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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26. 17:54

안희제, <증명과 변명>을 읽고

이러 저러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저자의 오랜 친구(‘우진’)가 자살을 계획했다. 문화인류학 연구자인 저자는 친구에게 자살하기 전에 함께 인터뷰 책을 출간해보고 자살계획을 재고해보자고 제안했고, 친구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책은 바로 그 ‘인터뷰 책’이다. 저자는 자살을 계획하고 있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선언하고 있다. 저자와 친구의 진정성을 폄훼하거나 조롱할 생각은 없지만, 두 사람의 다소 과한 자의식이 느껴져서, 그리고 그 특유의 감성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직접적으로 그려져서(나도 저자들과 동년배 남성이다) 독서 초반은 불편했다. 불필요하게 엄숙하달까(원래 자기 자신의 삶은 좀 담백하게 바라봐야 하는 법이다).친구의 신상보호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조심스..

2025. 4. 26. 17:30

빈곤과 불안정노동

강지나, 훨씬 더 어둡고 참담한 내용을 각오했는데, 적어도 이 책에 등장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인생사는 각오했던 것만큼 어둡지만은 않았다. 빈곤에 대해 떠올릴 때에 나태함과 무기력, 그리고 각종 일탈행위로 점철되어 있는 ‘빈곤의 문화’나 도무지 벗어날 여지를 찾아볼 수 없는 암담한 상황의 대물림만을 연상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맥락에서) 또다른 편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는 오히려 강인한 생활력과 정신력을 지닌 경우도 있었고,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이들일수록 정상가족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커져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성실한 생활인..

2025. 1. 19. 16:07

내란 이후 민주당 서사의 보편화: 한국적 사법통치와 검찰개혁

(완성하지 못한 글이나 시의성이 상실되기 전에 기록하기 위해 블로그에 업로드하여 둡니다.)내란 이후 민주당 서사의 보편화: 한국적 사법통치와 검찰개혁 (Working Paper)검찰개혁은 하루하루 노동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다수의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의제인 측면이 있다. 평범한 사람이 형사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조사를 받는 일은 평생에 걸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어서, 검찰개혁을 일반 시민의 즉각적인 복리증진 및 자유의 확장과 연결시켜 감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 직후 민주당발 검찰개혁 의제가 일반 시민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고 정부-여당이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던 것은 그 탓이다. 요컨대 검찰의 정치보복성 수사와 기소를 두려워해야 하는 정치인들과 그 열성적 지지자들에게는..

2023. 8. 30. 18:40

<능력주의 3부작> 후기

능력주의 담론에 대해 응답해야 할 책무(?)를 느끼고 읽었다. 불평등 논의와 연계하여 훨씬 긴 글을 쓰다가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우선 간단히 감상만 먼저 남겨놓으려고 한다(정작 그 글은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권일의 와 김동춘의 는 모두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일종의 사후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의 성취가 오롯이 ‘개인의 능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을 도대체 왜 공동체가 받아들여줘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주의 자체는 ‘성공한’ 당사자의 자아 도취이거나 자기 방어 논리에 불과하다. 너무 무기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사실 운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2022. 12. 27. 23:57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유명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벨 훅스의 페미니즘 입문서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읽어보았다(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벨 훅스의 또다른 저서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를 읽은 바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의외였던 것은 이 책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입문서 중 하나임에도, 기성 페미니즘에 대해서 시종일관 집요하게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적이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임을 분명히 하면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들 중 다른 정체성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과격한’ 부류는 사실상 ‘착취와 억압’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급진적(radical)’이지 않다고..

2022. 12. 13. 22:05

한국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은 가능한가?

한국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은 가능한가? – ‘나쁜 이대남 그래프 논쟁’을 중심으로 1. 분야를 막론하고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 및 현상 분석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저널리즘 영역에서도 데이터를 활용하여 사실을 전달하는, 이른바 ‘데이터 저널리즘’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식 컨텐츠 스타트업’을 표방하는 ‘언더스코어’와 SBS 탐사보도 팀 ‘마부작침’이 데이터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한겨레, KBS 등 기성 미디어도 외부 전문가와 협업하여 도출해낸 데이터 분석결과를 보도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이른바 ‘데이터 민주주의 시대의 도래’라는 범 시대적 맥락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국가 및 지자체가 축적한 행정데이터를 ‘공공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공개하고, R..

2022. 8. 25. 23:23

김종영,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김종영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애독자이다. 그는 이철승 교수와 함께 한국사회의 중요하고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현역 사회학자로서 회피하는 기색 없이 ‘정면승부’하는 탁월한 비판적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다. “지식과 권력 3부작(『지배 받는 지배자』, 『지민의 탄생』, 『하이브리드 한의학』)” 다음으로 김종영이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교육사회학’이다. 이전에도 강준만(“서울대의 나라”)이나 김상봉(“학벌사회”) 같은 ‘대학교수’들이 학벌문제에 대해 개탄하는 목소리를 낸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학벌이 갖는 ‘지위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그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김종영은 대학 학벌의 ‘지위재’로서의 성격에 충분히 주목하는 동시에, 현대 지식자..

2022. 1. 1. 17:20

김시우 外, <추월의 시대>를 읽고

한국은 후진국인가? 한국정치는 논평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근현대사 지식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합의된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논평자들은 합의된 적조차 없는 역사에 대해서 ‘입장을 밝힐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입장을 섣불리 밝혔다가는 ‘좌빨’ 아니면 ‘수꼴’로 낙인 찍힌다. 민주화 세대를 긍정하기 위해서 주사파까지 긍정할 것을, 산업화 세대를 긍정하기 위해서 유신헌법까지 긍정할 것을 강요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합의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근현대사의 두 당사자인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에게만 그렇다. 이 책의 저자들인 80년대생을 포함한 2030세대는 당사자가 아닌 ‘후세대’로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