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 블로그에 업로드하여 둡니다.)내란 이후 민주당 서사의 보편화: 한국적 사법통치와 검찰개혁 (Working Paper)검찰개혁은 하루하루 노동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의제인 측면이 있다. 평범한 사람이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조사를 받는 일은 평생에 걸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어서, 검찰개혁을 일반 시민의 즉각적인 복리증진 및 자유의 확장과 연결시켜 감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 직후 민주당발 검찰개혁 의제가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고 정부-여당이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던 것은 그 탓이다. 요컨대 검찰의 정치보복성 수사와 기소를 두려워해야 하는 정치인들과 그 열성적 지지자들에게는..

2024. 11. 3. 05:53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6): 장강명, 임명묵, 한윤형

- 장강명홀수 장에는 살인자의 철학이 제시되고, 짝수 장에는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이 펼쳐진다. 이 소설의 살인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신론자 캐릭터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을 대놓고 인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는 역시 무게감이 너무 떨어지고 얄팍하기만 하다. 홀수 장들의 톤 자체가 애매해서, 작가가 살인자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인지, 비난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있다(바로 그런 식의 중립성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적 위대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 그런데 이 소설은 그걸 감안하고 봐도 살인자 묘사가 너무 어정쩡하다). 최종적으로 소설의 결론은 후자(살인자 비난)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홀수 장들은 의도에 비해 너무 무게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톤 조절 실패다.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