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유명한 페미니스트 저술가 벨 훅스의 페미니즘 입문서이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해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읽어보았다(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벨 훅스의 또다른 저서 『페미니즘 – 주변에서 중심으로』를 읽은 바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대강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의외였던 것은 이 책이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페미니즘 입문서 중 하나임에도, 기성 페미니즘에 대해서 시종일관 집요하게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적이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임을 분명히 하면서, 페미니즘의 다양한 얼굴들 중 다른 정체성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과격한’ 부류는 사실상 ‘착취와 억압’에 동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급진적(radical)’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벨 훅스는 60년대 이후 미국 여성운동사의 맥락을 지속적으로 참고하면서, 여성운동이 ‘백인-특권’ 계층의 탈정치적 라이프스타일 운동 내지는 계급 정치적인 맥락을 탈각한 중산층 이권수호 운동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한다. 저자가 개입하는 방식은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 페미니스트들의 ‘유리 천장’에 대한 문제제기는 백인 중상류층 이상의 전문직 여성이, 같은 계급의 남성과 동등해지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인 것 아닌가? 그들이 외치는 페미니즘의 구호 안에, 흑인 여성들이 종사하고 있는 저임금 노동에 대한 고려는 반영되어 있는가? (물론 저자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여성 권리 신장에 대한 기여를 충분히 존중한다) 저자가 보기에 ‘성차별주의로부터 기인한 착취와 억압’을 내면화하고 수행하는 것은 생물학적 남성만이 아니며, 페미니즘은 운동 이념으로서 적을 분명히 하고 불필요한 내부갈등을 최소화하여 실질적인 성차별주의의 해소에 힘써야 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제기는 다분히 활동가적이고 전략가적인 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페미니즘의 외연을 최대한으로 넓혀서, 최대다수가 페미니즘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입문서’로 기획된 이 책에서 남성, 동성애자, 유색인종, 노동계급은 물론, (흔히 페미니스트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것으로 생각되는) 가족과 심지어 기독교에까지 손을 내미는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저자의 이런 운동가적 태도는 성차별주의 혁파의 중요성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그야말로 진정성 넘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정체성 정치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적 통로가 ‘교차성’이라고 할 때, 저자는 교차성이란 서로 다른 정체성 간의 최대공약수(교집합)가 아닌 ‘최대공배수’(합집합)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만 이렇게 페미니즘 정치의 외연을 최대치로 확장할 경우 페미니즘 정치의 고유성이 훼손되고 흐릿해질 수 있다. ‘다양성’이라는 이름 하에 너도 나도 페미니스트를 자처한다면, ‘페미니즘 아닌 것’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가릴 것인가? 여타의 사회운동 이념들과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것은 어느 지점이며, 왜 페미니즘이 그 대표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저자가 제안하는 대로 최대다수가 연대하여 ‘성차별주의’를 혁파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과제라고 할 때, 누구도 연루되지 않은 순수한 구조로서의 ‘성차별주의’를 상정하는 것은 과도한 추상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아닌지도 의문이다. 가령,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반드시 자동적으로 ‘성차별주의’의 혐의로부터 면제되는가?

내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아무리 그 외연을 확장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 올바르게 전유한 ‘몸(신체)의 정치학’이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핵심은 저항의 처소로서 ‘몸’의 복권이며, 이 사실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면서 계급 문제를 과도하게 끌어안으려고 하면 페미니즘은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여기서 몸도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또다시 거대한 ‘고체적인’ 구조와 싸우려고 하는 건 반칙이다). 그리고 ‘몸’에 대해 사유할 때 과도하게 생식기관에 집착하는 것도 버려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서 장애정치와 동물(나아가 무생물)정치이다.

조금 논쟁적일 수 있지만 조심스럽게 더 나아가 보자면, 나는 남녀 임금격차 문제나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 또는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빈곤의 여성화 등은 페미니즘의 의제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근대적 시민권의 의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서로 사회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무려 페미니즘 씩이나 동원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페미니즘은 세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불온하고 급진적이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PC)의 문제는 그야말로 개인 간의 에티켓 혹은 상냥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페미니즘까지 동원하는 것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사회 운동끼리도 비교우위에 입각한 분업이 필요하다. 페미니즘이 잘 다룰 수 있는 것은 보다 신체적이고 미시적인(그래서 더욱 급진적인) 차원의 문제들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의 불구화 된 몸, 환자의 병든 몸, 가축의 고기화 된 몸, 나아가 무정물의 몸(생태계)이 마땅히 부여 받아야 할 ‘권리’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 뿐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 글 중 <짐을 끄는 짐승들> 서평 참고). 반대로 남녀 임금격차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거나 보육시설을 확충하여 여성에게만 전가된 육아 부담을 경감하는 것은 페미니즘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회 민주주의적인 복지정치 구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벨 훅스가 시도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이 무리하게 모든 문제를 떠안으려고 하면 정작 페미니즘이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할 ‘몸’의 정치학이 주변화될 우려가 있다. 이것은 페미니스트와 사회민주주의자가 서로를 지지해선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둘은 긴밀히 연대해야 한다). 두 문제는 얼마간 겹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최소한의 개념적인 직역 분리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상 같은 목표를 가지고도 서로 반목하기만 하는 작금의 작태가 안타까워서 해보는 소리다. 내가 여기다 올려봐야 바뀌지도 않을 것이고 이미 늦은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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