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디디의 우산>을 읽고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d>는 좋았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좋지 않았다. 두 작품이 각각 세월호 사건을 맥락화하는 방식이 좋음과 좋지 않음을 결정했는데, 그 차이가 바로 황정은과 한국소설들이 직면해 있는 딜레마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d>에서 세월호 사건은 교통사고로 연인을 잃은 d의 상실과 병치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세월호 사건은 이승과 저승 사이의 오갈 수 없음을 애통해 하는 사람들의 세계, 그러니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144쪽)의 세계에 놓여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d>에서 ‘혁명’은 정치사회적 의미의 도약을 의미하기보다 피안과 차안 사이의 오고 감, 나아가 미지근한 사물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종교적 극복의 문제다. ‘이 상자에 있는 동시에 저 상자에 있을 수는 없는’(23쪽) 교착 상태의 극복은 작중 묘사되는 이웅평 대위의 전투기 귀순 장면(114쪽)이나 유골단지의 미지근함(134쪽)과 대조되는 진공관의 섬뜩한 뜨거움(145쪽)을 통해 시도되고 있다. 관건은 세월호 사건을 여기에 병치시킴으로써 종교적 극복의 문제를 정치사회적 도약까지도 아우르는 ‘애도의 정치학’으로 종합하는 시도가 얼마나 설득력 있느냐에 있다. 작중인물 박조배는 이 문제를 ‘존나없음’을 극복하는 문제(120쪽)로 인식한다. 그런데 이 ‘존나없음의 극복’은 소설 속에서 문학적으로 해결되었다기보다 소설 밖의 정치적 격변을 통해 현실적으로 해소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는 현실이 문학을 앞지르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옳게 진단하기 위해 작가는 이 소설집의 두번째 작품 속에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 장면을 삽입해야만 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d>와 달리 세월호 사건을 연세대 사태(1996년)와 용산 참사(2009년 1월 20일)라는 구체적 사건들과 병치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장기 2010년대’의 사회적 참사로서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을 관련 짓는 것은 ‘이명박근혜 보수정권 시대’라는 한국인적 감각에 비추어 보지 않더라도 특이하지 않다. 문제적인 것은 두 사건을 1996년 연세대 사태와 연결한 선택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사회에서 ‘운동권’이 사회적 지지를 잃기 시작한 것은 학생운동을 한총련이 주도하기 시작한 90년대 중반부터였다. 작가는 시위군중의 ‘시대착오적인 과격성’을 부각하고 이들을 ‘종북 빨갱이’로 규정하는 반동적 관성이 이 시기부터 비롯했다고 감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연세대 사태와 용산-세월호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주인공을 인텔리-퀴어 당사자로 설정한 것은 이 선택에 보다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다(그래서 자의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87년 6월 항쟁으로 대표되는 80년대와 96년 연세대 사태로 대표되는 90년대를 분리해서 인식하고, 전자는 긍정하면서 후자는 부정하는 시선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관찰 자체는 타당하다. 그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이 다름아닌 586세대와 마초주의자들이라는 지적도 옳다. 실제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던 엘리트집단 중 상당수가 ‘운동권 출신’의 ‘뉴라이트’ 인사들이라는 사실은 아주 단적인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서점에서 ‘어른 입장’ 운운하며 김소리를 훈계하는 ‘1962년생 수학교사 아저씨’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어른됨을 요구하기만 하고 그 자신은 남을 비난할 때만 어른 됨을 써먹는 야비함(240쪽)은 정확히 386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보이는 태도를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병치는 영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한총련과 연세대 사태가 ‘피해자 여성’이 등장했던 ‘페미니즘적 모멘트’였다고 서사화하는 작가의 구도에 흔쾌히 동의하기 어렵고, 시위군중의 ‘폭력성’과 ‘이념성’을 혐오하는 대중적 경향에 대한 작가의 역사정치적 조감 역시 성급하고 단편적이다. 1996년 연세대 사태에서 경찰과 시민들이 표출했던 여성혐오와 2016년 촛불집회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여성혐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관찰은 기술적으로야 타당하지만, 역사적으로 충분히 치열한 것이 아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성 대신 감성과 관습적 묘사를 반복하거나 머나먼 추상으로 도피해버렸다(홀로코스트와 한나 아렌트라니). 언론기사나 단행본 도서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작가가 참조한 레퍼런스를 직접 드러내는 선택도 형식실험으로 보이지 않고 작가의 지적인 판단유보로만 보였다. 쉽게 말해 지적 치열함이 작가의 정치적 구상에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한총련도, 용산도, 세월호도, 심지어 페미니즘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연결은 독자를 설득해내는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황정은이 동시대 여성작가 중 확실히 최전선에 있는 작가임은 분명하다. 황정은은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폭력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감각하고, 그것에 정치적 구상으로써 대항하는 몇 안 되는 한국 소설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옳은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의 실패에서도 뭔가를 얻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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