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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8. 30. 18:40

<능력주의 3부작> 후기

능력주의 담론에 대해 응답해야 할 책무(?)를 느끼고 읽었다. 불평등 논의와 연계하여 훨씬 긴 글을 쓰다가 스케일이 너무 커지는 바람에 우선 간단히 감상만 먼저 남겨놓으려고 한다(정작 그 글은 언제쯤 완성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권일의 와 김동춘의 는 모두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능력주의는 일종의 사후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의 성취가 오롯이 ‘개인의 능력’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발상을 도대체 왜 공동체가 받아들여줘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주의 자체는 ‘성공한’ 당사자의 자아 도취이거나 자기 방어 논리에 불과하다. 너무 무기력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사실 운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데..

2023. 8. 29. 12:11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4): 한국 고대사, 뇌과학, 한일관계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젊은 역사학자 모임 여전히 류의 유사역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적어도 내가 속한 세대는 더 이상 민족주의에 대한 강박이 별로 없다고 느낀다. 내 입장에서는 반일과 민족통일을 자꾸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적으로 의심스럽다(NL?). 보다 못한 ‘젊은 역사학자들’이 나서서 ‘환빠’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이다. 유사역사학 비판이 큰 줄기지만, 고조선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발해까지 고대국가들이 골고루 다루어지고 있어서 한국고대사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나부터도 중고등학교 시절 한국사 시간에 고조선의 위만과 발해의 대조영이 중국계가 아닌 조선(고구려) 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 백제는 요서 지역까지 진출했던 해상강국으로서 특히 왜나라를..

2023. 8. 18. 06:23

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를 읽고

한겨레신문 국제부 정의길 기자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제 보니 정의길 기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 ). 그런데 그의 책들은, 저자의 박학다식함에도 불구하고,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벌써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중동문제를 다룬 정의길의 은, 같은 언론인 출신인 박정욱 PD의 보다 훨씬 잘 안 읽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문단과 문단, 장과 장, 나아가 책의 전체 구성이 유기적이지 않고 단순 나열식에 가까워서 그런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책 전체가 특집 기사들의 단순 모음집 같다. 이런 방식은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거나 해당 주제에 대해 ‘썰을 푸는’ 포맷의 대담 프로그램에는 잘 어울리지만(실제로 저자가 각종 영상매체에 출연..

2023. 8. 9. 16:17

왜 <인간실격>에 열광하는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시리즈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헤세의 , 카뮈의 ,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이다(알라딘 기준 1위 , 2위 , 3위 . YES24 기준으로는 1위가 , 2위 , 그리고 은 4위다. 실제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샐린저의 이라고 한다). 이나 이 많이 팔리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헤세와 카뮈는 어쨌든 둘 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이고, 이나 자체도 이른바 서구식 부르주아 교양주의 정전 목록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사실 그래도 의 인기는 좀 이상하다. 헤세 작품 중에서 서구에서 더 많이 읽히는 작품은 나 이고, 헤세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작품은 대작인 다. 그리고 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헤세를 일반적인 의미의 ‘소설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된다(시인에 가깝다). 전쟁..

2023. 8. 7. 23:24

최준석, <물리 열전>을 읽고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 언론인이다. 서문의 제목 ‘이제 사람으로 과학을 배운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국내 과학자들을 상대로 한 기획 인터뷰 기사 모음집이다. 이 접근 자체는 매우 신선하고 적절한 것이다. 자연과학 교양에 대한 수요와 공급 자체가 적지 않음에도, 현재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른바 ‘노벨상급’ 과학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국내 물리학자 47인의 연구관심과 개인사를 소개하면서 오늘날 한국 물리학계의 분위기를 비교적 생생하게 전달한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은 선구자적인 과학자 개인의 영감이나 천재성이 아니라 (국제적) 학술 커뮤니티의 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과학지식이라는 것도 사람과 제도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열전 ..

2023. 6. 20. 19:20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을 읽고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으로 반드시 거론되는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보다 지루한 소설이었다. 이렇다 할 ‘사건’도 없고,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처럼 아주 강렬한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으려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라스꼴리니코프나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강렬한 역할을 주인공인 바자로프가 했어야 하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바자로프는 다소 희화화되어 묘사되다가 마지막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서정적인 순간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바자로프의 양친을 묘사할 때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의 ‘영원한 화해’는 죽은 자식의 무덤가 앞에서나 가능했다. 그것이 투르게네프의 정치적 입장을 암시하는 것인가를 두고 당대에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2023. 6. 12. 00:04

상반기 독서: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과 <대륙법 전통>

늘 그렇듯 올 상반기에도 바빴다. 연초와 3월 즈음에 읽었던 두 책에 대한 단평을 업로드한다.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 홍정완 저자의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을 펴낸 이 책은 ‘사상사’ 연구를 표방한다. 역사학 연구의 특징인 것인지, 광범위한 사료를 제시하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서사가 명확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에 기초하여 나름대로 서사를 명료히 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제목과 달리 ‘사회과학’ 자체는 이 책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정치학과 경제학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냉전기 한국의 (사회과학) 지식체계를 검토한 다음, 그것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온 한국의 ‘근대화 담론’의 지형을 펼쳐 보이는 것이 책의 주된 관심이다. 냉전 시기의 사회과학 지식에 주목하는 것은 그..

2023. 4. 10. 18:30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를 보고 손에 들었으나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제목을 보고 한국의 장애운동 및 장애 당사자에 대한 세밀한 에스노그라피를 예상했으나 문학작품 및 시각매체에 대한 문화비평을 주로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황우석 기념우표’에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황우석 기념우표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단계로부터 점차 ‘이족보행’이 가능한 비장애인으로 ‘진화’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장애란 의학적 개입을 통한 ‘치유’의 대상이라는 ‘비장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이미지인 것. 나의 최근 장애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 “장애는 존재해도 좋은가?”.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