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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24. 17:39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하나의 독법

가 , 와 동급의 고전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건질 것은 미국문학 특유의 시적인 언어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 소설이 영문학사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로선 왜 이 소설이 미국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로 꼽히는지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SAT나 에세이 대비용 ‘모범생 소설’이 꼭 몇 편 있다. ‘적당한 깊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안전한’ 주제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암기해버리면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영어 자체가 된다. 이런 소설들은 현지 고등학생이나 유학준비생들에게 고급 어휘와 문장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어 교재’로서의 의미가 크다. 는 거의 대표적인 ‘모범생 소설’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그나마 원서도 아닌 번..

2023. 8. 9. 16:17

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헤세의 , 카뮈의 ,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이다(알라딘 기준 1위 , 2위 , 3위 . YES24 기준으로는 1위가 , 2위 , 그리고 은 4위다.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샐린저의 이라고 한다). 이나 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헤세와 카뮈는 어쨌든 둘 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이나 자체도 이른바 서구식 부르주아 교양주의 정전 목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사실 그래도 의 인기는 좀 이상하다. 헤세 작품 중에서 서구에서 더 많이 읽히는 작품은 나 이고,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은 대작인 다. 그리고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세를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시인에 가깝다). 전쟁..

2023. 6. 20. 19:20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을 읽고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거론되는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보다 지루한 소설이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처럼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으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라스꼴리니코프나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강렬한 역할을 주인공인 바자로프가 했어야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바자로프는 다소 희화화되어 묘사되다가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서정적인 순간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바자로프의 양친을 묘사할 때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의 ‘영원한 화해’는 죽은 자식의 무덤가 앞에서나 가능했다. 그것이 투르게네프의 정치적 입장을 암시하는 것인가를 두고 당대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023. 6. 12. 00:04

상반기 독서: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과 <대륙법 전통>

늘 그렇듯 올 상반기에도 바빴다. 연초와 3월 즈음에 읽었던 두 책에 대한 단평을 업로드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 홍정완 저자의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을 펴낸 이 책은 ‘사상사’ 연구를 표방한다. 역사학 연구의 특징인 것인지, 광범위한 사료를 제시하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서사가 명확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서사를 명료히 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제목과 달리 ‘사회과학’ 자체는 이 책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정치학과 경제학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냉전기 한국의 (사회과학) 지식체계를 검토한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온 한국의 ‘근대화 담론’의 지형을 펼쳐 보이는 것이 책의 주된 관심이다. 냉전 시기의 사회과학 지식에 주목하는 것은 그..

2023. 4. 10. 18:30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를 보고 손에 들었으나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제목을 보고 한국의 장애운동 및 장애 당사자에 대한 세밀한 에스노그라피를 예상했으나 문학작품 및 시각매체에 대한 문화비평을 주로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황우석 기념우표’에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황우석 기념우표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단계로부터 점차 ‘이족보행’이 가능한 비장애인으로 ‘진화’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장애란 의학적 개입을 통한 ‘치유’의 대상이라는 ‘비장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이미지인 것. 나의 최근 장애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 “장애는 존재해도 좋은가?”.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

2023. 1. 8. 21:49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 임지현, 를 읽고 - 1.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임지현의 학술적 자기-기술지이다(저자는 ‘에고 히스토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책을 참 재밌어 하는 것 같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이어 또 학자의 회고담이다. 이번 임지현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의 ‘실천’과 관련하여 생각한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김경만과 이영석이 모두 실천과 거리를 두면서 학자로서의 성실함, 김경만의 경우 특히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도전하는 방식의 치열함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임지현은 상대적으로 실천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그 실천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식의 속류적인 방식이..

2023. 1. 5. 03:00

염운옥, <낙인 찍힌 몸>을 읽고

작년에는 유독 ‘이민’, ‘정체성’, ‘인종’ 등 문화정치학의 개념어들을 다룰 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대중서로서 인종과 관련된 대중문화 컨텐츠 및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인종’이라는 문제적인 범주의 형성, 수행, 재생산의 과정을 추적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나 마치 교양강의를 듣는 듯 무척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어(실제로 저자의 대중강연이 책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주 흥미롭게 읽었고, 표지도 화려해서(?) 퍽 마음에 들었다.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이 책을 읽히면서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서 대중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최대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한 대중서를 쓰..

2022. 12. 18. 02:52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를 읽고

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혁명이 있기 10여년 전에 죽었으나, 혁명 이후 팡테옹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가 귀족들과 잘 어울렸고 계몽 군주들과의 서신 교환에 열심이었으며 광신적 열정을 혐오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가 오늘날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일평생 자기 자신의 삶을 연출하여 ‘대중’ 앞에 내 보이는 ‘공연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런 ‘오해’를 싫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항상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자각 속에서 살았다’. 이것은 볼테르가 일생에 걸쳐 남긴 방대한 저술의 장르적 다양성만큼이나 후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저자는 볼테르의 다면적인 생애를 중심으로 볼테르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