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3): 자살, 퀴어, 부족주의

『숭배, 애도, 적대』 - 천정환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자주 울컥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화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90년대 대학생들이 주도한 ‘분신정국’과 2000년대 노동자들의 분신 사건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정치인, 공무원, 연예인의 자살을 분석한다. 자살은 언어(상징계)를 초과하는 사건이라서 근본적으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건 자살을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분석하는 자살자들의 유서는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자신보다 더 큰 대상을 ‘위해서’ 죽는다는 식의 서술을 담고 있다. 그들은 반미자주투쟁을 위해서,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에는 언제나 내밀한 사적인 동기도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소하게 취급해선 안 된다. 죽음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은 고인의 삶의 의미를 일면적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형태의 죽음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진정 윤리적인 것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망명과 자긍심』 - 일라이 클레어

1999년에 출간된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Exile and Pride)은 퀴어-장애 정치학 분야에서 고전급의 대우를 받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 출간된 것이 1990년이니 이 분야의 역사는 크게 보아 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 범주와 권력 위계(‘다중 억압 벡터’)에 의해 ‘빼앗긴 몸’을 되찾기 위해 저자가 취하는 핵심 전략은 ‘교란’이다. 선천적 뇌병변 장애와 퀴어 정체성(부치-다이크)의 당사자로서 저자는 진솔한 경험담을 통해 삶의 모호성과 정체성의 복잡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권력구조가 강제하는 범주들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따라서 퀴어-장애 당사자인 저자의 자기탐구적 에세이는 그 자체로 항존하는 권력 위계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된다.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 개념어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대신,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삶의 진실에 대한 거침없는 직면이 강렬하게 이어진다.

삶의 진실이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저자는 친족성폭력의 피해자였는데, 어린 시절의 성적 학대 경험이 자신을 ‘여성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것은 아닌가? 저자가 느끼는 분노는, 장애를 타자화하는 ‘외부’의 비장애 중심주의를 향한 것인가, 아니면 수치스럽고 불편한 자신의 몸 ‘내부’를 향한 것인가? 장애인 당사자들은 ‘빼앗긴 몸’을 기꺼이 자랑스러워(pride)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의료적 개입’을 통해 ‘정상인’이 되고 싶어하는 자아는 무시되어도 좋은가? 비장애 중심주의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에드 로버츠(Ed Roberts)의 투쟁을 지지하는 동시에 ‘장애인-섹스 심볼’이 되어 젠더화 된 현실에 적극적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엘런 스톨(Ellen Stohl)의 분투를 지지할 수 있는가?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간주하는 것과, 장애인을 성적대상화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점박이 올빼미가 먼저인가, 벌목 노동자의 생계가 먼저인가? (중산층적 환경운동과 노동자 권리 사이의 긴장) - 이런 물음들은 관성적이고 안일한 ‘리버럴’ 정체성 정치 담론의 시각에서는 던질 수 없는 종류의 것들이다.

저자는 장애, 퀴어, 환경, 계급의 범주를 뿌리에서부터 ‘교란’시킨 다음, 이 모든 쟁점들은 서로 맞물려 있는 것으로 ‘몸(피부 아래)에 쌓인다’는 사실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도둑 맞은’ 몸을 되찾고 망명자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다중-쟁점 정치’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장애-퀴어 정치학의 난점을 답습하고 있다. 결국 당사자의 ‘몸에 쌓이는’ 억압이란,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근원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타인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 장애-퀴어 정치학이 ‘정치학’ 내지 ‘사회변혁적-실천 운동’이고자 한다면, 이 형이상학적이고 실존적인 고통을 ‘다수’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자전적 에세이의 형식을 취하여 철저히 개인적인 체험을 중심에 둠으로써 ‘(장애 당사자의) 고통’을 (역설적이게도) 한층 더 심오하고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을 읽어도 페미니즘-퀴어-장애 정치학 논의를 접할 때마다 부딪히게 되는 근본적인 의문 – ‘개인적인 것은 ‘실제로’ 정치적인 것인가?’ – 은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부족주의』 - 에이미 추아

식자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유행하는 ‘부족주의’라는 개념을 퍼뜨린 책이다. ‘(정치적) 부족주의’는 지금까지 집단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민족주의’, ‘정체성 정치’, ‘문명의 충돌’, ‘포퓰리즘’ 등의 개념을 뭉뚱그려서 포괄하는 개념이다(그렇게 보면 저자가 제시하는 ‘부족’ 개념이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 – 오히려 구체적인 맥락을 사상(捨象)한다는 점에서 개념어로서 썩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는 아예 사회심리학 임상실험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부족정치적 습성’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능이라고 못박는다. 인간은 영유아기 시기부터 본능적으로 내집단에 대해 우호적이고, 외집단에 대해 배타적이다. 인간은 개인일 때보다 집단에 속해 있을 때 더 비이성적이다. ‘민족’이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든(근대주의), 실질적인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에 기반한 것이든(원초주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정체성으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50여년간 미국 외교정책이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외교정책 당국자들이 개도국의 부족정치 동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분쟁국의 부족정치 메커니즘을 무시하고 냉전적인 구도 속에서 상황을 속단하는 바람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영국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부족정치 동학을 꽤 정확히 인식하고 효율적으로(?) ‘분열시켜 통치(divide and rule)’해온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개도국의 부족정치 패턴에서는 공통적으로 ‘시장 지배적 소수민족’의 존재가 확인된다. 시장 지배적 소수민족이란, 수적으로 소수임에도 사회경제적 지배력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다수 민족 위에 군림하는 민족집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다수민족에게 증오와 시기의 대상으로, 다수민족은 기회가 되면 시장 지배적 소수민족을 제거‧축출하고자 한다. 베트남의 화교나 이라크의 수니파가 대표적인 시장 지배적 소수민족이다. 이런 사회에 섣불리 민주주의가 도입되면 부족정치가 강화되어 내전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미국의 이러한 무지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부족정치 동학을 잘 아는 인접국이 지정학적 이권을 챙기는 경우도 있는데,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키스탄이 대표적이다.

미국은 원래 독특하게도 지역적‧인종적인 수준의 부족적 정체성보다 ‘미국인’이라는 초인종적 시민의식이 강한 사회였는데(저자의 표현으로는 ‘슈퍼 집단’),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인이라는 개념이 와해되고 여러가지 ‘부족정체성’이 대두되면서 사분오열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명백히 저임금 백인 노동자들의 ‘부족정체성’이 작동한 결과였다. 이들에게 북동부의 엘리트들은 ‘시장 지배적 소수집단’이다. ‘백인이 차별당하고 있다’는 황당한 인식은 이런 구도 속에서 정당화된다. 저자는 이런 우파 부족주의와 함께 ‘정체성 정치’로 대표되는 좌파 부족주의도 문제시한다. 과거의 좌파와 달리 오늘날 좌파는 포용적이기보다 ‘명백히 배제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누가 더 약자인지를 두고 경쟁하는 ‘억압당하기 선수 올림픽(Oppression Olympic)’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쯤 되면 누구나 작금의 한국사회도 ‘부족주의’ 개념을 동원하여 진단하고 싶어질 텐데, 아니나 다를까 이미 수많은 어정쩡한 지식인들이 ‘부족 어쩌고’ 하는 고만고만한 글들을 많이도 써 놓았다. 나는 이 말 자체에 담긴 폄하의 뉘앙스에 대해 언급해두고자 한다. ‘부족’(tribe)은 ‘민족’과 달리 명백히 전근대적인 개념으로, 오늘날 집단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동학이 ‘부족적’이라고 할 때에는 그것이 매우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것이라는 조롱과 비하의 뉘앙스가 분명하게 들어 있다. 특히 저자가 개도국의 ‘부족’정치를 분석하는 대목은 다소 불편하기까지 하다. ‘종교적 정체성’, ‘내집단 의식’, ‘민족주의’, ‘포퓰리즘’ 같은 용어를 놔두고, 베트남-이라크-아프가니스탄-베네수엘라의 국내정치에 대해 ‘부족’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를 써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미국이 그걸 잘 이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패권주의적인 뉘앙스를 숨기지도 않은 채? ‘부족’과 같이 평면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용어를 사용하다 보니 저자의 분석에는 ‘세속주의 대 원리주의’라는 중동정치의 핵심 구도나 남미정치의 좌파정치적 맥락이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다. ‘부족주의’를 일종의 비평적 유행어로 삼는 일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