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4): 한국 고대사, 뇌과학, 한일관계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 역사학자 모임

여전히 <환단고기>류의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적어도 내가 속한 세대는 더 이상 민족주의에 대한 강박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내 입장에서는 반일과 민족통일을 자꾸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의심스럽다(NL?). 보다 못한 ‘젊은 역사학자들’이 나서서 ‘환빠’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유사역사학 비판이 큰 줄기지만, 고조선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발해까지 고대국가들이 골고루 다루어지고 있어서 한국고대사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부터도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시간에 고조선의 위만과 발해의 대조영이 중국계가 아닌 조선(고구려) 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 백제는 요서 지역까지 진출했던 해상강국으로서 특히 왜나라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다는 점, 삼국통일 과정에서 나당전쟁의 의의(민족자주성!) 등을 힘주어 암기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개별 논점들의 맞고 틀림을 떠나서, 그런 것이 왜 중요한 논점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에서부터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사역사학은 사실 고대사가 아니라 근대-국가적인 욕망의 문제다(전세계 어디서나 그렇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짚고 있듯이 한국의 유사역사학은 그 출발부터 유신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로서 북한의 주체사상에 대적하기 위해 기획되고 장려되었던 것이다. 저자들은 그 근저에는 쇼비니즘이 자리하고 있다고 적절히 지적한다.

한국고대사에 대한 후속독서를 자극하기에 좋은 책이다. 기억에 남기기 위해 몇 가지만 정리해보려고 한다. 유사역사학의 주요 전선 중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신라와 백제를 사실상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일본 역사가들이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논거였다(임나일본부=고대판 ‘조선총독부’). 이것을 체계화한 것은 동경제국대학의 스에마쓰 야스카즈인데, 그는 <일본서기>와 함께 광개토왕비와 칠지도를 근거로 들어 임나일본부설을 체계화했다. 여기에 대한 민족주의 사학의 반박은 김석형의 ‘분국설’과 천관우와 김현구의 ‘주체교대론’이었다. 분국설이란 일본역사가들과 동일한 사료를 가지고 해석만 정반대로 뒤집은 것으로, 일본이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국가들은 한국고대국가들의 일본 내 ‘분국’이었으며 <일본서기>의 기록은 오히려 한국이 분국을 두어 일본을 경영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보았다. 북한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분국설을 지지하고 있다. 주체교대론이란 임나 지배의 주체가 왜가 아니라 백제였다고 보는 것으로,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가야 지배를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주체교대론은 <일본서기>의 기록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자신들의 선조가 한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최근 학계는 구체적으로는 조금씩 이견이 있지만,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는 없고, 일종의 외교사절 성격의 기관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 일본과의 역사갈등 요소라면, 발해사는 중국과의 갈등요소다(동북공정). 그런데 중국의 발해사 인식(동북사의 ‘발명’)은 20세기 초반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었다. 일본은 만주침략을 시도하면서 만주 지역의 역사를 중국으로부터 분리하고 조선의 역사를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다(만선사관). 이에 푸스녠과 진위푸 등 중국 역사학자들은 일종의 저항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만주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동북공정의 기원은 일제에 맞선 중국의 방어적 민족주의였다. 20세기 (반)식민지 국가의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야말로 적과 싸우다 보니 적을 닮아간 대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 브레인』 - 데이비드 이글먼

대중성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다. 개인적으로 뇌 과학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왜 뇌과학이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뇌 과학은 개인의 정신 건강관리 및 자기계발이나 처세술의 차원에서 활용해볼 여지가 많다. 가령 이 책 전체의 화두는 ‘뇌 가소성(plasticity)’이다. 뇌란 그 속성상 상황과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해간다는 의미다(livewired, 생후배선). 인간의 뇌는 미완성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환경과 사후학습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뇌의 적응력은 놀라운 것이라서, 뇌 조직이 물리적으로 손상되는 경우에도(알츠하이머, 파킨슨 등) 인지능력은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 부단히 머리를 굴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 치매예방에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한 얘기였다.

뭐든 자꾸 연습하다 보면 익히지 못할 기예란 없다는 자기계발론적인 교훈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내가 새로이 시도하고 평소에 하지 않는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거듭할 때 뇌에는 새로운 회로가 깔린다. 특정한 능력을 연마하고 싶다면 처음엔 좀 힘들어도 연습할수록 점점 나아지게 되어있다(뇌과학을 믿고 정진!). 이걸 마약중독자나 범죄자들에게 활용해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곱씹어볼 만하다. 마약중독자들이나 범법자들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순간적으로 자제하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훈련을 통해 이들의 뇌에 ‘자제 회로’를 만들어주는 것이 그들을 단순히 가두어 두는 것보다 효과적인 교화책이 된다는 것이다. ‘몰입’에 대한 이야기도 유익하다. 어떤 ‘솜씨’(이것이 무엇의 번역어인지가 궁금하다)를 발휘해야 하는 경우에, ‘의식은 구석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 최선’이다. ‘몰입’의 본질은 일종의 준-무의식인 것이다. 또 뇌는 다른 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한다. 따돌림을 당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와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동일하다는 대목이 재미있었다.

뇌과학은 철학적인 논의와도 맞물려 있다. 칸트가 일찍이 말하고자 했던, ‘우리는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고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이야기는 오늘날의 뇌 과학적인 감수성과 상당히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실재 세계는 무색 무취의 에너지와 질량 덩어리에 불과한데, 우리의 신경회로가 그것을 이리저리 해석해서 각자에게 ‘상영’해준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거의 공상 과학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 MIT의 승현준 교수가 주도하고 있는 ‘인간 뇌 프로젝트’, 이른바 ‘커넥톰’ 연구는 뇌의 미세조직과 연결망을 거의 원자 단위로 재현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재현된 뇌는 ‘의식’을 가질 것인가? 의식을 정량화하고자 하는 신경과학자 줄리오 토노니의 연구도 흥미롭다. 뇌란 결국 신경세포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불과한 것인데,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복잡한 상호작용을 그 특징으로 하는 ‘도시’나 ‘개미 집단’은 ‘의식’을 갖는가? 줄리오 토노니는 ‘충분한 복잡성과 충분한 연결성의 완벽한 균형’이 이루어지면 의식이 ‘발생’한다고 본다. 생물학적인 유기체가 아니더라도, 토노니의 조건을 만족한다면 그 대상은 ‘의식’을 갖는다고 봐야 한다! 나도 모르게 읽다가 재미를 느끼고 말았다.

 

『신냉전 한일전』 - 길윤형

다사다난했던 ‘2018년 전후 국면’에 대한 생생한 비망록이다. 당시 한국정부는 북미회담을 중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에서 한일관계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북미협상이 결렬되자 외교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부의 외교는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북미협상이 ‘부디 성사되기를’ 바라는 ‘기도 외교’ 내지 ‘로또 외교’에 가까웠다.

문재인 정부 외교에는 특정한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 냉전 질서를 재구성하기 위해 일본의 협조는 불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재팬 패싱). 북한의 비핵화와 북미수교를 통해 동아시아 (신)냉전질서 자체를 극적으로 반전시키고자 한 한국정부는 현상-유지적인 일본을 방해세력으로 인식했다. 남북관계는 ‘민족 문제’이므로 ‘한민족의 침략자’인 일본은 이에 관여해선 안 된다는 ‘자민통스러운’ 세계관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압도했다.

마침 ‘한국도 이제 선진국이다’라는 식의 ‘K’ 담론이 부상한 것도 문재인 정부 시기였다. 한국의 국력이 일본을 거의 따라잡았으니, 더 이상 일본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으며 한국이 ‘일본 없이’ 북미수교를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김정은에게 지나치게 기대한 나머지 북한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자세를 보였고, 미국을 상대로 유례없는 ‘친서외교’를 펼치며 트럼프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일본은 트럼프의 쇼맨십에 당황하며 폼페이오 – 비건으로 이어지는 대북 온건파에 맞선 볼턴을 상대로 외교전을 펼쳤다. 이 구도에서 보면 북미 협상 과정은 한일 외교의 대리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위안부 합의 파기 시도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는 한일관계 악화의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 근본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시종일관 일본에 지나치게 무성의했다. 초계기 사건, 일본의 수출 규제와 지소미아 종료 선언, 전국적인 노재팬 운동까지 겹치며 한일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문제는 미중 패권경쟁이 맥락으로 깔려 있는 동아시아 지정학 구조 속에서는 그런 인식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문재인 정부 외교 실패의 원인은 북한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기보다 일본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을 수 있다. 한국의 국력이 달라진 상황에서, 한국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386 세대 정치인들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국력에 걸맞게' 보통국가화되고 싶다면, 이웃 국가인 한국에 대해서도 '국력에 걸맞는' 영향력과 지위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를 ‘패싱’해서는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평화체제의 구축을 위해 협력해야만 한다. 뻔한 얘기처럼 보이지만 뻔하지 않다 - 우리는 북한 문제를 논할 때 서로를 아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가 최근 번역한 와다 하루키의 <북일 교섭 30년>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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