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김종영 교수(이하 존칭 생략)의 애독자이다. 그는 이철승 교수와 함께 한국사회의 중요하고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현역 사회학자로서 회피하는 기색 없이 ‘정면승부’하는 탁월한 비판적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연배도 비슷하다.

“지식과 권력 3부작(『지배 받는 지배자』, 『지민의 탄생』, 『하이브리드 한의학』)” 다음으로 김종영이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는 ‘교육사회학’이다. 이전에도 강준만(“서울대의 나라”)이나 김상봉(“학벌사회”) 같은 ‘대학교수’들이 학벌문제에 대해 개탄하는 목소리를 낸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학벌이 갖는 ‘지위재’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데 그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김종영은 대학 학벌의 ‘지위재’로서의 성격에 충분히 주목하는 동시에, 현대 지식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 에너지’도 고려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지위경쟁이론’과 ‘대학사회학의 기술기능론’의 종합에 더해 조지프 피시킨의 “병목사회론”을 참고하여 내린 오늘날 한국사회 교육문제에 대한 김종영의 처방은 “서울대 10개 만들기”이다.

“병목사회론”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한 사회에서 지위를 얻기 위한 기회구조는 마치 고속도로처럼 되어 있는데, 길이 충분히 넓지 않으면 ‘교통체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과 같이 10대 시절의 평가만으로 이후 인생에서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다시피 하는 ‘중요한 시험 사회(big test society)’는 고속도로가 극단적으로 좁아 교통체증도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기회구조 자체를 다원화하는, ‘길을 넓히는’ 개혁이 필요하다. 저자는 작금의 ‘대학 병목체제’를 대학, 공간, 시험, 계급, 직업의 병목으로 분석하고,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해 한국사회가 ‘교육다원체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사회를 ‘병목사회’로 인식함으로써 기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입시파’와 ‘개천용 학파’의 교육개혁안이다. ‘입시파’나 ‘개천용학파’는 ‘입시제도’를 적절히 조작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상황’을 자주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근시안적인 이해관계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학부모와 사교육 세력 및 교육부 관료들로 이루어진 ‘교육지옥동맹’은 기껏해야 수시-정시 논쟁 정도에 몰두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스타강사 출신 교육정책전문가인 이범이 제안한 ‘공동입학제’도 결국 입시제도 조율에 매달린다.

김창환 교수나 최성수 교수 같은 데이터 사회학자들도 이 ‘입시 논쟁’에 갇혀 공허한 양적연구에 골몰하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교육불평등 담론은 교육사회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OED 삼각형’(O: Origin,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E: Education, 학업성취/D: Destination,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틀 속에서 교육이 세대 간 계층이동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통계적으로 검증하는데 집착하는데, 저자가 보기에는 이 삼각형 자체가 ‘개천용 학파’스러운 문제설정에 갇혀 있다. 중요한 것은 교육과 소득으로 단순화된 추상적 모형의 통계적 검정이 아니라, 다양한 교육현상들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대학병목 체제’를 넘어서는 일이다. ‘고속도로 비유’를 이어가자면, 대부분의 ‘교육전문가’라는 사람들은 길을 넓힐 생각은 하지 않고, 비좁은 도로에서 누가 끼어들지는 않는지, 새치기를 하지는 않는지, 고속도로에 잡상인은 기웃거리지 않는지 단속하는 일에만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반칙이 발견되면 온국민이 단합하여 ‘공분’하는 것만 반복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교육개혁 논의는 공회전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독점적인 대학 병목체제를 확대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래서야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서울대를 10개 만들자’는 구호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경상대 정진상 교수가 2004년에 선구적으로 제안했던 ‘대학통합네트워크’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정진상은 서울대 학부를 폐지하고, 국립대들을 ‘통합네트워크’로 통폐합, 학생들에게 동일한 학부강의를 제공하고 졸업하면 동일한 졸업장을 수여함으로써 학부를 유럽처럼 ‘평준화’하여 운영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민교협, 서울시교육청, 사걱세 등이 정진상의 아이디어를 수정 보완하며 다양한 안들을 내놓았지만, 이들은 입시제도, 학제개편 등을 포함한 ‘최대주의적’ 개혁을 지향한 탓에 현실화 가능성을 오히려 낮추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저자는 미국의 다원화된 ‘캘리포니아 대학체제’를 벤치마킹하여 상향 평준화된 부분적 대학통합네트워크를 선(先)운영하자고 제안한다. 현재의 SKY 독점 대학체제가 극단적인 ‘독점’상태라면, 국립대 10개를 ‘서울대화’하여 상황을 ‘과점’ 상태 정도로 완화하자는 것이다. 당장 독일이나 핀란드처럼 대학을 평준화하자는 기존의 대학통합네트워크론자들의 주장은 국민적 거부감에 직면하여 현실적인 개혁안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위경쟁이론’에만 의존하여 대학의 ‘창조권력’에 주목하지 못했다. 미국식 캘리포니아 대학 체제는 단순히 상징자본의 공급을 확대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연구중심대학’이 창출하는 지식기반의 경제적 가치를 통해 공간 및 직업적 병목현상까지 완화했다는 데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 대학의 사회적 기능으로서 ‘인적자본의 축적’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각 지방에 ‘서울대’라는 이름을 가진 연구중심대학 인프라를 설치해서, 궁극적으로 국토 전체를 미국 캘리포니아처럼 성공적인 모델로 만들어보자는 것이 저자 주장의 핵심이다. 지방대 통합은 인구감소 및 지방 사립대 소멸 위험 상황 속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데, 서울대를 여기에 동참시켜 대학 인프라 상향평준화의 모멘텀으로 삼으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대안은 예리한 상황진단에 비해 뭉툭하고 공상적이다. 이전 저작에서 김종영이 보여준 그의 장기는 질적 연구자로서 인터뷰를 통해 ‘피부에 와 닿는’ 생활세계의 ‘두꺼운 묘사’를 해냈다는 데에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평준화 체제가 아닌 미국의 다원화된 대학체제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특하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대학평준화’라는 점에서 저자의 입장 자체가 기존의 ‘대학통합네트워크’론과 어떻게 차별화되는 것인지 모호하다. 저자는 “국가는 상징자본의 중앙은행”이라는 부르디외의 멋진 비유를 들어, 국가가 상징자본의 ‘양적완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국립대 통합네트워크에 사립대도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저자가 벤치마킹하자고 제안한 캘리포니아 대학 ‘과점’ 체제와는 상이한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체제를 ‘전 국토’에 적용한다면, 그것이 대학평준화와 무엇이 다른 건가?

게다가 그 평준화된 ‘서울대들’이 모두 미국의 대학들처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도 이해할 수 없다. 가령, “경상대와 경남과학기술대가 통합했듯이 부산의 국립대인 부산대와 부경대가 통합하여 정부가 3600억원의 추가 지원을 하고 이름을 서울대나 한국대로 바꾼다면 순식간에 연고대 수준의 대학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성급한 예단인 것으로 보인다. 연구중심대학이 창출하는 인적자본은 ‘서울대’라는 브랜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와 적극적인 산학협력의 축적을 통해 간신히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학부가 아니라 이공계열 대학원에서나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공계열 산학협력은 그렇지 않아도 수요가 상존하기 때문에 이미 포항공대, 카이스트, UNIST, GIST 등의 성공적인 모델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예컨대 정부가 카이스트와 포스텍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질 10개의 서울대 ‘문과학부’에 막대한 재정지원을 할 유인과 정당성은 무엇인가?

저자는 또한 학부와 대학원을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입시 자체는 학부입학까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위경쟁이론’과 친화적이지만, 저자가 새롭게 강조하고 있는 연구중심대학의 기능은 ‘대학원 문제’인 만큼, 대학체제 개편의 문제라기보다 학문후속세대 양성 문제에 가깝다. 결국 ‘지위경쟁이론’과 ‘대학사회학의 기술기능론’은 한국에서는 종합이 어렵다. ‘학벌’의 개념이 ‘학부 학벌’로 제한되는 한국적인 상황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률가가 출세하는 역사가 깊은 한국에서는 로스쿨 문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국제중 – 명문 특목/자사고 – 서울대 – 서울대 로스쿨”이 내 세대의 파워 엘리트가 밟고 있는 경로이다. 서울대가 10개가 된다고 한들, 지금의 ‘서울대 로스쿨’이 한국판 그랑제콜이 되지 말란 법이 있을까? 요즘 몇몇 대학생들은 학부과정 4년 내내 수험생처럼 "로스쿨 입시"에 매달린다. 저자가 특별히 프랑스의 허울 뿐인 대학 평준화 체제와 거리를 두고 있길래 이 문제도 덧붙여 본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자체는 시도해볼만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자가 기존의 대학통합네트워크론이 ‘최대주의적 접근’ 때문에 실패했다고 진단한 것을 떠올릴 때, 저자의 낙관은 어쨌든 과장이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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