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정,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라는 부제를 보고 손에 들었으나 꼼꼼히 읽지는 않았다. 제목을 보고 한국의 장애운동 및 장애 당사자에 대한 세밀한 에스노그라피를 예상했으나 문학작품 및 시각매체에 대한 문화비평을 주로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의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황우석 기념우표’에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다 들어있다. 황우석 기념우표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단계로부터 점차 ‘이족보행’이 가능한 비장애인으로 ‘진화’하는 사람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다. 장애란 의학적 개입을 통한 ‘치유’의 대상이라는 ‘비장애 중심주의’ 이데올로기가 노골적으로 반영된 이미지인 것.

나의 최근 장애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 “장애는 존재해도 좋은가?”. 물론 장애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존재해도 ‘좋은 지’를 따져 묻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물음이긴 하다. 그러나 ‘장애의 존재론’의 핵심은 이 물음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비장애인 중 누구도 장애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장애인들 역시 자신의 장애를 ‘치유’할 수 있다면 대부분은 의학의 도움을 받고자 할 것이다. 복음서 속 기적의 상당수가 예수의 ‘치유사역’이라는 사실은, 아픔과 질병과 장애를 싫어하고 혐오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거의 ‘원형적인’ 사고방식임을 보여준다. 장애의 현존을 개인적‧사회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문제는 단순한 (사회적) 인정투쟁의 영역을 넘어선다 – 그것은 거의 종교적이고 실존적인 수준의 고뇌가 필요한 문제다. 최근 한국사회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목도하면서 우왕좌왕하는 것의 근저에는 사실 ‘장애’라는 범주 자체의 심오한 문제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아프고, 병들고, 남루하고, 비루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몸’은 ‘존재하기’를 지속할 가치가 있는가?

이 문제를 고찰하기 위해선, 이론을 가지고 철학적으로 질주하기에 앞서(나는 그 이론적 틀을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객체 지향 존재론/신유물론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우선 당사자들의 에스노그라피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손에 들었으나 이 책은 장애의 ‘문화적 재현’만을 분석하고 있어 그 문제에 간접적으로만 대답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이 많다. 예를 들어 <심청전>은 장애 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원형적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또 <오아시스>(이창동)나 <아빠>(이수진) 같은 영화들은 장애인이 이성애중심주의(이성애적 성욕)에 편입됨으로써 시민권을 부여 받을 수 있다는 문제적인 구도를 전제하고 있다.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꽃잎>(장선우), <수취인불명>(김기덕) 같은 영화는 여기에 ‘한국-국가주의’라는 정치적 변수를 추가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치유-폭력’ 테제에 대하여 좀 더 꼼꼼히 읽고 나름대로 논평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려면 노력이 더 필요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전에 ‘의료-인류학’ 관련 책을 몇 권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의료인류학 관련서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아프면 보이는 것들> - 제소희 외
<우리의 아픔엔 서사가 있다> - 아서 클라인먼
<아픔에 대하여> - 헤르베르트 플뤼게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 - 유영규 외
<아들이 부모를 간병한다는 것> - 히라야마 료
<의학의 철학> - 최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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