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1): 외교, 노동, 역사

* 블로그에 서평을 업로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읽는 모든 책에 대해 글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 근데 그건 꼭 필요한 일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들을 짤막하게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앞으로는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들은 묶어서 한번에 올리기로 했다.

* 그런데 막상 쓰다보니 생각보다 글들이 길어져서 따로 올릴까 잠시 고민했다.

 

『한국외교정책론』 - 현인택

이 책은 이명박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현인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퇴임 기념 강연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이 강연은 저자가 공직 및 학계에서 만난 여러 학자들이 번갈아 가며 고려대 학부에서 진행한 특강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지인이 2019년에 고려대에서 이 강의를 직접 수강하면서 나에게 후기를 공유하던 일이 떠올라 흥미롭게 읽었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가안보실 1차장),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국가안보실장) 등 현정권 들어 입각한 외교안보분야 ‘실세들’의 목소리도 직접 들을 수 있다.

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흔히 ‘국제정치학’과 ‘외교정책론’은 별개의 과목으로 개설된다. 굳이 엄밀히 구별하자면, 두 과목의 성격은 미묘하게 다르다. ‘외교정책론’이 ‘국제정치학’의 각론이거나, 그것의 심화인 것만은 아니라는 의미다. ‘국제정치학’이 현실주의-자유주의-구성주의 등의 국제정치‘이론’과 그것에 입각한 19~20세기 국가 간(inter-national) 관계 맺음의 역사를 해설하는 식이라면, ‘외교정책론’은 철저히 한국의 입장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사고’을 배양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국제정치학과는 달리 묘하게 행정학이나 경영학스러운 뉘앙스를 띤다.

국제정치학을 다시 지구정치(global politics) 혹은 세계정치(world politics)와 구별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는 다분히 17~18세기 유럽세계의 근대국가 질서로부터 유래한 사고체계로, ‘전쟁과 평화’라는 ‘국가-간의’ 군사적 문제에 집중한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지구화/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인적-물적 자원 및 노동과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지구적’ 문제들이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했다. 환경, 에너지, 이주(난민), 테러리즘, 사이버-기술, 불평등, 빈곤, 기아, 탈-식민, 내전 등과 같은 문제는 일국적 문제는 아니되, 그렇다고 전통적인 ‘국가 간 관계’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설명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새로운 이론체계로서 ‘지구/세계정치론’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문제들 역시 기존의 ‘국제정치학’의 범위 내에서 취급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가 문제시된다. 이 구도에서 보자면, ‘위험’의 문제를 군사적 위협 너머로 포괄적으로 정의함으로써 ‘안보’ 개념을 확장한 베리 부잔(Barry Buzan)과 코펜하겐 학파의 ‘인간안보/비전통안보’ 개념은 ‘국제정치학’를 중심으로 ‘지구정치의 문제들’을 통합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다만 2010년대 이후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미중 갈등의 격화와 주요국들의 자국우선주의 외교정책 기조로 다시 전통적인 ‘국제정치’의 패권 경쟁 문제가 중심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으며, 요즘은 새삼스럽게도 지리의 영향을 강조하는 ‘지정학/지경학’의 관점이 주목받는다.

여하튼 이 책은 전형적인 ‘외교정책론’의 문제들을 다룬다. 동북아 관련 4강(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및 북한과의 양자관계를 중심으로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을 되짚어보고, 각 양자관계(한미, 한중, 한일, 남북관계)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쟁점들을 무난하게 개괄한다. 이전까지 동북 4강과 북한에만 매몰된 외교정책에서 탈피하여 대-동남아 외교에도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한국이 ‘신흥 중견국’으로서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어젠다를 중심으로 새로운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 책에 등장하는 비교적 진취적인 주장들이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지인의 우스갯소리가 떠오른다. “외교정책이라는 게 뭐 별게 있느냐, 미국하고도 잘 지내야 하고, 중국하고도 잘 지내야 하고, 일본이랑도 잘 지내야 하고, 북한하고도 잘 지내야 하고,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 뭐 다 잘 지내자는 얘기 이상 더 할 이야기가 있느냐?” 다소 냉소적이지만 맞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은 국력으로 보나, 국제관계적 구조로 보나, 그 출발부터 ‘리더십’을 발휘할 만큼의 외교적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의 미중 갈등 구도 속에서도 우리는 기껏해야 양자택일을 강요 받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것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따라서 이 땅의 국제정치학자들이 창의성을 발휘하여 연구할 만한 분야는 그다지 많지 않고, 그러다 보니 국제정치학은 ‘정책현장 경험’이라는 좋은 명분 하에 공직이나 들락날락 하는 ‘폴리페서’들의 학문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국제정치학 공부를 심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각 국가들의 국내정치 현안을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한미관계’보다 ‘미국정치’, ‘한중관계’보다 ‘중국정치’가 탐구를 위한 키워드로 더 좋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관리대상’으로서의 대-한국 외교’라는 관점에 서자는 내 나름의 제안이기도 하다. 그것이야말로 그 대단하다고들 하는 ‘글로벌-전략적 사고’가 아닐는지.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진혜원

종속적 자영업자나 플랫폼 노동자와 같이 기존의 노동법이 포용하지 못하는 형태의 노동의 등장, 인천공항 정규직화와 의사 파업이 불러온 ‘공정 논란’, 기술 혁신으로 말미암은 고용 감소, 그리고 산업재해나 정년 및 임금체계 문제를 포함한 한국 노동의 고질적인 문제까지, 지난 문재인 정부 5년간 있었던 각종 노동 이슈를 갈무리하고 있다. 일련의 이슈들은 오늘날의 노동문제가 과거와 같은 노동-자본 대립 구도로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해준다. 돌이켜보니 지난 정권 5년동안 유독 그 사실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정부가 대놓고 고전적인 의미의 ‘친-노동’(꼭 그랬던 것도 아니었지만)을 표방하면서 최저임금을 올리고, 52시간 근로제를 시행하는 등의 과정에서 삐걱거림이 있었는데, 그 삐걱거림의 원인은 바로 한국의 후기/탈-산업사회적인 환경에 있었던 것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는 이른바 ‘진보 진영’의 관성적인 ‘친-노동’ 구호가 도리어 노동자와 사회구성원들의 고통을 낳았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오늘날의 다양한 노동문제들은 모두 ‘기술로 인한 숙련의 해체’와 그에 따른 ‘고용의 불안정화’에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사회적 연대’에 있다. 결국 연금체계를 합리화하자는 얘기다. 노동문제 자체가 이런 저널리즘적인 접근만으로 단순화되기 어려운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한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쉽지만 저자의 기자다운 성실함과 공정한 접근이 돋보이는 좋은 책이다.

근대정신은 ‘노동을 통해서’ 자유를 획책할 수 있다는 ‘자유노동’의 이념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요즘의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나 ‘경제적 자유(자산소득을 통해 근로소득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선망)’ 논의를 보노라면 현대인들은 오히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하는 듯도 하다. 이처럼 ‘노동’은 근대 이후 인류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법학,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사회과학 분과학문들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주제이다. 개인적으로 한때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되려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 너무 방대한 문제라서 접근 자체가 버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탐구는 지지부진하다.

『삶으로서의 역사』 - 이영석

얼마 전 작고한 역사학자 이영석이 학자로서 자신의 생애를 정리한 자기-기술지이다. 한 사람의 생애는 그가 만난 사람의 총합일 수도 있고, 그가 한 행동의 총합일 수도 있겠으나, 학자의 삶은 단연 그가 읽고 쓴 것의 총합이다. 나 자신이 ‘탐구하는 삶’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는 유형의 사람이다 보니 ‘학자의 삶’에 대해서는 매번 유난히 깊이 몰입하게 된다. 비슷한 책으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도 떠오른다. 두 권 역시 무척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도 떠올릴 수 있다.

이영석은 자신이 영국 산업혁명을 연구하기 시작한 계기가 상당 부분 우연에 의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한국의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근대화’의 전범 격인 영국의 산업혁명을 연구함으로써 바람직한 조국 근대화의 방향을 모색해보기 위함이라는 ‘공식적인’ 이유 이외에, 그가 영국사를 연구하게 된 것은 단지 동양사나 국사를 담당한 교수들보다 서양사 담당 교수들의 강의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영어에 대한 상대적 익숙함 때문이었다. 보다 내밀하게는 종교적이었던 집안 분위기로부터의 도피도 한 이유였다.

자신의 지적 기원으로 그는 70년대 대학가의 진보적인 독서운동과 함께 ‘모리스 돕 – 에드워드 톰슨 – 에릭 홉스봄’ 등의 대표적인 사회경제사가들의 저작을 꼽는다. 그는 이러한 사회사적 문제의식을 토대로 산업혁명을 연구한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 사료를 수집하고, 저자에겐 낯설었던 통계기법까지 활용해가며 학위논문을 완성해가는 과정에 대한 회고는 역사연구의 실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늠하게 해준다. 사회사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했지만 학위논문 작성과정에서 계량경제사 분야의 논문을 섭렵하고, 이후 정치사, 포스트 모더니즘, 스코틀랜드 지성사, 지구사 및 제국사를 종횡 무진한 저자의 지적 ‘근면 성실함’은 학자적 삶의 한 모범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은 끝내 무고한 것으로 종결된)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복역한 친구에 대한 부채의식과, ‘서양사연구자협의회’에서의 진보적 학술운동의 좌절을 아프게 회고한다. 그의 지적 근면 성실함은 어느 정도 자신의 ‘참여적 삶에서의 좌절’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한 셈이다. 돈키호테적 삶과 햄릿적 삶 사이의 긴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더라도, 참여하는 삶과 성찰하는 삶은 참으로 뒤섞이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느 쪽인가?)

저자는 지방 사립대의 교양학부 교수였다. 연구여건은 열악했으며 전공강의나 대학원 세미나도 담당하지 못했다. 그런 자기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규정하면서, 저자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 여건에 맞춰 자신을 개조해 나가는’ 상황적 지혜를 제안한다. 한 성실한 ‘비주류’ 학자가 자신의 한 평생을 돌아본 다음 남기는 조언에는 남다른 묵직함이 있는 법이다. 그는 사회와 불화하는 것에서 오는 고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저자가 후기에 남긴 젊은 연구자들에 대한 격려는, 독자로 하여금 기꺼이 아웃사이더적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준다. 늦었지만 그의 삶에 경의를 바친다.

“학문후속세대가 줄어들고 이제는 학문 재생산구조 자체가 붕괴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어느 학회나 젊은 연구자들을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숫자가 줄어들었더라도 어느 세대나 진실을 추구하고 탐구 자체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젊은이는 있는 법이다. 그들이 자신의 꿈을 쫓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이런 젊은이들을 주목하고 싶다. 물론 세대가 다르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겠지만, 탐구에 관심을 갖고 과거를 재현하는 데에서 무엇인가 보람과 가치를 찾으려는 젊은이라면, 나의 삶의 경험과 탐구의 여정이 그들의 탐구에 자극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p.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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