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그것이 의도된 것일지언정 경박하고 상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박상영의 ‘옐로 저널리즘적 취향이 우려’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구도를 가지고 있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독해가 가능한 입체적 텍스트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대도시의 사랑법> 속 ‘게이 청년의 연애사’는 ‘퀴어 서사’나 ‘여성서사’가 아니라 ‘불구화된 남성서사’로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게이인 주인공이 끊임없이 시도하고 갈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적 정상(?)연애’이고, 주인공의 성적 정체성 자체는 (중요한 설정이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형적인(?) 청년 남성의 생애주기와 취향을 따르고 있으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좌절도 헤테로 남성청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의 문제성이다.
예컨대 <재희>에서 주인공이 (여성인) 단짝친구 재희와 함께 각자 ‘만나고 있는 남자’의 성기 사이즈에 대해 평가하는 장면은, 남성들끼리 모여서 애인의 가슴 사이즈에 대해 품평하거나 성 경험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장면으로 바꾸어 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청년성의 징표로서 섹스중심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헤테로 여성인 재희와 게이인 주인공이 형성하고 있는 것은 (‘쿨하고 건강한 우정’이라기보다) 역설적이게도 ‘여성혐오를 배태한 남성 동성사회’의 뒤집어진 버전인 것이다. 정상가족을 이루면서 자신의 인생을 전개해 나가는 재희를 지켜보며 주인공이 느끼는 조바심과 부러움(말하자면, ‘뒤쳐졌다는 감각’)은 정상성을 선망하는 우리 시대 ‘한남(한국남성)’들의 그것을 닮았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묘사되는 전 애인 ‘규호’에 대한 묘사 또한 헤어진 옛 연인에 대한 남성주의적 낭만화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설정만 지운다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식상하기 짝이 없는 청년남성 서사와 구별되지 않는다.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 한총련 출신 애인이 묘사되는 방식이나,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잠깐 언급되는 ‘적폐청산’ 구호에 대한 조소(‘Nuclear Weapon’(?))에서 엿볼 수 있는 특유의 정치적 냉소주의도 오늘날 ‘이대남’들의 태도를 닮아 있다. 작중에서 주인공이 HIV를 ‘카일리’로 환유하는 것은 단순히 ‘쿨한 스타일’의 발현이 아니고, 주인공과 헤테로 청년 남성 사이의 차이를 차폐하는 문제적인 선택이다.
그러니까 좀 더 과감해지자면, 주인공의 게이 정체성은 일종의 맥거핀이자 눈속임이다. 주인공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적 코호트인 ‘2030 남성’의 전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반대로 말하면, 2020년대의 (불구화된) 남성서사는 그 자체로 더 이상 ‘보편서사’가 아닌 것이고, 차라리 ‘게이서사’(정상성에 미달하는, ‘루저 남성’ 서사)를 닮아 있는 것이며, 그런 면에서 전술한대로 이 소설은 퀴어(여성)서사가 아니라 현대적인 버전의 남성서사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매우 암묵적인 방식으로 퀴어 서사와 남성 서사가 서로 상극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게이가 아니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한남적’ 분투!) 드러내고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토대하고 있는 문제적 구도는 소설 밖에서 이 소설이 각각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어(동일한 작품이 짧은 시간 간격을 두고 드라마와 영화로 동시에 제작된 한국소설의 사례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성공을 거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성공은 <대도시의 사랑법>의 퀴어 설정은 눈속임일 뿐, 본질은 전형적인 (헤테로) 청춘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영화판 <대도시의 사랑법>의 ‘헤테로 마케팅’은 기만이 아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똥꼬충도 한남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동성애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식상한 정체성 정치의 시도로 읽는 것은 미진한 독해다. 이 작품은 ‘한남은 모두 똥꼬충이다’라는 들뢰즈식 ‘소수자-되기’의 정치로 읽을 때 가장 급진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방식의 독해는 작가가 설정한 범위를 벗어난다. 오히려 작가는 게이인 주인공의 청년남성적 보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가깝고, 여기서 ‘소수자-되기’랄지, 불온한 퀴어 내러티브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은 독자는 “‘불구화된 남성서사’는 왜 ‘여성(퀴어)서사’일 수 없는가?”, “불구화된 남성은 어째서 정치적 주체되기(여성-되기)를 손쉽게 단념하는가?”, “어째서 ‘여성-되기’가 아니라 ‘남성-되기’인가?”라는 중차대한 정치적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박상영을 두고 ‘농담하는 퀴어라는 신인류(김건형)’라지만, 이것이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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