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3부작> 후기

능력주의 담론에 대해 응답해야 할 책무(?)를 느끼고 읽었다. 불평등 논의와 연계하여 훨씬 긴 글을 쓰다가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우선 간단히 감상만 먼저 남겨놓으려고 한다(정작 그 글은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와 김동춘의 <시험 능력주의>는 모두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일종의 사후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의 성취가 오롯이 ‘개인의 능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을 도대체 왜 공동체가 받아들여줘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주의 자체는 ‘성공한’ 당사자의 자아 도취이거나 자기 방어 논리에 불과하다. 너무 무기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사실 운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타고난 재능, 적성, 가정환경 등의 제반 요소들이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그걸 결정하는 것은 사실 다 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력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재능이다. 개별 당사자들이야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해 봐야 하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그럼에도 능력주의가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사회가 철저한 세습사회인 것은 아니며 누구나 ‘노력’하여 ‘공정한 경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특권계층에 진입할 수 있다고, 개인들을 ‘격려’해주기 때문이다. 특권계층에 진입해서 일평생 안정적인 지대 수익을 누리고 싶은 개인들은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고, 기득권은 자신의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으니, 능력주의를 비판할 동기가 있는 사람은 없다. 구조적으로 누구도 비난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체제옹호의 논리, 이런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결국 문제는 불평등이다. 젊은 시절에 상위권 대학교에 입학하거나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면 평생 과도한 특권을 누리고 지나치게 큰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반대로 그러지 못한 이들은 간발의 차로 특권층에 속하지 못했다는 열패감에 시달리거나 아예 힘없는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가야만 한다. 김동춘은 한국의 입시경쟁이 다름 아닌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한 경쟁’이라고 적절히 일갈한다. 이렇듯 결과의 격차가 너무 크면 경쟁은 과도해진다. 경쟁이 극심한 상황에서 제도를 미세조정해서 과정의 공정성을 제고해봐야 결과는 지금과 비슷할 것이다. 이른바 선발에 있어서의 ‘변별력’을 위해 제도는 기괴해질 것이며 그 와중에서도 편법은 찾기 나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선발제도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공정(이라고 쓰고 ‘변별력’이라고 읽는다)에 치우쳐서 정작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인 ‘결과의 불평등’과 ‘특권의 해소’ 문제에 대해서는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는 엄밀하게 보면 좀 걸리는 부분이 많다. 한국식 능력주의의 닮음태들일 뿐이라고 저자가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과거제도 – 사회진화론 - 속물교양주의를 뭉뚱그려서 한국 능력주의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 잉글하트와 웰젤의 정치문화론을 가지고 와서 한국인의 가치관이 분배에 우호적이지 않다(‘낮은 자기표현 가치’)는 사실을 짚은 대목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이 책에서 능력주의는 곧 계급 문제인데, 정치문화론은 능력주의를 (한국인스러운) 문화와 가치관의 문제로 보고 있어 전체 논지와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상적 능력주의’를 비판한다며 한계생산력설 비판 논의를 가져온 것은 좋게 말하면 참신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아마추어적이다. 개별적으로는 필요한 문제의식들이지만, 전체적인 짜임은 좀 산만하고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이다.

좋았던 부분은 저자가 <고시계>의 사법고시 합격수기를 분석한 대목이었다. 합격수기란 태생적으로 몹시 낯부끄러운 장르의 글쓰기가 아닐 수 없는데, 고시 합격자들의 멘털리티는 나이를 더 먹어도 딱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보면 된다. 합격수기 속에서 ‘고시준비’란 거의 종교적 수련과정처럼, 합격한 자신은 단독자로서 역경을 극복해낸 초인처럼 묘사된다. 이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고시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이나 고시와는 무관한 인생을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패배자이자 낙오자요 ‘아랫것들’이다. 사법고시가 없어졌지만 어차피 중요한 시험에 의해 인생이 달라지도록 설계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든, 행정고시든, 어쨌든) ‘합격자들’은 엇비슷한 생각을 하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위정자로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위치에 다수 포진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김동춘이 <시험 능력주의>에서 한국의 능력주의가 바로 ‘시험 능력주의’라고 짚어낸 것은 정확하다. 박권일에게 논객스러운 산만함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면, 김동춘은 보다 학자적인 자세로 한국의 ‘시험주의’에 집중한다. 사실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와 김동춘의 <시험 능력주의>는 모두 몇 년 전에 출간되었던 박경숙의 역작인 <시험 국민의 탄생>에 크게 빚지고 있다. 박경숙의 책은 시험 제도 자체에 집중해서 시험이 어떻게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조형하고 한국사회의 서열구조를 고착화하는지 분석하고 있는데, 그만큼 ‘시험문화’ 자체가 한국적인 능력주의를 논할 때 중요하다(개인적으로 나는 <시험 국민의 탄생>을 ‘인생 책’으로 꼽을 만큼 좋아한다 – 그 책을 읽은 시점에 있었던 개인사와 겹쳐서 그 책으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김동춘이 불평등이 문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면서도, 해결책을 논하면서는 다시 선발제도 개선문제로 돌아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절반만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발제도를 어떻게 조율하든, 한국적인 상황에서 결과는 비슷해질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지금의 시험은 과도한 경쟁압력으로 인해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대부분 시간압박형 객관식 문제로 출제되고 있는데, 그 우수하다는 프랑스식 논술형 평가로 바꾸면 상황이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한 가지 논점은, 특정한 시험을 통한 선발제도 자체가 특정한 유형의 인간형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선발제도를 바꾸면 좀 더 바람직한 유형의 인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김동춘의 주장이 어느 정도 타당한지다.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해보면, 나는 그렇게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지만, 도대체 수능국어나 각종 객관식 적성고사를 잘 풀어내는 ‘인재’는 못된다. 대신 저자가 주장하고 있듯이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평가할 수 있는’, 가령 시간 무제한의 논문형 글쓰기나, 발표나 토론식 구술면접(나는 그런 것은 자신이 있는 편이다)으로 대학입시를 결정했다면, 아마도 나는 적은 노력으로도 또래의 ‘존경’을 받으며 편안하게 최상위권 명문대학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의 단계에서도 그런 식의 평가 패러다임이 적용된다면, 그렇게 해서 내가 ‘출세’한다면, 나는 지금의 한국적인 엘리트와 질적으로 다를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한테 주어진 상황대로 사고하기 마련이라서, 아무리 ‘논술형 인재’라고 해도 한국과 같이 일방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가게 된다면 인성파탄형 - 안하무인형의 능력주의자로 귀결될 확률이 높다. 내가 그 입장이 되면 나는 열심히 내가 통과한 시험제도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면서, 다들 ‘종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함양하라고 훈계나 해댔을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시험인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으로 선발제도의 개선 자체가 필요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이왕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여건이 되는 학생들은 어차피 사교육도 받도록 되어 있다면, 무의미한 객관식 문제 풀이 기술보다는 책도 좀 읽고 글도 좀 써보고 하는 것이 교육적으로는 더 바람직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봐야 무늬만 ‘논술형 인재’이지, 결국 경쟁에서 비교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획일화된 인간들만 만들어질 것이다.

오히려 이 문제는 유불리에 따라 입장차이가 분명하게 나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험능력주의’로 수혜를 보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담론 투쟁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아직 서문만 읽었을 뿐이지만, 장석준·김민섭의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유령들의 패자부활전>은 그런 관점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유리한 집단은 대략 상위 20% 정도의 엘리트 청년집단이다(‘20 대 80 사회’라고 했을 때의 20을 임의로 잡은 것임). 그들은 중산층 가정 출신의 ‘인 서울 대학’ 학생들로, 시험 능력주의 체제 하에서 나름대로의 경쟁력을 갖추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형이다. 현재의 시험 체제가 충분히 ‘공정’하게 잘 관리만 된다면, 각자 ‘노력’을 통해서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이들은 현상유지를 선호한다. 사법고시 부활이나 수능 정시 전형 확대 등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이는 시험-출세 루트를 몇 가지 더 만드는 것은 환영하지만, 근본을 알 수 없는 수시 전형이나 지역별 할당제 등 적극적 우대조치를 통해 하위 80%가 ‘불공정하게’ 자신들을 앞지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오늘날 능력주의 담론을 선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나는 이들의 목소리가 과대 대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이 보지 못하거나 못 본 체하고 있는 것은 상위 1%의 ‘진짜 특권층’이다. <시험 능력주의>에서 꽤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지점인데, 가령 고위공직자나 기업 임원진의 자녀들은 수능 따위로 대학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일찌감치 조기유학을 떠나서 미국 대학에 진학하거나, 국내에 남아 있더라도 국제학교나 특목고 국제반으로 진학해서 널리 알려져 있는 형태의 살인적인 입시경쟁을 비껴간다. 그들은 웬만하면 대학도 해외로 진학하는데, 간혹 유학에 실패하는 경우에도 국내 대학의 ‘국제인재 전형’ 같은 수시 전형을 통해 ‘손쉽게’ 국내 명문대에 진학한다. 역설적으로 상위 1% 부모를 둔 학생 들만이 전교조 류의 ‘진보적 교육이념’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다양성 교육의 수혜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조국 사태’의 주인공이었던 조민 씨는 좀 특이 케이스인데, 상위 1%의 가정환경을 타고 났는데도 어울리지 않게 한국 학생들(?)처럼 로스쿨이나 의전원 진학을 노리다가 허위 스펙이 들통나서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조민 씨의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상위 1% 특권계급 자녀들은 학창시절부터 온갖 거창한 인턴십과 논문 작성을 비롯한 다양한 비교과활동을 경험하며 ‘창의적인 인재’로 거듭난다(물론 딱히 진실한 활동들은 아니다). 사실 그건 미국식 입학사정관 제도에서 권장하는 유형의 활동들로, 원래 유학 준비 루트다. 만약 그녀가 한동훈 장관의 딸처럼 무난하게 미국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다면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자들은 그런 류의 ‘진짜 특권’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 몫’인 전문직-1차 노동시장으로 진입해오는 것에 대해서만 적대적이다.

정리하면, 한국적인 맥락에서 ‘능력주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상위 20% 청년집단의 세계관으로, 기본적으로 하위 80%로부터 자신들의 특권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 논리이지만, 조국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잠재적으로는 상위 1% 특권층을 향한 공격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자의 속성은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어렵고, 하위 80%와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나는 이 논리가 한국사회의 개혁 담론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능력주의 담론의 범사회적 유행은 단지 한국사회의 평균적인 시선이 지나치게 상향 평준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언론이든 사회과학이든, 하위 80%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의 ‘담론 투쟁 구도’가 (20 대 80도, 1 대 99도 아닌) ‘1대 19 대 80’로 삼분되어 있다고 볼 때, 80%의 목소리가 너무 작다.

다시 선발제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좋은 시험이라는 게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보자. 시험은 결국 존엄한 개개인을 국가나 사회가 일방적으로 측정하고 평가해서 위계적으로 재배치하는 메커니즘이다. 그러니까 소중한 개개인의 가능성과 역량을 북돋아주는 ‘좋은 시험’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고, 대신 ‘좋은 사회’가 있을 수 있겠다. ‘좋은 사회’는 말하자면 시험-통과자들만큼이나 시험-불합격자들의 목소리와 견해가 존중받는 사회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통과자들보다 불합격자들과 패배자들의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역사를 바꾸고 인류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온 것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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