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6): 장강명, 임명묵, 한윤형

<재수사 1, 2> - 장강명

홀수 장에는 살인자의 철학이 제시되고, 짝수 장에는 전형적인 사회파 추리소설이 펼쳐진다. 이 소설의 살인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신론자 캐릭터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을 대놓고 인용하고 있는 것에 비해서는 역시 무게감이 너무 떨어지고 얄팍하기만 하다. 홀수 장들의 톤 자체가 애매해서, 작가가 살인자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인지, 비난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되어있다(바로 그런 식의 중립성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가적 위대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 그런데 이 소설은 그걸 감안하고 봐도 살인자 묘사가 너무 어정쩡하다). 최종적으로 소설의 결론은 후자(살인자 비난)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렇다면 홀수 장들은 의도에 비해 너무 무게를 잡은 것처럼 보인다. 톤 조절 실패다. 애초에 작가의 강점인 ‘사회파’ 장르소설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관념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가 자신이 쓴 소설 중 가장 만족스럽다고 하기에 기대하고 읽었는데, 장르 소설적인 재미는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애초에 도스토예프스키를 서브 텍스트로 삼은 것 자체가 작가의 만용이 아니었나 싶다.

 

<러시아는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임명묵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를 어떻게 색다르게 비판할 수 있을까? 저자는 2020년대에 이르러 ‘신전통주의’로 역사가 ‘부활’했다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신전통주의의 지지자들이 주로 각국의 중산층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트럼피즘의 지지자들이 주로 백인 하층민들이라서 상황이 좀 다를 텐데. 한국만해도 ‘K담론’이랄지 선진국 담론처럼 애국주의라고 부를 만한 것의 지지자들은 주로 386 중산층 기성세대인 것 같다. 주변부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또다른 개념인 ‘탈식민주의’와 ‘신전통주의’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접근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재미있는 구도이지만 역시 서사가 너무 크고 성기다는 인상을 준다. 20세기 미국과 소련의 총동원 체제와 비서구국가들(터키, 이집트 등)의 세속주의적 근대화 모델을 모두 서구적 계몽주의의 후예들이라고 묶어버리는 것은 너무 거친 접근이다.

러시아와 관련해서는 타타르와 몽골의 지배 경험으로부터 러시아의 ‘동양적’(비서구적) 기원을 찾으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등 러시아 지식인들의 아시아 인식도 흥미로운 대목이다(주로 타자화의 대상이었다). 러시아 특유의 ‘아시아적 전제주의’ 기질은 스탈린 시대에 발현되었다가. 세속적(서구적) 근대화주의자들인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대에 지워졌다. 이 책을 통해 러시아 역대 지도자들에 대한 개략적인 인상도 가질 수 있다. 흐루쇼프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혹은 이상주의적 레닌주의자)로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쳤던 것이고, 고르바초프는 기이할 정도의 신념형 지도자였으며, 옐친은 쿠데타 세력을 제압할만큼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 계열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푸틴은 서구주의적 근대화를 경험하면서 누적된 러시아 기층의 불만을 등에 업고 등장한 러시아판 ‘신전통주의’ 지도자이다.

<상식의 독재> - 한윤형

한윤형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번 책은 너무나 난잡하다. 몇 가지 도식만 갖춘 채로 아마추어적인 탐구와 신변잡기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느낌이다. 굳이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표준압’(상식)에서 찾고, 그것이 전근대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한국인의 ‘종특’이라는 사실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논증하는 것이 책의 얼개이다. 그런데 정작 ‘상식의 독재’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고, 한국 전근대사와 현대 사이의 연속성을 (다소 아마추어적으로) 논증하는 데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어 읽다 보면 굳이 (전문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에 불과한) 저자의 언어를 빌려서 그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미야지마 히로시나 이철승, 이영훈의 책을 직접 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영훈의 “이 세상에 기적은 없으며, 다 있을 만한 일이 일어날 뿐이다.”라는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한국인들은 이미 벼농사 체제 하에서 ‘사회적 협업의 하부구조’를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에 효율적으로 동원될 수 있었고, 조선시대부터 이미 민족주의 개념을 흡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가 (다른 제국주의보다) 특별히 더 혹독했던 것이 아님에도 독립운동이 더욱 저항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진지한 역사적 논의에 대한 최소한의 감각이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영훈 말마따나 ‘있을 만한 일이 일어날 뿐’이라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논의의 결론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줄곧 도식으로 제시하는 ‘연속과 단절’의 테마에 있어서도, 역사가들은 보통 ‘연속’에 방점을 찍는다. 다만 한 사람의 전문역사가가 커버할 수 있는 시공간의 범위는 100년을 넘기기 어렵기 때문에, 저자가 (무모하게)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문화의 특수성을 규명하기 위해 수 백년을 퉁치는 식으로 논의하지 않을 뿐이다. 보통 역사가들은 그런 거대한 논의를 펼칠 엄두를 내지 않고, 사회학자나 심리학자들, 그리고 일부 철학자들이 그런 논의에 자꾸 욕심을 낸다. 당연히 이 세상에 100%는 없으므로, 선사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인적인 기질’ 같은 것이 아예 없느냐 하면, 그렇게는 얘기할 수 없을런지 몰라도, 그것을 학술적으로 설득해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그걸 너무 진지하게 시도하고 자기들끼리 솔깃해하는 걸 계속 보고 있자면,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해도, 나중에는 좀 어처구니가 없어지곤 한다.

한편으로는 논객 글쓰기의 종착점에 대해 확인하는 힘 빠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지하듯이 저자 한윤형은 ‘청년 논객’으로 호명되어 진중권 같은 ‘선배 논객’의 글쓰기를 흉내내면서 글쓰기를 시작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 책과 지난 책인 <추월의 시대>에서 그가 구사한 글쓰기의 스타일을 보면서, 저자가 결과적으로 학술 글쓰기도 아니고, 정치 평론도 아닌, 그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글이나 쓰는 에세이스트로 전락해버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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