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2): 식민지-근대, 전장연, 일베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 윤해동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윤해동은 임지현과 함께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며 2000년대 국내 인문학계에서 ‘탈민족주의 논쟁’을 주도한 역사학자이다. 이것을 한국 인문학계의 (구소련 몰락 이후 운동권 좌파와는 또다른 방식의) ‘포스트 모더니즘’ 수용사례로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윤해동은 ‘식민지-근대’라는 개념을 통해 국사학계의 ‘식민지 근대화론’ 대 ‘내재적 발전론’의 이분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양자는 모두 민족주의 대 반민족주의 틀에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근대주의적 편향을 가지며, 한국사회가 오늘날까지 유독 ‘원초주의적 민족주의관’에 몰입하고 있는 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저자가 보기에 근대는 언제나 식민지-근대이며,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야말로 철저히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3.1운동과 같은 식민지기 저항운동은 ‘대중’ 및 ‘공공성’과 같은 근대의 산물인데, 그 근대의 산물은 거꾸로 제국의 식민통치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는 조선에 ‘억압의 유산’과 함께 ‘저항할 무기’(근대성)를 동시에 남긴 것이 된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봐도 명확해진다 – 현재까지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조선에 대한 이미지는 일본 제국주의 군복을 입은, ‘가해자’ 및 ‘동조자’로서의 조선이다. 국민들로 하여금 피해자로서의 도덕적 우월성에 지나치게 몰입하도록 하는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는 저항을 특권화 하여 식민지기의 복잡성을 단순화한다. 대표적으로 국내정치에서 ‘친일 대 반일의 이항대립 구도’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폭력적인 신념윤리적 레토릭을 재생산하는데 이용되곤 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박헌영, 그리고 박정희를 검토한다.

출간된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이데올로기로서 민족주의의 강력함을 보여준다. 다만 저자의 ‘식민지-근대론’이 기존의 (경제사 기반인)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화사/심성사 버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게다가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내재적 발전론이 얼마나 ‘근대 역사학 일반’과 닮아 있는지(그것에 기초해 있는지)를 설명한 다음, 그 ‘근대 역사학 일반’의 문제점을 이론적인 수준에서 열거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성실한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된다(일종의 반칙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자의 문제제기가 갖는 도발성과 현재성의 상당 부분은 시각의 참신함이 아니라 한국사회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논쟁적 성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휴먼』 - 주디스 휴먼, 크리스틴 조이너

이 책은 미국의 장애운동가 주디스 휴먼(Judith Heumann)의 자서전이다. 주디스 휴먼의 삶이 미국 장애운동의 역사와 겹쳐 있는 바, 그녀의 삶의 위대함과 한계는 곧 미국 장애운동의 의의와 한계이기도 하다. 먼저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민권운동사의 맥락 속에 장애 운동을 위치 지울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준다. 아무래도 국내에서 ‘장애운동’은 흑인인권, 반전‧평화, 환경 및 여성운동에 비해 덜 알려져 있을 텐데, 주디스 휴먼, 에드 로버츠 같은 장애 당사자 출신 장애운동가들의 이름을 이번 기회에 기억해두면 좋겠다. 주디스 휴먼이 가담한 수많은 투쟁 중에서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1977년 재활법 504조 서명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 점거 투쟁’ 과정에서 장애인 시위대가 흑인 인권 단체 ‘블랙팬서’와 연대하는 모습은 이 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들 중 하나다. 또한 장애 당사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위축감과 불안감도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휠체어에 태워진 채 타인에 의해 ‘들려지는’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인지는 정말로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이었다. 여성인 주디스 휴먼이 동료 남성 활동가 에드 로버츠에게 느끼는 미묘한 자격지심도 주목할 대목이다. 그녀에 따르면 같은 장애인 당사자였음에도 에드에 비해 자신은 여성으로서 항상 ‘과격하지 않아야’ 했다. 주디스 휴먼의 삶(몸)은 장애인 정체성과 여성 정체성이 교차하는 처소이기도 한 것.

그러나 주디스 휴먼의 삶은, 미국 특유의 사법 적극주의랄까, 최종적인 판단자로서 ‘법원’ 및 ‘행정 조직’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미국 장애운동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준다. 그녀가 교사면허 취득을 위해 소송을 벌이는 과정에서 보였던 법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나, 결국 그녀가 말년에 세계은행 및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에서 행정가로서 너무나 ‘흔쾌히’ 일했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녀는 또 한 사람의 ‘슈퍼 장애인’이었던 것은 아닌지. 요컨대 그녀의 삶은 위대할지 언정 전혀 ‘불온’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은 역시 올해 초부터 극심한 논란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연착 시위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읽을 수 없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는 내내 전장연 시위를 의식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일반 시민과의 갈등으로 치닫는 경우, 시위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느냐는 항의에 대해 활동가들은 어떤 논리로 대응해야 하는지. 책 속에도 도로 점거 시위로 교통에 불편을 초래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지만, 그로 인한 일반 시민과의 갈등 문제가 전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전장연이 시민들을 ‘볼모’로 잡아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달라고 ‘협박’하고 있다거나, 시위에는 ‘적절한 방식’이 있으므로 지하철을 ‘점거’하는 방식은 ‘비문명적’이라는 이준석의 언설. 언론 노출을 즐기는 어느 유명 대학의 (무려 인권을 전공한다는)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 동조하며 이런 주장에 시민권을 부여한다. (물론 그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력 부족으로 인해 그다지 영향력은 발휘하지 못하지만.)

S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의 페이스북 게시글

길게 말할 것 없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탈시설’과 ‘이동권 투쟁’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다. 지하철 연착 시위를 통해 전장연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일반인들이 일상 속에서 최소한 장애인 인구에 비례하는 정도로 장애인을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저마다 세상 밖으로 나올 경우 지금처럼 지하철이 ‘연착’될 만큼 장애인 이동권이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은 장애인들이 모두 ‘시설’에서 거주하며 지역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어 일반인들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장연의 시위로 인한 지하철 연착 현상은 기본적인 이동권조차 보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지금 당장’ 어우러져서 살아갈 경우 벌어질 일들에 대한 ‘확인’일 뿐이다.

나 역시 3호선과 4호선을 거의 매일 타고 다니다 보니 지하철 연착으로 인한 불편을 실제로 경험해봤다. 불편으로 인한 짜증은 감정적 진실이지만, 논리적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 일반 시민은 짜증낼 수 있지만,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그 주관적인 짜증을 객관적 논거가 되는 것처럼 승인해주는 것은 잘못이다. 마치 자신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듯이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이들이 몹시 가증스럽다.

 

『보통 일베들의 시대』 - 김학준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나에겐 좋은 공부가 되었다. 나보다 약 5년~10년 정도 앞선 세대한테는 커뮤니티 문화가 상당히 친숙한 것으로 보인다 – 예를 들어 이른바 ‘청년 논객’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인물들은 대부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키보드 배틀’을 하며 필력을 길렀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나는 대학에 오고 나서야 시간표 짜려고 ‘에브리타임’이라는 앱을 통해 커뮤니티 문화를 처음 접했고(생각해보니 그 이전에 입시 커뮤니티 ‘오르비’도 있긴 했다 – 하지만 회원가입까지 한 커뮤니티는 여전히 에브리타임이 유일하다), 개인적으로 인터넷 공간에 게시글은 물론 댓글도 거의 달지 않는 편이라 커뮤니티에서 익명의 제3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심지어 요즘은 게임할 때도 상대방과 음성으로 대화를 한다 던데 나는 잘 모르는 일이다).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나의 원칙은 올바른 문법과 완성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애써 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거기서 주고받는 논의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한심하기도 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소모가 심해서다. 물론 나는 여러모로 세대 대표성이나 성별 대표성이 별로 없는 표본이긴 하다.

저자에 따르면 남녀갈등과 능력주의 등 현재 공론장에서 가장 화끈한 주제들의 기원은 일베다 – 혹은 그렇게 볼 때 어느 정도 정합적으로 설명이 된다. 특히 복수의 커뮤니티에서 진보(루리웹)와 보수(일베)를 막론하고 ‘여성혐오’만큼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보면,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얼마나 신선했을 지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저자가 제시하는 가설은 ‘평범 내러티브’다. 구구절절한 후기 근대론(바우만, 일루즈 등등)과 문화연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좋아하지 않는데 또 읽었다) 굳이 정교하게 요약할 생각은 없으나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청년들이 갈망하는 ‘평범’의 준거는 산업화 세대가 살았던 가부장적인 ‘정상가족’의 삶이다(바우만의 표현으로 ‘고체 근대’).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다 보니 불안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마침 현대사회에서는 공적인 것이 사적인 것에 의해 침식당해 있다 보니 그 분노를 공적 연대로 승화시킬 수도 없다. 결국 청년들은 ‘평범’해지기 위해 최대한 ‘나대지 않으려고’ 하고, ‘별것 아닌 일’은 낄낄대며 웃어 넘기려고만 한다. 그들이 보기에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문제 삼고 항의하는 이들은 ‘공정한 절차’에 순응하지 않고 떼를 써서 무임승차하려고 하는 비이성적인 선동가들이 된다. 저자는 대충 이런 내용을 문화사회학과 감정사회학 이론들을 동원해서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나는 늘 문화사회학의 ‘용어’들을 가지고 분석을 과대 포장하려고 하는 것에 불만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읽어 넘겼다.

오히려 이 책에서 나에게 흥미로웠던 것은 데이터 분석이다. 저자는 사회학 석사 학위 소지자로 민간기업에서 데이터 분석가로 일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이 책의 2장은 통째로 텍스트 분석에 할애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빅데이터 분석을 어떻게 사회과학 연구에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의 2장은 그 사례로 유용하게 참고할 만하다. 다만 그렇게 얻어낸 분석의 결과물이 기존의 일베에 대한 분석과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텍스트 분석이 어느 정도까지 사회과학 연구에 '새로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분석에서 사용된 ‘토픽모델링’ 기법은 일베 게시물 제목에 나타난 특정한 혐오표현이 어떤 주제로 분류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데,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혐오 표현의 유형별 출현 빈도 뿐이다. 그리고 텍스트 데이터의 경우 사람에 의한 ‘데이터 라밸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주관성이 완전히 배제된다고 할 수 있는지도 문제제기가 가능할 것 같다.

결국 이 문제는 만물일베설 대 일베루저론 중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지로 귀결된다. 이제는 더 이상 저자가 규정하는 의미의 ‘일베적 멘털리티’를 일시적인 일탈 혹은 소수의 난동으로 주변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책의 뉘앙스가 묘하다. 저자는 ‘만물일베설’에 가까운 입장이긴 한데, 그렇다고 ‘일베적인 것’으로부터 우리 공동체가 경청할 만한 어떤 요소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베루저론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일베’에 ‘고여 있던’ 분노와 불안이 사회로 ‘퍼져 나왔다’는 맥락을 추가해서 오늘날 이른바 ‘이대남’ 문제를 ‘일베적인 것’의 ‘제도적‧공식적 출현’으로 진단하는 것이 작금의 성별 갈등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사실 매우 호전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나 저러나 여전히 나는 인터넷 시대에 새롭게 창출된 ‘사이버스페이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솔직히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도 않고 그 맥락과 역사도 잘 모르기 때문에(이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다) 사실 뭐라고 평가하기가 난감한 입장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차라리 그런 맥락 없이, 오가는 주장들을 있는 그대로 두고, 공론장에서 퇴출될 것은 퇴출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는 것이 보다 민주적인 자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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