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헤세의 <데미안>, 카뮈의 <이방인>,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다(알라딘 기준 1위 <데미안>, 2위 <이방인>, 3위 <인간실격>. YES24 기준으로는 1위가 <인간실격>, 2위 <데미안>, 그리고 <이방인>은 4위다.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이라고 한다). <데미안>이나 <이방인>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헤세와 카뮈는 어쨌든 둘 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데미안>이나 <이방인> 자체도 이른바 서구식 부르주아 교양주의 정전 목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사실 그래도 <데미안>의 인기는 좀 이상하다. 헤세 작품 중에서 서구에서 더 많이 읽히는 작품은 <황야의 이리>나 <싯다르타>이고,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은 대작인 <유리알 유희>다.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세를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시인에 가깝다).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데미안>의 결말은 좀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데미안>의 한국에서의 인기는 소개자였던 독문학자 전혜린의 요절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런데 <인간실격>은 세계문학전집 수록 작품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우울하고 자기 파괴적이다. 그 배경은 무려 음습하기 짝이 없는 전후 일본이며, 주인공이 여성편력과 약물중독으로 폐인이 되어가는 과정은 여러모로 다수 독자들에게 권장할만한 서사는 못된다. 실존주의에 심취한 문학청년들이 인생의 한 시기에 열광할만한 소설이긴 하지만 연간 평균 독서량이 5권이 안되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소설이 <인간실격>이어야 할 이유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이 우울한 전후 무뢰파 소설의 한국에서의 인기는 분명히 유별난 구석이 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판매량 순 정렬 화면 (알라딘)

그렇다면 한국독자들은 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작품 바깥의 몇 가지 이유들이 얼른 떠오른다. 먼저 <인간실격>은 짧다. 이건 <데미안>과 <이방인>도 마찬가지다(세 권 모두 민음사판 기준 300페이지가 안된다). 여전히 세계문학전집은 한국사회 교양의 표준이다. 작품 자체의 객관적인 가치나 독서의 난이도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에 수록된 작품은 일반인들에게 ‘고전’ 대우를 받으며 소위 ‘어려운 책’ 내지 ‘도전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런 책이 길기까지 하면 사람들은 그 책에 손을 대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실격>의 인기는 무엇보다 (그 내용과 달리) 덜 부담스러운 분량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다른 이유는 에곤 쉴레의 그림이다. 에곤 쉴레의 그림들은 문학 책 표지로 인기가 많은데, 특히 민음사판 <인간실격>의 표지로 사용된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은 펭귄판 <말테의 수기>, 문예출판사판 <구토>의 표지로도 쓰일 정도로 인기있는 표지그림이다. 게다가 제목도 ‘인간 실격’이라니, 힙하지 않은가! ‘인간실격’이라는 저 단호한 네 글자 제목은 에곤 쉴레의 자화상과 어우러져 묘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이 정도로 멋진 디자인이라면 꼭 읽지 않더라도 한권쯤 집에 사두고 싶다. (제목이 섹시한 또다른 인기소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이 책을 읽지 않고도 그 구절을 인용하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자주 목도한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일본 작가’라는 출판사의 마케팅도 한 몫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책의 외양은 어딘지 반항적이고 저항적인 청년-단독자를 연상시킨다. 꼰대들에게 ‘너희들은 인간 실격이야!’하고 당돌하게 선언하는 젊은 지식인이 책의 주인공일 것만 같다. 하지만 실제로 소설 속 ‘인간 실격’이라는 말은 무기력한 주인공의 자조적인 ‘패배선언’일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 식의 실존주의를 기대하고 책을 펼쳐 든 독자는 허위광고(?)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이 책에는 아무런 희망도 교훈도 실존주의도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속물교양주의나 매력적인 디자인과 성공적인 마케팅만으로 어떤 책이 지속적인 인기를 누릴 수는 없다. <인간 실격>에 대한 유난스러운 열광(의 지속)은 작품 자체의 고유한 힘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

<인간 실격>의 핵심 정서는 ‘부끄러움’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부끄러움은 주로 다자이 오사무의 개인적 삶과 관련 지어 이해된다. 공산주의 동지들을 배신한 것, 집안의 기대를 배신한 것, 그리고 연인과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은 <인간 실격>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 기둥이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견디기 위해 주인공 요조는 어린 시절부터 의식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타인들과 융화되고자 했다. 그 방편으로 ‘익살’을 연기한다. 작문이란 ‘익살꾼의 인사말 같은 것’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유려한 글은 요조의 위장된 자아인 반면, ‘익살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한’, ‘(도깨비) 그림’은 (표지 그림인 에곤 쉴레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요조의 진정한 내면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작품 후반부에서 요조가 생활의 방편으로 삼류만화나 춘화를 그리게 되는 것은 진정성에 대한 최대한의 조롱이다.

인생에 대한 이런 식의 냉소와 조롱은 작품 속에서 몇 차례나 반복된다. 가령 요조는 자신이 처음으로 애정을 느낀 여성 쓰네코를 친구인 호리키가 범할 것을 걱정했는데, 정작 호리키는 쓰네코를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 취급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두번째 여성인 시즈코와 유사 가정을 이룬 뒤 요조에게 ‘미약한 구원’이 되어 주었던 시즈코의 어린 딸 시게코는 요조를 ‘아빠’라고 부르며 잘 따르는 듯했으나 실은 ‘진짜 아빠를 갖고 싶어’하는 또 다른 타인에 불과했다. 요조는 세번째 여성 요시코에게서 ‘더러움을 모르는 처녀성의 숭고함’을 보고 기대를 걸어보지만 이내 요시코가 볼품없는 사내에게 겁탈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물론 작가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한, 쓰네코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가 요조가 혼자만 살아남은 에피소드가 이 모든 조롱의 중심을 잡고 있다. 이 기묘한 일화는 기본적으로 비극이지만, 상황 자체는 다소 희극적이고 장난스럽게 느껴진다. 묘사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다. 특히 요조가 자살방조죄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대목에 대한 묘사는 확실히 장난 조다. 요조는 능청스럽게 ‘입신에 가까운 연기’를 펼치고, 경찰관들은 요조에게서 병이 옮을 것을 걱정하며 ‘전화기 소독’에만 신경 쓴다. (쿤데라의 <농담>에도 작가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인생과 운명에 대해 장난조로 냉소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죽으려고 먹은 약이 실은 설사약이었다고 설정함으로써 비극적이고 장엄한 여주인공의 자살시도를 가볍게 비웃어버린 것. 물론 인생 자체가 장난 같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리고 나 자신도 꽤나 냉소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죽고 사는 문제를 순식간에 화장실 유머로 만들어 버리다니, 하고 뜨끔했던 기억이 <농담>을 읽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 것이 바로 쿤데라 문학의 스케일이다.)

그런데 <인간 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개인사에 인생에 대한 냉소를 적당히 버무린 것에 불과했다면 이 작품은 그저 그런 사소설에 머물렀을 것이다. 여기서 작품은 조금 더 나아간다. 주목할 것은 종교적인 차원이다(역자는 <인간 실격>과 함께 다자이 오사무의 기독교 소설인 <직소>를 합본하여 이런 해석을 유도하고 있다). 역자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근대 문인들 중에서도 기독교를 가장 가까이했던 작가였다. 그렇다면 요조가 호리키와 주고받은 ‘단어 놀이’의 어떤 대목이 의미심장하게 다시 읽힌다. ‘죄의 반의어’는 무엇인가?

이 수수께끼 같은 상념에 대한 기독교적인 답은 구원이다. 기독교 교리 상 인간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고, 이 원죄의 속성으로 인해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러니까 요조가 ‘죄의 반의어’를 가지고 골몰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모색에 다름 아니다. 요조는 기도, 회개, 고백이 모두 ‘죄의 유의어’에 불과하다며 구원에 이르는 방법 후보군에서 기각한다. 요조는 요시코에게 ‘배신’당한 뒤로는 ‘신뢰는 죄인가요?’하며 믿음 역시 차라리 죄에 가까운 것 아니냐고 신에게 따져 묻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요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힌트를 얻고, 죄의 반의어가 ‘벌’일 수도 있겠다며 솔깃해한다. 처벌 자체가 구원의 과정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요조는 여기서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지만 이때 작가는 ‘벌받는 자’로부터 구원의 형상을 그리고자 한다. 이는 작품 말미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자’ 요조로부터 ‘하느님의 형상’을 본 마담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요조는 러시아 소설식으로 말하면 ‘유로지비’같은 존재이며, 그에게서 ‘신성(divinity)’을 봐야 한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인 것일까.

이쯤 되면 서두에 등장하는 석 장의 사진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앞서 글과 그림이 대조된다고 했다. 특히 요조 자신이 보는 스스로의 내면은 도깨비 그림처럼 기괴하고 일그러진 것이다(‘인간 실격’).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도깨비 그림은 다시 기이한 분위기를 발산하는 요조의 사진들과 대조된다. 사진은 객관적 진실성의 예술이다. 요조의 사진에 대한 화자의 감상(‘섬뜩하고 으스스한 기운’의, ‘눈을 뜨고 다시 봐도 생각나지 않는’, 기묘한 얼굴의 남자)은 초월적인 존재자를 마주한 인간의 감상과 닮아 있다. 독자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바로 이런 ‘퇴폐 속의 신성’이야말로 <인간 실격>의 고유한 힘이며, 그것이 소설에 대한 열광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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