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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13. 13:21

존 맥스웰 쿳시, <추락>을 읽고

영문학 교수인 데이비드 루리는 제자인 멜라니 아이삭스와의 성추문으로 해임되는 ‘불명예’를 입은 뒤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가 딸 루시와 함께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흑인 괴한 세 사람에게 습격을 당하고, 딸인 루시는 강간 피해를 당한다.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가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여기서 루리 교수가 역지사지의 깨달음을 얻고 반성과 회개를 거쳐 ‘개과천선’하는 것으로 종교적 감흥을 유발하는 구성을 취했을 것이다. 의 비범함은 이런 방식의 서사구성에 철저히 저항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역사적 화해와 통합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냉정하게 성찰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자신의 성 비위는 단지 낭만주의자다운 자연성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둥,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

2025. 5. 10. 19:29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을 읽고

폴 오스터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는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상당히 난해한 소설이었다. 듣기로 폴 오스터는 90년대에 쿤데라, 하루키와 함께 국내 독자들에게 ‘힙한’ 작가로 소비되었다는데, 한국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기엔 서사가 고전적인 형식을 갖춘 것도 아니고, 쿤데라나 하루키랑 비교해보아도 (좋든 나쁘든) 고도로 철학적인 소설에 가까워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은 아니라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국내에 폴 오스터의 작품 대부분이 소개되어 있는 것에 비해 본격적인 비평이나 읽을만한 후기도 많지 않다(영문학 논문은 몇 편 보인다).1부와 2부는 구심점 없이 서사를 빙빙 돌린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카프카의 장편소설들을 연상시켰다. 카프카 장편의 특징은 읽는 동안은 지루해서 읽기가 힘든데, 다 읽고 곱씹어보면서..

2025. 3. 13. 00:10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그것이 의도된 것일지언정 경박하고 상스러운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박상영의 ‘옐로 저널리즘적 취향이 우려’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흥미로운 구도를 가지고 있어서 여러가지 방향에서 독해가 가능한 입체적 텍스트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속 ‘게이 청년의 연애사’는 ‘퀴어 서사’나 ‘여성서사’가 아니라 ‘불구화된 남성서사’로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이 작품에서 게이인 주인공이 끊임없이 시도하고 갈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적 정상(?)연애’이고, 주인공의 성적 정체성 자체는 (중요한 설정이지만) 결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형적인(?) 청년 남성의 생애주기와 취향을 따르고 있으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좌절도 헤테로 남성청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2025. 1. 30. 15:08

황정은, <디디의 우산>을 읽고

와 ,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는 좋았고, 는 좋지 않았다. 두 작품이 각각 세월호 사건을 맥락화하는 방식이 좋음과 좋지 않음을 결정했는데, 그 차이가 바로 황정은과 한국소설들이 직면해 있는 딜레마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에서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은 d의 상실과 병치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 사건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오갈 수 없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144쪽)의 세계에 놓여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에서 ‘혁명’은 정치사회적 의미의 도약을 의미하기보다 피안과 차안 사이의 오고 감, 나아가 미지근한 사물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종교적 극복의 문제다.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2025. 1. 29. 17:25

백수린, <여름의 빌라>를 읽고

백수린의 소설을 처음 읽어봤는데, 오랜만에 괜찮은 단편집이었다. 최근 한국 단편소설들이 특정 소재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관찰이나 성찰을 게을리하곤 한다는 나의 (근거 있는) 불만은 백수린의 소설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나는 한국 여성작가가 쓴 단편소설에 동성애자가 등장하지 않기만 해도 미학적으로 관대한 마음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동성애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게으름에 대한 혐오이다)백수린의 화두는 ‘관계’일 것이다. 이때의 관계는 대개 ‘마지못해 현실적인 인물’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낭만적 인물’이 맺는 관계이다. 백수린은 전자가 후자에 대해 갖는 동경과 질투라는 양가감정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에 등장하는 ‘주재원 언니’, 에 등장하는 ‘엄마’가 대표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하고 싶은 ..

2024. 1. 24. 17:39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하나의 독법

가 , 와 동급의 고전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건질 것은 미국문학 특유의 시적인 언어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 소설이 영문학사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로선 왜 이 소설이 미국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로 꼽히는지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SAT나 에세이 대비용 ‘모범생 소설’이 꼭 몇 편 있다. ‘적당한 깊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안전한’ 주제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암기해버리면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영어 자체가 된다. 이런 소설들은 현지 고등학생이나 유학준비생들에게 고급 어휘와 문장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어 교재’로서의 의미가 크다. 는 거의 대표적인 ‘모범생 소설’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그나마 원서도 아닌 번..

2023. 8. 9. 16:17

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헤세의 , 카뮈의 ,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이다(알라딘 기준 1위 , 2위 , 3위 . YES24 기준으로는 1위가 , 2위 , 그리고 은 4위다.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샐린저의 이라고 한다). 이나 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헤세와 카뮈는 어쨌든 둘 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이나 자체도 이른바 서구식 부르주아 교양주의 정전 목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사실 그래도 의 인기는 좀 이상하다. 헤세 작품 중에서 서구에서 더 많이 읽히는 작품은 나 이고,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은 대작인 다. 그리고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세를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시인에 가깝다). 전쟁..

2023. 6. 20. 19:20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을 읽고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거론되는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보다 지루한 소설이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처럼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으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라스꼴리니코프나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강렬한 역할을 주인공인 바자로프가 했어야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바자로프는 다소 희화화되어 묘사되다가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서정적인 순간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바자로프의 양친을 묘사할 때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의 ‘영원한 화해’는 죽은 자식의 무덤가 앞에서나 가능했다. 그것이 투르게네프의 정치적 입장을 암시하는 것인가를 두고 당대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