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내가 읽은 하루키 소설은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노르웨이의 숲>과 스물한살 때 읽은 <기사단장 죽이기>가 전부이다. 그의 대표작인 <태엽 감는 새>나 <해변의 카프카>, <1Q84>는 읽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의 소설들을 더 읽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느끼는 바로는, 하루키의 작품 자체보다, 대중적으로 그의 작품이 많이 읽히는(팔리는) ‘하루키 현상’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보다 진지한 자세이다. 그게 대세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교양독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얼마전에 <태엽 감는 새>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수록되어 새로 출판되었다. <노르웨이의 숲>과 <태엽 감는 새>까지는 ‘모던 클래식’의 범주에 든다는 민음사의 판단인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만 한정해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기사단장 죽이기>는 출간 당시 국내에서 외국 작가의 장편소설로서는 이례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아마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이 또 번역되어 출판된다면 비슷한 현상이 있지 않을까 싶다.

 

하루키에 대한 나의 잡다한 배경지식들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의 소설은 후일담 문학적인 성격을 지닌다. 일본의 과격했던 60년대 좌익학생운동에 대한 회고가 그의 소설들의 정서적인 원동력이다. 전투적 학생운동을 ‘회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현재’를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로부터 단절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즉, 그의 소설은 탈정치적이며, 개인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이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 속 판타지적인 요소는 ‘현실도피’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그의 세계관 속에서 ‘회한’은 중요한 정서이며, 소설 속에서 과시적으로 언급하는 재즈 음악은 자주 회상의 매개체가 된다. 그의 서구적인 취향은 그를 ‘일본문학적인 전통’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그런데 이 ‘일본문학적인 전통’이 무엇인지는 또다른 논의를 요구한다). 하루키 자신의 서구적인 음악적/문학적 취향과 성적인 묘사, 의문의 죽음, 판타지 등이 그의 문학의 클리셰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1995년 옴진리교에 의한 ‘사린 테러’를 계기로 변화한다. ‘무심함’이나 ‘냉소’보다 ‘책임과 헌신’이 중요해진 것이다. 공동체와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거대 담론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최근작들의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책임’의 문제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경우도 정서적 진실에 입각한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는 난징대학살이나 ‘수정의 밤’, 동일본 대지진 등 현실의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소설 속에 소환된다. 다만 이런 그의 시도가 문학적으로 성공적인지는 아직까지 의문스럽다.

 

그런데 이런 하루키의 문제의식 자체는 한국소설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나 황정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세월호 이후’ 한국문학의 변화를 표상한다. ‘사린 테러 이후’ 하루키의 변화처럼. 그러니까 ‘세월호 이후’, ‘거대 담론 없이’ 좀 더 ‘정치적인’ 소설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한국문학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의 구성을 따른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십대시절의 단짝 친구 그룹으로부터 의문의 ‘절교’를 당한다. 10년 넘게 그 이유를 모르다가 애인인 사라의 권유로 ‘왜 자신이 그 그룹에서 쫓겨나야 했는지’를 알기 위한 ‘순례’를 시작한다. 쓰쿠루가 쫓겨난 것은 그가 ‘시로’를 강간했다는 누명 때문이었다. 시로는 정신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쓰쿠루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고(어떤 이유에서인지 시로는 정말로 쓰쿠루가 자신을 강간했다고 믿었다), 친구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쓰쿠루를 그룹에서 내쳐야 했다. 그룹은 그 후 얼마 안 가 해산됐고, 쓰쿠루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시로는 몇 년 전 의문의 범인으로부터 교살당한 뒤였다. 

 

쓰쿠루는 시로를 강간하지 않았지만, 그는 종종 시로를 성적 대상으로 한 꿈을 꾸었다. 쓰쿠루는 심지어 시로를 살해한 것도 자신이 아닌지 고민한다. 따라서 소설 속에서 강간과 살인은 일종의 ‘정서적 진실’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정확한 인과관계나 정황이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정서적 ‘책임’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서는 1995년의 지하철 테러 사건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하루키는 독자들에게 쓰쿠루가 느끼는 만큼의 ‘책임’을 느낄 것을 느슨하게 권유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전체적으로 구성이 좀 자의적이고 도식적이어서 아쉬운 측면이 많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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