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로 모색한 인간 구원의 대서사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카버가 묘사하는 도회의 일상은 더러운 리얼리즘(Dirty realism)’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너절하다. 『대성당』의 단편들은 가정파탄의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알코올 중독과 이혼이라는 그의 소설 속 상수는 장엄한 비극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시시콜콜하고 핍진하다. 인물들은 너절한 일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지만, 그들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 무너져 버리는 구원의 허약한 구조만을 확인할 뿐이다. 아들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손목시계(『칸막이 객실』)는 마이어스의 구원을 지탱하는 마지막 주춧돌이었다. 고인 물(『보존』)이나 집 주인의 퇴거요청(『셰프의 집』), 전화 한 통(『내가 전화를 거는 곳』)만으로도 인물들이 기대하던 구원은 좌절되어버린다. 너절한 일상과 구원의 불가능성, 이것이 카버의 리얼한 출발점이다. 인간은 계속 이대로 살아가야만 한다. ‘(더러운) 리얼리즘속에서는 그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 너머는 환상 속에서나 모색해야 한다.

 

가족이 아닌 (가족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낯선 타자와의 조우는 카버가 제안하는 구원의 가능성이다. 이때의 타자들은 주인공에게 악의도, 선의도 없는 무심한 타인들이다. 빵집 주인은 납득할 만한 이유로 아이를 잃은 하워드와 앤에게 장난전화를 건다(『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맹인은 불경스럽게도 아내와 불필요한(?)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 이상 주인공의 삶을 침범하지 않는다(『대성당』).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은 리얼리즘 너머에서 구원을 찾기 때문에 도드라진다. 두 작품 속 구원의 순간은 모두 야심한 시각에 인조등(형광등 불빛과 TV 화면)을 쪼이는 와중에 찾아온다. 인물들의 공명은 시간과(“그들은 이른 아침이 될 때까지, …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간을(맹인) 넘어서는 초감각의 영역에 놓여 있다. 『대성당』에서 주인공이 눈을 감은 채로무언가를 독자들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의 마지막 문단을 읽으면서 수 있을 것이다. 두 작품은 이처럼 감동적인 구원의 순간 종결되어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고양의 방식으로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다시 더러운일상으로 돌아와 남은 삶을 살아가야한다. 『열』은 일상과 구원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열』을 통해 카버는 앞의 두 작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숙한 리얼리즘의 단계에 이른다. 아내의 일탈로 무너진 칼라일의 일상은 카버식 더러운 리얼리즘의 맥락 위에 놓여있다. 그의 망가진 일상은 변수가 아닌, 인간 삶의 기본 조건이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웹스터 부인은 잠시 찾아온 해방이다. 그녀의 등장은 낯선 타자와의 조우라는 카버식 구원 모티브의 연장이다. 웹스터 부인은 칼라일의 아이들을 돌보며 그의 일상을 복원하고, 열병을 앓는 칼라일을 간호한다. 만약 『열』이 이대로 끝났다면 이 작품 역시 감동적인 고양으로 종결되는 앞의 두 작품의 단계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지만 『열』은 웹스터 부인이 마지막에 떠나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칼라일이 그가 처한 삶의 현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변수는 아내의 일탈(일상)이 아니라 웹스터 부인(구원)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순간에 머무르는 것은 성숙이 아니다. 성숙이란, 환상적인 구원의 시간을 지나, 다시 너절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칼라일이 열병을 앓는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아픔은 흔히 성숙에 이르기 위한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웹스터 부인은 칼라일의 지난 삶의 이야기들을 묵묵히 들어주고, 곧장 떠나버린다. 칼라일은 웹스터 부인을 배웅하고, “팔을 내리고 아이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구원의 시간 이후에 인간은 다시 몸을 돌려야만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렇듯 12편의 단편들을 그러모아 인간 구원의 대서사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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