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의 존재론(『그래도 우리의 나날』 (시바타 쇼))

오하시와 세쓰코의 약혼은 체념의 결과였다. 오하시가 단념한 것은 내면의 공허감 자체였다. 그는 공허를 채우기 위해 방탕한 여성편력을 일삼았는데, 상대방 중 한명인유코의 자살을 계기로 죄의식에 시달리며 수시로 파트너가 바뀌는 연애를 끊고’ ‘충실한 생활대신 내실 있는 생활을 구축하기로 한다. ‘충실한 생활이 내면의 공허감을 마주하고 그것을 무엇으로든 채우는 삶이라면, ‘내실 있는 생활은 공허감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럴듯한 사회인으로 복무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쓰코는 대학교 선배 노세로 상징되는 혁명적 열정에 대한 단념의 결과 동네 친구였던 오하시를 약혼 상대로 결정한다. 혁명적 열정에 대한 단념의 직접적 계기는 일본 공산당이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육전협(일본 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이었다. 당의 무오류성에 대한 맹신과 운동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투쟁에 헌신했던 학생들은 당의 타협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속에서 동시에 무너져간 것은 당에 대한 신뢰라기보다
굳이 이성을 억누르면서까지 당을 믿으려고 한 우리의 자아였어”

세쓰코의 혁명적 우상이었던 노세의 이념적 자살은 세쓰코가 혁명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완전히 단념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 나는 그런 복잡한 문제를 알고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어. 그저 모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야.
나만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오하시와 세쓰코는 미성년(청춘)’의 공허감에 괄호를 치고 그것에 대한 판단을 무기한 중단한 채성년으로 무난하게 진입했다. 그들이 판단을 유보한 것은 삶의 의미 자체였다. 삶의 의미라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인간은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진지한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장려되는 시기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잠시 부여될 뿐이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그 문제를 덮어두고 주어진 역할에 복무하는 성년의 삶으로 진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극복되지 않은 질문은 언제든지 상징계의 견고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존재를 뒤흔든다. ‘복무하는 삶의 정신적 구조는 이토록 허약한 법이다. 상징계의 허약함을 단번에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오하시가 헌책방에서 무심코 사온 H전집은 한스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에 기이하게 삽입된 해골의 형상과 그 의미 값이 같다.

 

그때 H전집이 자아내던 분위기부터 시작해서 내게 휘감기던 그 기이한 분위기,
내게 내 의지와 무관하게 H전집을 사게 한 그 오한은, 과연 나 혼자의 것이었을까.
…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모두의 것이지 않았을까.

 

H전집은 세쓰코가 또다른 운동권 동료 사노를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 사노 역시 육전협 이후 혁명적 이상을 포기하고 철도회사의 일개 샐러리맨으로 자신의 커리어를 끝내기로마음먹는다. 그 이상의 출세는 자신의 청춘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회적 지위와 명망에서 아쉬울 것이 없는 부사장이 자신의 죽음 앞에 의연하지 못한 것을 보고 사노는 문득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사노는 자신이 결국 배신자에 불과하다는 인식에 도달해 자살한다. 사노의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세쓰코는 자신의체념혹은 단념배신일 수 있다는 생각에 오하시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그를 떠난다. 배신자보다 철부지가 낫다는 판단이다.

 

우리는 아마 늙기 쉬운 세대이지만, 어쩌면 세쓰코는 우리 세대를 탈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성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청춘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노가 자살한 것과 세쓰코가 오하시를 떠난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년 혁명가들의 전향이 아니더라도, 무난한 사회인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타협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늙기 쉬운 세대라는 말은 60년대 일본의 운동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늙는다는 것은 배신자로서 내실 있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으로, 인간 삶의 필연적인 무의미성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허를 굳이 들여다보고 고뇌하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에 비해 언제나 삶에 대해 더 진지한 태도인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배신자의 삶이란 나쁘게 말하면 늙는 것이지만, 좋게 보면 그것이야말로 철이 든 것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눈을 가진, 사노의 냉정하고 강한 감시자로 그려지는 작중 인물 소네가 이 입장을 대변한다. 소네는 학생 시절 무당파 활동가로, ‘줄곧 정치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빠져들지도 않고, 전향하지도 않고, 이도 저도 아닌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애초에 무당파였기 때문에 배신자가 될 일도 없었다. 사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네의 냉철한 시선은 이 소설이 과거의 전투적 학생운동에 대한 낭만적 노스탤지어나 감상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해준다.

 

다만젊은 사람들이물어볼 때, ‘우리 중에도 시대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로 용감하게 진출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고말해줄 수만 있다면, 타협을 택한 이들의 삶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오하시의 입을 빌려, 자기세대의 철부지들이 아프다면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는 말을 전하며, 소네의 차가운 눈대신 오하시의 혼잣말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자기자신에 대한 배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철부지들의 존재는 어쨌든 배신자들의 시대의 정신적 폐허 속 하나의 위안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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