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천, <좋은 불평등>을 읽고

읽는 내내 짜증스러워서 몇 번이나 책을 덮을까 고민했다. 아주 나쁜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상태가 엉망이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장이 뚝뚝 끊기고 어색한 표현과 인용이 자주 등장한다. 초등학생 작문 숙제를 보는 느낌이다. 글 자체를 거의 써보지 않은 사람의 글이다. 추측건대 저자는 업무보고서 식의 개조식 글쓰기만 해온 사람인 것 같다(편집자는 뭘 한 건가?). 어떤 것들은 황당할 정도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웃긴 것들을 옮겨 적어본다.

“(1) 경제학적으로 볼 때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 수출이 잘되면 투자가 늘어난다. (3) 투자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 (4) 투자와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이 창출된다. (5) 이는 한국경제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다. (6) 문제는 불평등이다. (7) 수출이 잘되면 불평등은 증가한다. (8) 반대로 수출이 작살나면 불평등은 줄어든다. (9)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0) 그런데 실은 불평등도 연결되어 있다. (11) 다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p.112-113)

(내가 왜 이걸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비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총 11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단락이다.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하다(조롱이다). 일단 (1)과 (9)가 반복이다. (2)에서 (4)까지는 단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어 숨이 안 쉬어진다. 이 단락만 보면 뭐가 문제인 건가 싶을 수도 있지만 저 정도 짧은 문장들이 의미 없이 흩어져 있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읽다 보면 피곤하다. (1)에서 (5)까지는 한두 문장으로 표현이 가능하다. (11)에서 사용한 ‘뫼비우스의 띠’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대단한 내용이 아니고 불평등과 성장의 관계가 상충할 수 있다는 걸 멋지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게 ‘뫼비우스의 띠’까지 동원해서 강조해야 할 만큼 신기한 사실인 건지 잘 모르겠다. 그 자체로도 생소한 비유다.

“(1) 하지만 현실은 단순하지 않다. (2) 현실은 일차방정식이 아니다. (3) 중국경제의 부상 이후, 한국경제에서 불평등과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은 서로 연동되어 작동했다. (4) 만일 불평등은 나쁜 것이고 수출, 성장, 투자, 고용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쁜 일과 좋은 일이 공존했다. (5)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였다.” (p.136-137)

이 단락의 (1)과 (2)도 반복이다. 나였다면 퇴고 과정에서 두 문장 모두 그냥 제거할 것이다. (3)은 불과 20페이지 전에 앞에서 반복한 내용이다. (4)는 불필요하게 장황하다. 문장 자체가 헷갈리게 쓰여 있다. 그냥 불평등 확대와 수출과 성장 증가가 동시에 발생했다고 하면 될 일이다. (5)가 화룡점정인데, 나는 내가 모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다른 뜻이 있는지 찾아보기까지 했다. ‘사회과학’을 표방하는 글에 이런 수사법이 자꾸 등장하는 것은 할 말이 없다는 증거다. 그나마 그 수사도 적절하지 않다. 이쯤 되면 저자의 스타일을 대충 알 수 있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 좋아하는 아재.’

일부 어색한 표현들이 아니더라도 글을 정말 못쓴다. 무슨 서술을 이어가지를 못하고 갑자기 ‘그럼 정리해보자. 첫째~, 둘째~, 셋째~’를 남발한다. 할 말이 없으면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문학작품이 아닌 데도 진짜로 ‘반복’한다 - 운율이 느껴질 정도다) 표나 그래프에 나와 있는 내용을 굳이 말로 풀어서 숫자 하나 하나를 ‘묘사’한다. 이런 건 주로 과제 하면서 분량을 억지로 늘릴 때나 하는 짓이다. 전체 맥락에 비추어 그다지 자세히 서술할 필요가 없는, 전혀 새롭지도 않은 내용은 갑자기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모든 장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건 책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진보 정책가’랍시고 민주연구원의 부원장씩이나 역임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진보진영의 아마추어리즘을 예증하는 듯하다.

내용도 물론 가관이다. 저자는 본인이 대단한 사회과학적 발견을 했다는 식으로 시종일관 호들갑을 떠는데, 대단할 것도 없고 딱히 과학적이지도 않다. 통계자료를 얼기설기 짜깁기하면 그것에 뭔가 사회과학적인 의미가 생긴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그런 건 백분토론에서나 통한다).

대표적으로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자꾸 ‘상관관계’에 집착하는데, 두 변수의 상관관계가 높다고 해서 그게 인과관계인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의 주요 논지 중 하나인 ‘한국불평등의 중국 영향 설’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한국수출액과 임금지니계수의 높은 상관관계를 들고 있다. 그 수치가 0.861에 이른다며 ‘매우 높은 상관관계’라고 강조까지 한다. 사회과학에서 인과관계를 주장하려면 독립변수 이외의 요인들의 영향을 통제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설계 없이,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대중국 수출 증가와 임금지니계수 상승)을 인과관계로 과격하게 묶고 있는 것이다.

볼썽 사나운 것은 기성 학자들은 간단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불평등의 원인에 대해 ‘이론적으로 오해’했으며, 자신이 학계와 정치권의 중간에 놓인 ‘정책가’로서 ‘입체적인’ 관점을 제시한다고 자부한다는 점이다. 대단한 오만이고 만용이다. 솔직히 저자가 인용한 문헌들을 보면(대부분 베스트셀러 단행본들이다), 제대로 된 경제학 논문에 대한 문해력이 아예 없는 사람일 것으로 생각된다. 자꾸 ‘엄밀한 사회과학’ 운운하면서 진보진영이 이념적인 구호에 매달린다고 저주하는데 저자 자신이야말로 아마추어적이고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이다.

책의 주장은 간단하다. 한국의 불평등 증가는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벌-신자유주의-노동유연화’ 때문이 아니라 단지 중국경제가 부상하면서 한국의 수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것.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수출대기업 주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불평등이며, 그것은 ‘좋은 불평등’이니까 용인해야 한단다. 그런데 중국의 세계시장 편입이야말로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일환 아닌가? 이런 세계화된 상황 속에서 수출대기업 주도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성장 아닌가? (그럼 진보(?)진영이 맞는 거네?)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지 당최 이해가 안 된다.

저자는 소득주도성장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관에 입각한 해법이며(사실이 아니다 – 소득주도성장론은 포스트 케인즈주의 성장론이다) 부자의 것을 빼앗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는 세계관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는 ‘성장’의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수출대기업 중심의 산학협력이 저자의 성장해법이다. 돌고 돌아 지겨운 경제 색깔론 –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 – 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건 그냥 보수적인 주장을 하는 책이지, ‘진보의 내부 반성’ 따위가 아니다.

이 뻔하고 낡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책이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오로지 저자의 이력 때문이다. 저자는 고등학생 때부터 운동권 생활을 한 ‘고운(고교 운동권)’ 출신으로, 진보정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민주당 계열로 넘어온 ‘진보 진영’의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가 ‘반성’을 해보니까 진보진영의 경제관이 잘못됐더라는 것이다. 보수언론이 좋아하는 ‘내부 고발’ 서사다. 전형적으로 진영 내부에서 인정 욕구를 채우지 못하니까 중년이 넘어서 보수 진영에 투항한 케이스다. 이쪽에서 ‘폐급’이어도 저쪽에 붙으면 갑자기 이성적인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다. 아마 조만간 조선일보에 헛소리하는 칼럼도 기고할 것이다.

너무 인신공격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 정도면 자식 보기에 부끄러운 책이다. 연초부터 시간을 낭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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