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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2. 27. 19:47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5): 중국 고대사, 축구, 로스쿨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 - 심재훈 ‘어느 비주류 역사가의 넋두리’를 부제로 하는 이 책은 저자의 페이스북 글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SNS 글을 모은 것이다 보니 딱히 체계나 구성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책이었다. 하지만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구미 동양사학계의 시각에서 동양학의 여러 현안들을 두루 다루는 드문 기획으로서, 한국어로 된 다른 문헌에서는 쉽게 접하기 힘든 귀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 일독의 가치는 있다. 먼저 미국학계가,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학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성취를 갱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저마다 ‘동아시아 언어문명학부(EALC : East Asian Language and Cul..

2023. 8. 29. 12:11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4): 한국 고대사, 뇌과학, 한일관계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 역사학자 모임 여전히 류의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적어도 내가 속한 세대는 더 이상 민족주의에 대한 강박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내 입장에서는 반일과 민족통일을 자꾸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의심스럽다(NL?). 보다 못한 ‘젊은 역사학자들’이 나서서 ‘환빠’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유사역사학 비판이 큰 줄기지만, 고조선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발해까지 고대국가들이 골고루 다루어지고 있어서 한국고대사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부터도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시간에 고조선의 위만과 발해의 대조영이 중국계가 아닌 조선(고구려) 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 백제는 요서 지역까지 진출했던 해상강국으로서 특히 왜나라를..

2023. 8. 7. 23:24

최준석, <물리 열전>을 읽고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이다. 서문의 제목 ‘이제 사람으로 과학을 배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국내 과학자들을 상대로 한 기획 인터뷰 기사 모음집이다. 이 접근 자체는 매우 신선하고 적절한 것이다. 자연과학 교양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적지 않음에도,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른바 ‘노벨상급’ 과학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국내 물리학자 47인의 연구관심과 개인사를 소개하면서 오늘날 한국 물리학계의 분위기를 비교적 생생하게 전달한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은 선구자적인 과학자 개인의 영감이나 천재성이 아니라 (국제적) 학술 커뮤니티의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과학지식이라는 것도 사람과 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열전 ..

2023. 2. 15. 02:01

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를 읽고

‘죽음학 강의’로 유명한 정현채 교수의 대중서이다. 이 책은 독자의 태도에 따라 독후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를 죽음의 당사자로 진지하게 규정하고 있는 독자는 이 책을 매우 절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을 사이비-유사 과학서로 폄하할 것이다. 나는 절절하게 읽은 쪽이다.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덜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죽음 ‘직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환한 빛을 보았고’, ‘먼저 죽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상을 보았으며’, ‘유체이탈 현상을 경험했고’..

2023. 2. 3. 08:10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3): 자살, 퀴어, 부족주의

『숭배, 애도, 적대』 - 천정환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자주 울컥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화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90년대 대학생들이 주도한 ‘분신정국’과 2000년대 노동자들의 분신 사건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정치인, 공무원, 연예인의 자살을 분석한다. 자살은 언어(상징계)를 초과하는 사건이라서 근본적으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건 자살을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분석하는 자살자들의 유서는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자신보다 더 큰 대상을 ‘위해서’ 죽는다는 식의 서술을 담고 있다. 그들은 반미자주투쟁을 위해서,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에는 언제나 내밀한 사적인 동기도 작용..

2023. 1. 7. 07:42

최병천, <좋은 불평등>을 읽고

읽는 내내 짜증스러워서 몇 번이나 책을 덮을까 고민했다. 아주 나쁜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상태가 엉망이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장이 뚝뚝 끊기고 어색한 표현과 인용이 자주 등장한다. 초등학생 작문 숙제를 보는 느낌이다. 글 자체를 거의 써보지 않은 사람의 글이다. 추측건대 저자는 업무보고서 식의 개조식 글쓰기만 해온 사람인 것 같다(편집자는 뭘 한 건가?). 어떤 것들은 황당할 정도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웃긴 것들을 옮겨 적어본다. “(1) 경제학적으로 볼 때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 수출이 잘되면 투자가 늘어난다. (3) 투자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 (4) 투자와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이 창출된다. (5) 이는 한국경..

2022. 12. 26. 07:01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2): 식민지-근대, 전장연, 일베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윤해동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해동은 임지현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2000년대 국내 인문학계에서 ‘탈민족주의 논쟁’을 주도한 역사학자이다. 이것을 한국 인문학계의 (구소련 몰락 이후 운동권 좌파와는 또다른 방식의) ‘포스트 모더니즘’ 수용사례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윤해동은 ‘식민지-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국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대 ‘내재적 발전론’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양자는 모두 민족주의 대 반민족주의 틀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근대주의적 편향을 가지며, 한국사회가 오늘날까지 유독 ‘원초주의적 민족주의관’에 몰입하고 있는 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는 언제나 식..

2022. 9. 6. 21:43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1): 외교, 노동, 역사

* 블로그에 서평을 업로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읽는 모든 책에 대해 글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 근데 그건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짤막하게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앞으로는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들은 묶어서 한번에 올리기로 했다. * 그런데 막상 쓰다보니 생각보다 글들이 길어져서 따로 올릴까 잠시 고민했다. 『한국외교정책론』 - 현인택 이 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현인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퇴임 기념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강연은 저자가 공직 및 학계에서 만난 여러 학자들이 번갈아 가며 고려대 학부에서 진행한 특강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지인이 2019년에 고려대에서 이 강의를 직접 수강하면서 나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