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를 읽고

‘죽음학 강의’로 유명한 정현채 교수의 대중서이다. 이 책은 독자의 태도에 따라 독후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를 죽음의 당사자로 진지하게 규정하고 있는 독자는 이 책을 매우 절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을 사이비-유사 과학서로 폄하할 것이다. 나는 절절하게 읽은 쪽이다.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덜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죽음 ‘직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환한 빛을 보았고’, ‘먼저 죽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상을 보았으며’, ‘유체이탈 현상을 경험했고’, ‘매우 편안한 마음이 되어 자신의 몸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경험이 대부분의 임사체험 당사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뇌의 활동이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이므로 이것은 단순한 환영이나 망상이 아니다. 또 임사체험자들은 임사체험 이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는데,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해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으므로 이것은 꿈과도 다르다. 결국 임사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 직후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이로 미루어 ‘죽음 이후의 삶’, 곧 ‘영혼’의 존재를 짐작해볼 수 있다. 죽음 이후에도 다른 방식의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여기부터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텐데, 저자는 스베덴보리, 다스칼로스, 마르티누스 같은 신비주의자‧영성가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대략 이런 그림이 나온다. 영혼들이 사는 ‘영적인 세계’가 있고, 그곳에서는 영혼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 있다고 한다. 영적인 공력(?)이 높은 영들은 그렇지 못한 영들을 인도하고 돕고자 한다.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보다 높은 영의 도움을 받아가며)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문 다음, 그곳에서의 편안하고 안락한 영적인 삶이 지루해질 때쯤 또다른 삶을 선택해서 환생한다.

다시 태어날 때 동물이나 벌레로 환생하면 어떡하나? 원하지 않는 삶으로 환생하는 것은 윤회에 대한 나의 가장 큰 공포였다(그래서 그냥 다음 생 같은 것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그럴 일은 없다고 한다(크리스토퍼 M. 베이치, <윤회의 본질>). 이번 생 다음의 생은 반드시 현생보다 나은 삶이기 때문이다(현생이 최악인 것!). 생을 거듭할 수록 삶은 매번 발전하고 고양된다.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서 영혼은 자신이 환생하여 살아갈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설계하여 선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의 삶은 영적 세계의 내가 선택하고 설계한 삶인 것이다. 공력(?)이 낮은 영일수록 쉽고 편안한 삶을 선택하고, 수준이 높은 영일수록 힘들고 고된 삶을 선택한다(‘고수’일수록 어려운 난이도를 선택하는 법이다).

일단 환생하여 이승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에는 전생이나 영적인 세계에서의 기억을 모두 망각한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의 ‘나’는 여전히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전생과 전전생과 전전전생과 … 우리가 수없이 반복해온 이전 생의 기억들은 그곳에 통합되어 봉인되어 있다. 지구별에서의 이번 생이 끝나면 나는 다시 영적인 세계의 ‘나’로 복귀하여 봉인되었던 기억들을 복기하게 된다(임사체험은 육신이 죽음에 가까워질 때 일시적으로 이 봉인이 해제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현생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삶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이승에서의 다음 생을 설계하고, 환생하여 스스로 선택한 삶을 다시 산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 p.200

나는 이것이 컴퓨터 게임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인 세계에 사는 내가 플레이어이고, 현생의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게임 속 캐릭터인 것이다. 캐릭터는 수없이 반복되는 전체 게임의 판세를 알지 못하지만, 사실 이 게임 전체를 주관하는 플레이어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나라면 ‘이번 생의 나’라는 캐릭터에게 어떤 퀘스트를 부여했을까?

저자는 이런 식의 죽음관을 갖는 것이 한국의 죽음문화를 보다 건강하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죽음관은 자살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 제공해준다.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이번 생에서 풀지 못한 과제는 결국 언젠가 해결해야만 ‘영혼의 고양’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해선 안된다. 물론 자살한 영혼은 영계에서 무한히 자비로운 다른 영혼들의 도움을 받아 지난 생에서의 아픔을 극복하고 다음 생을 계획하게 되므로, 자살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잘못인 것도 아니다(이러한 죽음관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에 잘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죽음은 대부분 ‘고통스러운 연명치료’에 이은 ‘의료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데, 현대의 생사관에 종교적‧영적 차원을 더함으로써, 예컨대 연명치료나 안락사 문제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볼 여지도 생긴다. 유물론적인 과학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더 막연히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죽음관은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면, 먼저 떠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온 메시지(‘사후통신’)가 착각이나 환영이 아니라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을 받거나 죽은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망상이나 착각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사별한 지인이 꿈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망자에게서 온, 사후세계로부터의 ‘진짜’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듣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된다.

이런 종류의 책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철학적 개념어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죽음관이 뒤섞고 있는 개념 구도에 주목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법이 될 것이다. 가령, 저자는 철저히 경험주의적으로 의식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로 임사체험자들의 증언(경험담)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임사체험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일은 감각적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순수한 의식현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이 ‘순수한 의식현상’이라면, 우리는 임사체험을 ‘아는 것’(감각경험)일까, ‘믿는 것’(의식)일까? 심신일원론-심신이원론 논쟁을 주고받는 영미의 분석철학자들이나, ‘마음의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나 데이비드 차머스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 얘기를 하자면 너무 ‘철학’ 얘기가 되어버린다.

사실 삶을 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철학’보다는 ‘종교’요, ‘지성’보다는 ‘영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결국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든 종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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