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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4. 10. 18:30

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를 보고 손에 들었으나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제목을 보고 한국의 장애운동 및 장애 당사자에 대한 세밀한 에스노그라피를 예상했으나 문학작품 및 시각매체에 대한 문화비평을 주로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황우석 기념우표’에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황우석 기념우표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단계로부터 점차 ‘이족보행’이 가능한 비장애인으로 ‘진화’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장애란 의학적 개입을 통한 ‘치유’의 대상이라는 ‘비장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이미지인 것. 나의 최근 장애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 “장애는 존재해도 좋은가?”.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

2023. 2. 15. 02:01

정현채,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를 읽고

‘죽음학 강의’로 유명한 정현채 교수의 대중서이다. 이 책은 독자의 태도에 따라 독후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스스로를 죽음의 당사자로 진지하게 규정하고 있는 독자는 이 책을 매우 절절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을 사이비-유사 과학서로 폄하할 것이다. 나는 절절하게 읽은 쪽이다.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덜해졌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임사체험자들의 경험담을 통해 죽음 ‘직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환한 빛을 보았고’, ‘먼저 죽은 가족이나 친구의 형상을 보았으며’, ‘유체이탈 현상을 경험했고’..

2023. 2. 8. 12:50

사회과학은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가? :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을 읽고

사회과학은 과거를 재현할 수 있는가? : 로드니 스타크, 을 읽고 1. 들어가며 3세기 후반 급격한 기독교의 성장은 서양 고대사의 중대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변방의 미약한 ‘예수운동’은 어떻게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될 수 있었는가? 신앙인들은 거의 불가해한 수준의 이 ‘기적적인’ 도약을 그 자체로 기독교적 진리의 현현(顯現)이라고 보거나 예수 부활 사건의 간접증거로 삼는다.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은 이 미스터리에 대한 최초의 문학적‧신학적 대답이기도 하다. 교회사가들 역시 기독교로의 ‘대규모 개종’ 원인을 기독교 교리의 우월성이나 순교 사역의 진실성에서 찾는 등 신학적인 설명 이상을 제공하지 못한다. ‘기독교 발흥’의 전후 사정이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

2023. 2. 3. 08:10

최근 읽은 책들에 대한 단평 (3): 자살, 퀴어, 부족주의

『숭배, 애도, 적대』 - 천정환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자주 울컥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의 자살 문화에 대한 일종의 계보학을 시도한다. 90년대 대학생들이 주도한 ‘분신정국’과 2000년대 노동자들의 분신 사건들 사이의 연속과 단절을 검토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정치인, 공무원, 연예인의 자살을 분석한다. 자살은 언어(상징계)를 초과하는 사건이라서 근본적으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건 자살을 하는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분석하는 자살자들의 유서는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자신보다 더 큰 대상을 ‘위해서’ 죽는다는 식의 서술을 담고 있다. 그들은 반미자주투쟁을 위해서,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자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에는 언제나 내밀한 사적인 동기도 작용..

2023. 1. 18. 04:53

이시윤, <하버마스 스캔들>을 읽고

한국 인문사회과학계의 하버마스 수용 ‘실패’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분석을 담은 (엄청나게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인데, 지도교수인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본격화한 것으로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무협지 읽듯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국내의 철학자‧사회학자들의 실명이 난무하는 뒷부분의 분석도 인상적이지만, 앞부분에 이론적 틀로서 제시된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대한 명료한 설명도 유익하다. 어째서 한국에는 ‘자생적 이론’이나 ’독자적 학파‧사상’이 없는가? 이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제출되어온 학계 자신의 설명은 내인론과 외인론으로 양분된다. 내인론은 학자들이 한국사회만의 문..

2023. 1. 12. 05:42

이관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를 읽고 (+번외)

개인적으로 경영학이 지나치게 ‘속물(?)학문’ 취급당하는 것이 불만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행위자는 단연 기업일 텐데, 그 기업 행동의 일반원리를 제시하는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영학(business-administration)만큼 중차대한 학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야 경영학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사실 경영학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서 인상비평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대학생들에게 일반적으로 경영학은 학문적인 논의의 대상이라기 보다 ‘회계사(CPA) 수험과목’이거나 ‘취업이 잘되는 전공’에 불과하다. 경영학은 그 내부에서 뭔가 비판적인 논의나 대안제시가 불가능한 학문인 것처럼 느껴진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경영학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2023. 1. 8. 21:49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 임지현, 를 읽고 - 1.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임지현의 학술적 자기-기술지이다(저자는 ‘에고 히스토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책을 참 재밌어 하는 것 같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이어 또 학자의 회고담이다. 이번 임지현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의 ‘실천’과 관련하여 생각한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김경만과 이영석이 모두 실천과 거리를 두면서 학자로서의 성실함, 김경만의 경우 특히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도전하는 방식의 치열함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임지현은 상대적으로 실천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그 실천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식의 속류적인 방식이..

2023. 1. 7. 07:42

최병천, <좋은 불평등>을 읽고

읽는 내내 짜증스러워서 몇 번이나 책을 덮을까 고민했다. 아주 나쁜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장 상태가 엉망이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문장이 뚝뚝 끊기고 어색한 표현과 인용이 자주 등장한다. 초등학생 작문 숙제를 보는 느낌이다. 글 자체를 거의 써보지 않은 사람의 글이다. 추측건대 저자는 업무보고서 식의 개조식 글쓰기만 해온 사람인 것 같다(편집자는 뭘 한 건가?). 어떤 것들은 황당할 정도인데 혼자 보기 아까워서 웃긴 것들을 옮겨 적어본다. “(1) 경제학적으로 볼 때 수출, 투자, 성장, 고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2) 수출이 잘되면 투자가 늘어난다. (3) 투자가 늘어나면 성장률이 높아진다. (4) 투자와 성장률이 높아지면 고용이 창출된다. (5) 이는 한국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