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원자력은 대안인가?
그린빌리지에 기고한 세 번째 글은 정욱식의 <핵의 세계사>(<핵과 인간>으로 2018년에 개정되어 재출판)와 데이비드 엘리엇이 엮은 <원자력, 우리의 미래인가>를 참고해서 썼다. 이전에 서평을 쓴 <기후위기, 불평등, 재앙>도 한 챕터를 원자력 발전 이슈를 다루는데 할애하고 있는데, 그 서평에 원자력 발전 관련 논점까지 포함시켰다간 글이 너무 산만해질 것 같아서 원자력 문제는 단독으로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 것이다. 원자력 발전 이슈는 찬반 양론이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토론하기 좋은 주제다. 원자력 발전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주춤했다가, 최근 기후위기 문제가 부각되면서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다시금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렇지만 "원자력=친환경" 같은 도식은 내가 글에서 표현한대로 어딘지 '기괴하다'. 일본의 저자들이 쓴, 이 문제를 보다 심오하게 성찰하는 책도 있다. (사토 요시유키의 <탈원전의 철학>, 다카하시 데쓰야의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 등) 핵 발전의 역사를 일종의 과학기술사, 환경사의 관점에서 저술한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등도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아래의 글에선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핵발전 논리가 나오게 된 역사적인 맥락을 짚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기본적인 반대논거들을 정리하고자 했다. |
원자력은 대안인가?
원자력은 친환경 에너지인가?
기후위기 문제가 가시화되고, 화석에너지 사용의 사회적 비용이 본격적으로 문제시됨에 따라 화석연료를 대체할 새로운 에너지원을 모색하는 것이 에너지 공급의 쟁점이 되었다. 미래의 에너지 패권은, (‘석유패권’을 쥐고 있는 중동 산유국들로부터) 탄소배출 없이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국가로 점차 옮겨갈 것이다. 현재로서는 미래 에너지원의 주류를 두고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가 경쟁하고 있는 모양새다.
2020년말을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441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은 한해동안 총 2553 테라와트의 전력을 생산해냈다.[i]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원전사고에도 불구하고, 탄소배출량이 현저히 적다는 점에서 원자력은 여전히 매력적인 대안인 것이다. 빌 게이츠 같은 원자력 옹호자는 재생에너지의 불확실한 수급을 문제시한다. 태양열이나 풍력은 날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24시간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기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친환경주의자들 가운데서는 ‘가이아 이론’으로 유명한 제임스 러브룩과 <6도의 멸종>의 저자 마크 라이너스가 대표적인 원자력 옹호자이다. 이들은 원자력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기후위기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와중에 지난 1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천연가스와 함께 원자력을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에 포함시키며 원자력을 ‘친환경’ 에너지로 공식화했다. 원전 찬성파인 프랑스와 반대파인 독일의 치열한 여론 경쟁 도중에 화석연료 값이 상승하며 전력 가격이 급등한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
그렇다면 원자력은 정말로 ‘친환경적인’ 에너지이고, 반핵-탈 원전 운동은 단지 감성에 호소하는 비과학적인 궤변일 뿐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원자력 발전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하는 ‘핵무기’의 공포가 너무나 강렬하다. 원자력 발전이 진정한 ‘녹색 대안’이라는 주장은 어딘지 어색하고 기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자력 발전’의 독특한 역사성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원전에 대한 찬반 논리를 단순히 열거하기에 앞서, 원전이 본질적으로 ‘살상무기’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그 독특한 역사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나아가 ‘핵’과 ‘인간’이 공존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도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핵무기는 처음부터 일본을 겨냥한 무기가 아니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연합군이 나치보다 빨리 ‘절대무기’인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히틀러가 핵개발을 시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무기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ii]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 위기의식은 과장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전쟁 막바지까지 연합군에 결사 항전하던 일본이 원자폭탄의 위력에 놀라서 전의를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는 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일본은 그 시기에 이미 패색이 짙었고, 미국과의 물밑 협상을 통해 항복의 시기와 방법을 타진 중이었다는 사실이 비밀 해제된 문건들을 통해서 밝혀진 바 있다. 게다가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에도, 이미 대규모 폭격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을 검토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었다는 증거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오히려 첫번째 피폭 이후,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참전한 것이었다. 소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자 했던 미국은 놀라서 두번째 핵폭탄을 나가사키에 떨어뜨리며 14만명을 살해했다. 이 가운데엔 조선인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미국의 핵폭격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을 겨냥한 무력시위였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불가피하게’가 아니라, 전후 질서에서 소련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핵폭격을 감행한 것이다. 핵무기가 아니라 소련의 참전이 일본 항복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사실은, 핵무기를 통해 비로소 세계대전이 끝났다는 ‘신화’에 가려 지금까지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이런 문제의식은 미국의 수정주의 외교사가인 가 알페로비츠(Gar Alperovitz)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살상무기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해보자는 주장은 1953년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핵(Atoms for Peace)’ 유엔 연설을 통해 처음 제기되었다. 원자력 발전의 기술적 핵심은 중성자의 속도를 늦춰 핵폭발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감속재’와 노심으로부터 열을 바깥으로 전달하는 ‘냉각재’이다. 그러니까 원자력 발전소는 핵폭발을 천천히 일으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리는, ‘전통적인 화력 발전소 기술과 결합된 매우 복잡한 증기발생기’[iii]인 셈이다. 아이젠하워의 연설 이후 70년대초까지 핵 발전소는 감속재의 종류에 따라 ‘경수로’, ‘중수로’, ‘흑연로’ 방식으로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이후 세계적인 경제침체와 함께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이 의문에 부쳐졌다. 막대한 초기 건설비용을 상환하지 못하는 원전이 속출했으며, 1979년 스리마일섬과 1986년 체르노빌에서의 원전사고 이후로는 안전성 문제까지 부각되었다. 원전개발은 2000년대 초에도 성장 정체 국면에 놓였다가,[iv] ‘기후위기’와 ‘에너지전환’이 화두로 떠오른 오늘에 이르러 다시한번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
반핵운동이 감성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비이성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원자력 에너지는 명백한 위험요인과 막대한 비용을 수반한다.
먼저 핵폐기물 처리 문제는 원자력 발전의 최대 취약점이다. 핵폭발로 타고 남은 ‘재’인 ‘사용 후 핵연료’는 ‘차폐 시설이 없으면 10m 내에서 20분만 노출되어도 생명을 빼앗’[v]을 수 있을 만큼의 강한 방사능을 띠는데, 현재로선 이 폐기물을 단순히 ‘장기 건식보관’하거나 특수한 용기에 담아서 땅에 묻을 수 있을 뿐(심지층 처분)이다. 원전가동 이래로 현재까지 어떤 나라도 핵폐기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탄소를 적게 배출할 지는 몰라도, 또다른 환경파괴 물질인 고준위 방사성 물질을 배출하는 원전을 진정 ‘친환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기술(파이 프로세싱)과 소듐냉각고속로(SFR) 기술은 핵폐기물 처리와 관련해서 최근 가장 각광받는 기술이다. 소형 모듈 원자로 (SMR) 역시 경제성과 안전성이 높은 새로운 핵 발전 기술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상용화되거나 유의미한 성과를 보이고 있는 기술은 없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을 근거로 해서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것은 모순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저탄소’ 에너지원이 맞는지도 의문시된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 과정’에서 원자력이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발전소의 운영, 연료공급, 폐쇄와 해체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발전 생애주기’에서는 불가피하게 탄소를 배출한다. 원자력 발전이 에너지 공급의 완전한 전세계적 주류로 자리 잡는 미래 시나리오에서의 탄소배출량은 현재 화력 발전소보다 클 수 있다.[vi]
원자력 발전소가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단순히 공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여러 차례 핵시설에 대한 공격 시도가 있었으며, 운송 중인 핵물질을 탈취당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원자력 발전이 재생에너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주류’ 에너지 공급책으로 자리잡게 된다면, 핵물질을 취급하는 국가들이 늘어날 것이며, 기술적으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국가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는 지난 반세기동안 국제사회가 기울여온 비핵화-핵확산방지 노력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애당초 아이젠하워의 미국이 시작했던 ‘핵 발전 증진’ 프로젝트와 ‘핵 군축’은 양립이 불가능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러니까 ‘평화적인 핵 사용’은 형용모순이다. 핵과 인간은 공존을 시작한지 채 100년이 되지 않았다. 핵과 인간의 공존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일시적 사태이다. 근미래에 인류는 ‘핵이 죽고 인간이 살 것’인지, ‘인간이 죽고 핵만 남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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