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하나의 독법

<위대한 개츠비>가 <모비 딕>, <율리시스>와 동급의 고전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건질 것은 미국문학 특유의 시적인 언어 뿐이다. 그것만으로 이 소설이 영문학사의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나로선 왜 이 소설이 미국 대학 입시를 위한 필독서로 꼽히는지 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SAT나 에세이 대비용 ‘모범생 소설’이 꼭 몇 편 있다. ‘적당한 깊이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안전한’ 주제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암기해버리면 그만이고, 중요한 것은 영어 자체가 된다. 이런 소설들은 현지 고등학생이나 유학준비생들에게 고급 어휘와 문장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영어 교재’로서의 의미가 크다. <위대한 개츠비>는 거의 대표적인 ‘모범생 소설’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그나마 원서도 아닌 번역으로 <개츠비>를 읽는 것은 시간낭비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제는 간단하다. ‘모범생 소설’답게 작가가 너무나 명확하게 독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제이 개츠비는 미국(신세계)의 신흥계급이고, 톰 뷰캐넌은 유럽(구세계)의 귀족이다. 이런 대조는 소설 속에서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 미국 서부와 동부 등으로 변주되어 반복된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도회적이고 느와르적인 분위기는 물론 1920년대 ‘재즈시대’의 물질주의와 도덕적 타락, 아메리칸 드림의 허망함을 암시하는 것이고, 개츠비의 비극적인 최후는 결과적으로 그러한 타락에 대한 단죄가 된다. 그럼에도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이런저런 맥락을 차치하고, ‘초록색 빛’으로 상징되는, 개츠비가 좇았던 이상과 데이지를 향한 순수한 사랑만큼은 교훈으로 남길 만하지 않겠느냐 하는, 관찰자 닉 캐러웨이의 균형감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 소설은 ‘고전’답지 않게 너무나 정확하고 분명하다. 이렇게 교과서처럼 쓰인 소설에서는 비평적인 긴장이랄까, 불온한 에너지 따위를 기대할 수 없다. 이래서는 소설이 시간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잊혀지기 마련인데, <위대한 개츠비>가 예외적으로 오랫동안 고전으로 회자되는 것은 아마도 이 소설이, 그 영어적인 출중함으로 인해, 수많은 입시생들의 탐독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개츠비는 소설의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계층불평등의 상징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이창동의 <버닝>(2018)에서 종수(유아인)는 ‘한국에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고 하소연한다. 이때 개츠비는 ‘뭐하는지 모르겠지만 돈은 많은 젊은이’의 상징이다. 물론 소설의 전반부까지 개츠비의 재력은 미스터리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어서 개츠비의 뒷 이야기까지 모두 아는 사람들에게 개츠비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낸 능력주의자의 전형이다.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가 고안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위대한 개츠비 곡선(Great Gatsby Curve)’은 이 점에 착안한다. X축은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 계수, Y축은 세대간 소득연동성을 나타내는 세대간 소득탄력성이다. 우상향하는 개츠비 곡선은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계층이동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급이 <위대한 개츠비>의 전부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반영해서 ‘모범생 소설’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소설을 좀 더 실감나게 읽어내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1920년대 ‘재즈시대’에 쓰인 이 소설을 2020년대 한국의 맥락으로 ‘초월번역’ 해보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런 방식은 21세기 한국과 시공간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도무지 공감이 어려운 소설을 실감나게 읽어내는 유용한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어떤 소설은 시대적인 질감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하겠지만, <위대한 개츠비>처럼 너무 대놓고 특정한 시대성을 드러내는 경우, 역설적으로 과감한 ‘초월번역’이 작품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침 이 소설은 한국에서 드물게 번역경쟁이 붙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출발어(영어)와 도착어(한국어) 가운데 어느 것에 더 충실할 것인가에 따라 직역(김욱동)과 의역(김영하)으로 입장이 나뉠 텐데, 내가 제안하는 ‘초월번역’은 거의 마테오 리치급의 과감함을 요구한다.

마테오 리치 식으로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는 다음과 같다. 닉 캐러웨이와 톰 뷰캐넌은 특목고-서울대(예일대) 동문들로, 모두 명문고등학교의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톰과 닉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톰네 집안은 재벌2세 정도 되는 초부유층, 닉네 집안은 그보다는 못한 중상위 계층에 해당한다. 닉이 톰에게 갖는 묘한 자격지심은 정확히 그 정도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일반고 출신으로 연세대 의대(개츠비는 자신이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주장했지만 알고 보니 이는 학력위조였다 – 개츠비의 출신학교는 연세대 원주캠퍼스 정도였던 것으로 하자)에 들어와서 졸업 후 돈이나 긁어 모은 개츠비가 톰에게 맞먹겠다며 ‘나대기’ 시작한다. 개츠비가 사용하는 독특한 호칭어 형씨(old sport)’에는 바로 이 맞먹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 있다. 심지어 개츠비는 톰의 애인인 데이지가 중학교 시절 자신의 첫사랑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녀를 톰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톰 입장에서는 개츠비가 건방지고 괘씸하기 짝이 없다.

유념할 것은 독자 입장에서 개츠비 캐릭터의 질감이 흔쾌히 지지할 만큼 개운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츠비가 의대에 진학한 과정이 썩 인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개츠비는 일반고 내신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표독스럽고 이기적인 한국 고등학생 스타일이었다고 보면 된다. 개츠비가 죽은 후에 공개되는 그의 ‘일일 계획표’는 한국 학생들의 그것만큼이나 빈틈이 없다. 개츠비가 출세하는 과정에서 어울렸던 마이어 울프심 같은 인물도 영 꺼림칙하다 - 나의 번역을 따르자면 울프심은 ‘사교육 카르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개츠비 스스로는 그 모든 과정을 중학교 시절 자신의 첫사랑인 데이지와 ‘급이 맞는’ 남자가 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관적으로는 낭만파인 셈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음침하기 짝이 없다. 이런 자폐적인 세계관은 우리 시대의 ‘능력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통용된다.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어 최종적으로 의대에 합격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가장 숭고하고 낭만적인 서사다. 당사자들에겐 실존주의지만 객관적으로는 유아론(唯我論)이다. 개츠비는 바로 그런 서사에 과몰입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식의 번역이 정당화되는 것은, 2020년대 한국에서의 계급투쟁이 사실상 고등학교 단계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2세와 맞먹겠다는 생각까지는 감히 하지 않지만, 중산층으로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최소한 의대나 로스쿨 정도는 가야만 한다는 것이 한국 중산층 청년들의 생각이다(이제서야 언론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저 ‘N수 열풍’을 보라!). 물론 굳이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아도 되는 ‘재벌2세’ 톰 뷰캐넌이나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들’과 경쟁하면서 함께 경박해지지 않아도 된다. 결과적으로 톰 뷰캐넌과 제이 개츠비의 갈등은 요즘 식으로 번역하면 재벌2세와 공부 잘하는 의대생 사이의 자존심 싸움 정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정해진 승부다. 수능을 잘 보는 것으로는 재벌2세를 이길 수 없다. 개츠비는 데이지 대신 자동차 사고 누명을 쓰고 피해자의 남편에게 보복당한다. 개츠비의 한계는 마지막까지 철저히 투쟁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데이지로 상징되는 스스로의 ‘낭만서사’에 젖어 ‘톰 뷰캐넌’이라는 구조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때 문제적인 것은 관찰자인 닉 캐러웨이의 입장이다. 계층으로 보나 학연으로 보나 톰에 가까운 닉은 어째서 개츠비에 대해 온정적인 것일까?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무리예요. 당신 한 사람이 그 빌어먹을 인간들을 모두 합쳐놓은 것만큼이나 훌륭합니다”) 생활이나 실제 사회적 지위는 톰에 가깝지만, 생각으로는 언제나 톰을 못 마땅해하는(“나에게 동부는 언제나 어딘지 모르게 뒤틀린 데가 있어 보였다.”), 닉 캐릭터의 현대적인 번역어는 다름아닌 ‘강남좌파’다. 강남좌파는 ‘표독스러운 개츠비’들 앞에서 그다지 당당하고 떳떳한 입장이 못된다. 몇 년 전 강남좌파 위선의 정점을 몸소 보여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청년세대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여 ‘유학 기회가 없었던 흙수저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계층적인 맥락을 민감하게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보기에 이 사과는 이상한 사과다. 조국 전 장관의 딸이 ‘의사가 되는 것’에 크게 분노한 청년들은 ‘유학기회가 없었던 흙수저 청년들’이 아니라(흙수저 청년들에게는 유학기회가 문제가 아니다), ‘유학기회가 없었던 개츠비들’이었다. 조국일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의 핵심은, 왜 닉 캐러웨이 정도 되는 부유층이 개츠비들의 몫까지 취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만약 조민 씨가 굳이 의사를 꿈꾸지 않고 톰이나 닉처럼 귀족적인 진로를 선택했다면 그 모든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핵심은 조국 전 장관이 ‘분노하는 개츠비들’을 상대로 할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신의 딸과 달리 자신들은  공정하고 정정당당하게 노력해서 의대생 지위를 쟁취했다는데, 그 아름다운 서사를 두고 닉 캐러웨이가 감히 뭐라고 훈수를 둘 수 있겠는가. 닉이 개츠비에 대해 보이는 우호적인 태도는 바로 이런 계급적 뉘앙스를 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닉을 ‘강남좌파’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동의한다면, 이 소설은 여러모로 불쾌한 소설이 된다.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다름아닌 ‘강남좌파 윤리강령’이다. 강남좌파들은 그들만큼 ‘유리한 입장이 아니었던’ 개츠비들을 비판할 수 없다. 결국 개츠비에게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는 주체는 강남좌파 닉이며, 개츠비 식의 ‘청교도 윤리 서사’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결과 그는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동문서답식의 마지막 문장으로 소설을 맺는다. 이 소설이 출간되고(1925년) 4년 후 세계가 대공황과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참으로 한가롭고 멍청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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