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프로보커터』 - 김내훈

‘프로보커터’는 주목경제(Economics of attention, 마이클 골드하버) 시대의 산물이다. 인터넷 세상 속에서 정보는 무한에 가까운 반면, 소비자의 ‘주목(관심)’은 한정되어 있어 어떻게 해서든 소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이 주목경제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주목경제’는 소비자의 눈길 한번이 실질적인 ‘장사’의 의미를 갖는 시대를 표상한다. 프로보커터는 주목경쟁을 위해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엽기적인 퍼포먼스나 특정 집단에 대한 황당무계한 도발을 일삼는 인플루언서들, 그 중에서도 모종의 정치적 색깔을 가미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전위적인 문화적 퍼포먼스를 통한 정치적 저항은 원래 좌파문화정치의 기획이었다. 그러나 위반의 쾌락 자체를 동력으로 하는 이들의 전략은, 시대가 변하면서 미학적으로 식상해지면서 탈정치화 되었고, 특히 주목경제 하에서 일종의 장사수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문화적 ‘선 넘기’는 극우파에 의해 악질적으로 전유되기도 한다. 이는 ‘좌파 문화정치전략의 탈정치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사유의 외주화(밈화)’ 때문이다. 정보량이 폭증하면서 주요 소식이나 정보를 간단하게 요약 정리한 뉴스레터나 디지털 큐레이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식은 복잡한 사고과정 없이 한 두개의 이미지로 단순화되었고, 문제의 원인은 손쉽게 의인화되었다. 이 모든 상황이 ‘우파 프로보커터’의 등장에 더없이 좋은 상황임은 물론이다.

 

저자는 전반부에서 주목경제 시대의 문화적 변동을 무난하게 개괄하였지만, 후반부에 진중권-서민-김어준을 한국형 프로보커터의 예시로 들면서 책의 완성도를 훼손하고 말았다. 서민은 애당초 논평에 값 하지 않는다. 저자도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가 ‘게으른’ 프로보커터라고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서민의 발언에는 ‘프로보커터’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도, 선정성도 없다. 괴상한 주장을 하는 영향력 없는 모든 개인을 프로보커터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프로보커터라는 개념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서민의 발언이 특별히 ‘선정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본인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진중권 역시 최근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가 최근 보이고 있는 행보는 ‘본인이 심술이 나서 부리고 있는 나이답지 못한 어리광’에 가깝다. 진중권이 선정적인 의제 선정을 통해 반지성주의나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여전히 PC(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단지 정부여당을 맹렬하게 비판(때로는 감정적으로 비난)하고 있을 뿐이다.

 

김어준이 퍼뜨리고 다니는 음모론과 유언비어는 비판해 마땅하지만, 그 비판은 김어준을 ‘언론인’으로 볼 때에만 유효하다. 김어준은 언론인이라기보다 민주당의 ‘정파적 해설가’에 가깝다. 저자가 적절히 평가했듯, 민주당은 나꼼수 시절부터 진흙탕 싸움을 그에게 ‘아웃소싱’해 왔다. 그러니까 그는 민주당 대변인이지, 프로보커터가 아니다. 일례로 김어준은 초기 국면부터 ‘친문 유권자’들을 달래 가며 이재명을 포용하려고 했다. 김어준이 프로보커터였다면 ‘이재명은 반문이니 쳐내야 한다’는 극단적인 친문 유권자들의 입장에 편승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당’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처럼 김어준은 철저히 민주당의 입장에 입각해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정당인에 가깝다.

 

김어준을 프로보커터 리스트에 넣어서 기계적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책을 통해 저자의 정치적 입장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자가 무리하게 서민과 진중권을 프로보커터로 본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프로보커터라는 개념 자체가 아주 간단한 정파적 비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에서 ‘아모스 이’나 ‘이아노풀로스’ 같은 수준의 ‘상대할 수 없는 사이버 렉카’를 ‘프로보커터’라고 부르는 한, ‘프로보커터’라는 낙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정치적 비난이다. 진중권이나 서민 수준의 정파적 조롱과 비아냥을 모두 ‘용납할 수 없는 혐오’라고 보는 것은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다.

 

반지성주의는 특별히 21세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없고,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의 본질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모든 개인이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숙의 민주주의의 이상으로부터 출발하면, 반지성주의적인 ‘대중’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지성주의는 정치적 변혁의 출발점이지, 제거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이 출발점에서, 무페와 라클라우가 언급한 맥락에서의 ‘헤게모니적 접합(최대다수의 공통의제)’을 창출하여 급진민주주의를 재구성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

 

(진중권은 가짜뉴스, 혐오선동 등이 횡행하는 최근의 미디어 상황을 ‘탈진실(post truth)’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의 ‘주목경제’ 관점과 비교해봄직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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