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우 外, <추월의 시대>를 읽고

한국은 후진국인가?

 

한국정치는 논평자들에게 너무나 많은 근현대사 지식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 근현대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합의된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논평자들은 합의된 적조차 없는 역사에 대해서 입장을 밝힐 것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입장을 섣불리 밝혔다가는 좌빨아니면 수꼴로 낙인 찍힌다. 민주화 세대를 긍정하기 위해서 주사파까지 긍정할 것을, 산업화 세대를 긍정하기 위해서 유신헌법까지 긍정할 것을 강요받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합의된 적이 없다는 것은 근현대사의 두 당사자인 산업화 세대민주화 세대에게만 그렇다. 이 책의 저자들인 80년대생을 포함한 2030세대는 당사자가 아닌 후세대로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여유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서로의 역사적 성과와 의의를 인정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며 대화조차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하라는 식의 도덕주의적 훈계는 식상하다. 이 책은 훈계를 반복하는 대신, ‘제대로 질문함으로써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새로운 지평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추월의 시대』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역사인식이 결국 단순한 비관론으로 수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1~5장에 걸쳐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개발도상국의 국민으로서 선진국을 모방하고 뒤따라가야만 하는 추격의 시대를 살았다. 각자가 선망하는 선진국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세력은 모두 망국(亡國)’을 앞당기는 불순세력에 불과했다. 90년대 이후에도 산업화 세대에게는 미국과 일본이, 민주화 세대(86세대)에게는 유럽 좌파 정당이 당연히 따라야 할 모범으로 여겨졌다. ‘선망국(羨望國)’과 점점 멀어지는 듯한 한국의 현실을 두고 이들은 비관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은 비관론을 떨쳐 내기 위해 먼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역사의 전면에 섰던 시절 내내 늘 존재했으며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광범위한 중도파의 존재를 들어 어쩌면 극단적인 두 서사(산업화와 민주화)가 소수 전위그룹의 엘리트주의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직선제 개헌 이후 실시된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된 것이 김대중-김영삼의 분열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은 86그룹의 해석일 뿐이다. 노태우가 당선된 것은, 군부정권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민주화세력을 온전히 지지하지도 않았던 중도파의 결정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중도파는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긍정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후세대인 우리가 이제 와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당대의 엘리트들인 고위 경제관료와 운동권, 둘 중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감정이입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이 책은 코로나-19 방역 성공을 기점으로 한국이 추격을 넘어 추월의 시대로 진입했으므로, 개발도상국 시대의 추격에 익숙한 이들의 비관론은 시대착오임을 역설한다. ‘민주화 대 산업화의 구도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을 진단하는 것은 왜곡이며, 이 구도는 추월의 시대에 걸맞도록 비관론 대 낙관론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세계화의 현실 속에서 한국은 객관적으로 선진국에 속한다고 낙관해도 좋다. 이것은 중도파와, 문화적 열등의식이 없는 80년대~90년대에 출생한청년세대에게는 이미 꽤 익숙한 시각이기도 하다.


더 이상 뒤따라갈 롤 모델이 없는 추월의 시대, 열등감을 걷어내고 한국사회가 새롭게 마주한 과제는 역시 일자리문제. 7장은 노동시장의 문제를 한국의 산업환경과 연관해서 참신하게 진단하고, 8장은 공채 축소민간-공공부문 간 이직 활성화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 책이 제시하는 각론은 보다 면밀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하나, 시대착오를 걷어내고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는 총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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