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지식인과 실천: 임지현의 사례에 비추어

– 임지현,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고 -

1.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임지현의 학술적 자기-기술지이다(저자는 ‘에고 히스토리’라고 부른다). 나는 이런 책을 참 재밌어 하는 것 같다.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영석의 『삶으로서의 역사』에 이어 또 학자의 회고담이다. 이번 임지현의 책에 대해서는 지식인의 ‘실천’과 관련하여 생각한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김경만과 이영석이 모두 실천과 거리를 두면서 학자로서의 성실함, 김경만의 경우 특히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도전하는 방식의 치열함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임지현은 상대적으로 실천가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런데 그 실천이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식의 속류적인 방식이 아니고, 자신의 연구 분야인 폴란드 근현대사와의 관련 속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를 문제 삼는, 이른바 ‘트랜스내셔널-역사학’ 관점에서의 문제제기라는 점이 곱씹어볼 만하다.

 

2.                                                                       

임지현의 학문적 여정을 먼저 정리해보자. 임지현은 이영석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풀어가기 위한 통로로서 서양사 연구를 시작한다. 자본주의 이행논쟁, 일본의 강좌파-노농파 논쟁, 독일의 존더베크(Sonderweg) 테제 등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을 한국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비교사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그의 주 관심이었다. 석사장교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 빨리 완성해야 했던 다윈과 마르크스의 지적 영향관계에 대한 석사논문을 제외한다면, 그의 지적 여정의 시작인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엥겔스의 민족문제관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당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염두에 둔 주제 선정이다. 한양대에 임용된 후 그는 자신의 학위주제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들의 평이 궁금해서’ 가장 오래된 영어권 마르크스주의 학술지인 <사이언스&소사이어티>에 학위 논문의 특정 장(마르크스의 식민지관이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계기로 바뀌었다는 내용)을 수정하여 투고하고, 논문 게재에 성공한다. 같은 학술지에 로자 룩셈부르크의 민족문제론을 동유럽 사회주의 운동과의 관련 속에서 검토한 논문도 게재하게 되면서 임지현은 본격적으로 국제 학술장에서 활동하는 학자가 된다.

 

1) 서양사가: 폴란드 민족운동 연구자

폴란드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경험한 것이 임지현의 학문적 여정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실사회주의 국가인 폴란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정반대였다. 단적인 예로 폴란드에서 체제 순응적인 역사가들은 노동운동사나 공산당사를, 반체제적인 역사가들은 고‧중세사를 전공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공산당의 실질적인 통치이념은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였고, 공산당 노멘클라투라는 노동자와 농민을 탄압하는 악당으로 간주되었다. 폴란드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강고한 민족주의를 과거에 덧씌우는 식의 시대착오적 역사서술이 일반적이었다. 임지현은 90년대의 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 연구를 끝으로 폴란드사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그에 따르면 이 시기에 그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이행했다.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2) 역사가: 국사 해체에서 대중독재론까지

여기서부터 임지현의 경로이탈이 시작된다. 임지현에 따르면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민족주의가 강한 국가인데, 한국인 폴란드 현대사 연구자로서 그는 지속적으로 폴란드사에 비추어 남북한의 강고한 민족주의를 바라보게 되었다. 폴란드도, 남북한도 서구적 보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그에 따르면 이런 시선은 기존의 세계적 학문 분업 체계(서구의 보편적인 ‘이론’을 한국의 사례에 ‘적용’함으로써 서구 이론의 학문적 적실성을 강화하는 방식)가 아닌,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에서 말하는 상호작용’의 사례가 된다. 그는 90년대부터 ‘민족주의’를 매개로 국사학계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90년대 임지현의 이러한 작업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에 수록되어 있다.

2000년대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국사의 신화’에 도전하고자 동료 한‧일 지식인들과 함께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을 구성하게 된다. 일본에서도 민족주의가 강화되어 가고 있던 상황에서 임지현은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민족주의가 적대적 공존 관계에 있다고 보고, 국사의 해체는 궁극적으로 일국사적인 관점 자체를 넘어서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자연스럽게 변경사(border history)를 축으로 한 ‘글로벌 히스토리’로 이행하게 된다.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한편, 같은 시기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문학이론가인 사카이 나오키와 나눈 대담(<오만과 편견>)은 이후의 ‘일상의 파시즘 – 대중독재론’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상의 파시즘론은 민족주의, 민중주의, 전통주의라는 이름 하에 각인된 ‘일상적 파시즘’이야말로 타도의 대상이라는 주장이었고, 대중독재론은 그 연장선상에서 독재에 대한 ‘동의론’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20세기 독재체제들에 대한 공동연구 프로젝트였다. 비단 좌파 민족주의 계열이 아니더라도, 민족주의 자체가 여전히 성역이었던 한국사회에서 일련의 작업들은 첨예한 논쟁을 낳았다. (<오만과 편견>, <우리 안의 파시즘>, <대중독재>)

 

3) 기억활동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최근 임지현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스라엘을 두고 만든 ‘세습적 희생자의식’ 개념에 착안하여,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기억문화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자기 민족을 피해자의 입장에 위치지우고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은 한국과 일본,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관찰이다. 요컨대 민족주의의 정신적 기원은 근대국가가 만들어낸 ‘희생자의식’에 있다. (<기억 전쟁>,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3.

임지현은 자신의 학문적 변화를 ‘서양사가에서 역사가로, 역사가에서 기억활동가로’의 변화라고 규정한다. 세 시기의 유일한 공통분모는 ‘민족주의’다. 지식인으로서 임지현의 행적에 정치 참여적인 성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당 부분 민족주의라는 주제 자체가 성역화되어 있는(있었던?) 한국사회의 현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혹은 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류였던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NL)와 그 연장선상에 있었던 창비-백낙청 사단의 ‘분단체제론’ 등 이른바 ‘좌파민족주의’가 하나의 정치적 진영으로 구축되어 있던 상황 자체가 임지현의 민족주의 연구로 하여금 참여적인 성격을 띄도록 만들었다.

이런 방식은 우선 김경만이 문제시하는 ‘서구 이론의 무비판적 수용과 기계적 적용’이라는 혐의로부터 일견 자유로운 것이다. 임지현의 문제제기는 특정한 ‘이론’을 수입한 다음 그것을 한국적 상황에 ‘적용’하는 식의 지적 서구종속을 답습하고 있지 않다. 이는 부분적으로 사회과학과 달리 ‘이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따로 없고 사료를 중심으로 과거를 ‘재현’하는 것을 주로 하는 역사학의 특성으로부터 기인한 것이긴 하다. 말하자면 임지현은 폴란드의 민족주의와 한국의 민족주의를 병치시킨 다음 그것으로부터 어떤 비교사적인 통찰을 기대하는 방법을 취한다(‘트랜스내셔널-상호작용’). 이것은 분명 서구 이론에 이름표만 바꿔 단 것을 독창적이라고 우기는 ‘한국적 사회과학’에 비해 세련된 것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임지현이 거꾸로 특정한 ‘개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는 것으로 학문적 자주성을 자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젊은 정치학 조교수가 ‘외국의 저명한 학자가 만들어냈다는 ‘대중독재’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우쭐해하기도 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출현이나 트럼프와 같은 사례를 보면 대중독재 개념이야말로 진행형의 개념이 아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이때 임지현은 서구로부터 이론을 수입해오지 않은 대신, 과거로부터 개념을 ‘수입’해오는 시대착오를 범함으로써 전문 역사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한다.

가령 그가 민족주의에 대한 근대주의적 관점을 취하든, 20세기 독재 체제들로부터 대중독재 개념을 도출하든, 그것을 오늘날 한국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용하려고 할 때(‘일상의 파시즘’) 그는 역사학자라기보다 사회학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는 자신의 첫 민족주의 논문(「한국사학계의 ‘민족’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 1994)이 국사학계보다 사회학계에 의해 읽히고 논의되었던 사실을 개탄한다. 저자는 더 이상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기억활동가’). 여기서부터 모든 게 꼬인다. 임지현이 더 이상 전문 역사연구자가 아니라면, 그가 ‘만들어낸’ 개념어들(‘대중독재’,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학문적 공신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런 아이러니는 사실 그가 ‘역사포럼’을 통해 국사학계에 관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그가 ‘책임윤리’의 차원에서 학술논문과 구분되는 ‘비평 에세이’에 대한 ‘의도적 관심’을 기울였다고 고백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심하게 말하면 그가 국사학계에 관여하는 ‘경로이탈’을 감행한 것은 학자로서가 아니라 에세이스트로서였던 셈이다. 연구영역이 분과학문 별로 세분화‧전문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지적 환경 속에서 한 분과의 연구자가 다른 분과로 거칠게 침투해 들어갈 때 그것에 대한 진지한 학술적 응답을 기대하는 것은 자못 오만한 일이다. 국사학계는 ‘일국적 관점’에 매몰되어 있으며, 폴란드사를 전공한 자신은 ‘세계사적 관점’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은 학술적 서구종속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2000년대 이후 그의 작업들이 주로 자신이 폴란드사 연구자로서 쌓은 명성 자본을 활용해서 국내외의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이벤트성 ‘국제학술포럼’ 등을 주선하는 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은 이런 의심을 강화한다. 이런 방식으로 특정한 ‘개념’들을 국제적으로 유행시키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한국적(혹은 트랜스내셔널한)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독창적인 ‘이론’이 되는 것일까? 저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실은 그가 국제적으로 유행시키고자 하는 개념들이 진정으로 독창적인 것인지도 따져볼 일이다. ‘연대포럼’에서 그의 작업은 학자적인 것이라기보다 활동가적인 것이었고, ‘대중독재론’은 파시즘에 대한 ‘동의학파’의 견해와 공명하는데다 단독작업이 아닌 공동작업이었으며(스스로 그 당시 자신은 독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다고 시인한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세습적 희생자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어떤 학술개념이 무슨 특허권의 대상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 대목은 임지현이 자부하는 ‘독창성’의 문제성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에 값 한다. 오늘날 학문적 독창성이란 축적된 연구사의 최전선에서 힘겹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으로 간신히 성취되는 것이다. 임지현의 학자적 독창성은 그가 30대에 소속되어 있던 ‘마르크스주의 – 민족주의 – 폴란드 근현대사’ 분과에서 모색할 수 있는 것이지, 이벤트성으로 다른 학자들과 모여서 집필한 것을 기계적으로 이어 붙인 작업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안한 개념들이 학계 안팎에서 일정하게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작업의 참여적 성격 때문이었다. 그가 던진 민족주의와 미시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곧 ‘실질적 민주주의의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결국 적어도 2000년대 이후 임지현의 작업은 학술적인 것이었다기보다 실천적인 것이었으며, 이론적으로 독창적인 것이었다기보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4.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오늘날 전문직업화 된 학자는 사실판단의 영역에 머물러야 하며 자신의 실천적 입장을 ‘학문적으로’ 옹호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학술장에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뒤섞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베버의 지적은 이른바 ‘사회공학’을 우려해야 했던 20세기만큼이나 오늘날 학술담론장에서도 유효하다. 오늘날 대학교수-지식인이 자신이 속한 학술공동체에서 축적한 명성 자본을 지렛대 삼아 분과 너머의 사회적 현안에 대해 ‘훈수’를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늘날과 같이 전문화‧세분화된 지적 환경에서, 우선 현안에 대한 지식인의 전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며, 전문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의 사회참여’라는 이름 하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한국사회에서 특히 비일비재한데 때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방송출연을 즐기는 어떤 독문학자는 유럽의 68혁명과 독일의 교육시스템에 기대어 한국사회의 교육문제에 대해 매우 거칠게 ‘훈수’를 두다가 교육사회학 전문 연구자로부터 비판 받은 바 있다. 또 노자를 전공했다는 어떤 동양철학자는 ‘국정철학’ 운운하며 지난 대선에서 보수정당의 선대위원장직을 선뜻 떠맡으며 논란을 낳기도 했다. 물론 임지현의 정치적 참여가 이들과 비견될 만큼 노골적인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숙고해볼 여지가 있다.

임지현의 경우 정치적 참여가 점차 학술적 작업을 대체하였다. 이것은 그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영문학자’ 백낙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방식은 상당히 교묘한 것인데, ‘분과 극복’과 ‘참여’라는 명분 뒤에 숨어 어떤 비판적‧생산적 문제제기로부터도 비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임지현의 국사학계 관여에 대해 국사학계가 비판하든 비판하지 않든, 국사학계의 태도는 ‘분과학문적 틀에 갇힌 편협한 입장’이 된다. 반대로 임지현 자신이 ‘서양사’ 분과 뒤로 숨는 식의 방어도 가능하다. ‘트랜스내셔널-인문학’이라는 거창한 구호는 임지현의 대표적인 방어막이다. 정치적으로는 임지현을 비판할 경우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입장(NL이나 ‘국뽕’)으로 무시해버리면 그만이다.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자체가 의문시되는 바, 자꾸 민족주의를 극복하자고 주장하기만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겨 놓고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임지현의 입장이 매번 ‘훈계 조’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하다. 전략적으로야 성공적이겠지만, 임지현 식 ‘실천’이 ‘직업으로서의 학문’ 윤리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시된다. 베버 식으로 말하면, 임지현은 ‘탈-민족주의’라는 신념윤리적 입장을 ‘학문’의 이름으로 특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의 직업윤리는 김경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도로 축적된 글로벌 지식장의 첨단에서 한 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의 ‘독창적 연구’를 수행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분과학문의 상아탑에 갇혀 사회적 현안에 대해 침묵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의미의 ‘참여적 지식인’이란 오늘날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로티 식의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가 베버적인 직업 윤리관을 준수하면서도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가능케 하는 모델로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말하면 ‘신념 윤리적인 입장’과 ‘책임 윤리적인 태도’를 과감하게 단절시키는 것이다. 리처드 로티는 누구나 ‘사적 진리’를 추구할 수 있지만 공적으로는 ‘자유주의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의 자유주의는 대단히 넓은 의미다. 그러니까 플라톤 식의 ‘철인정치’ 모델이 철학자의 사적 진리에 ‘입각한’ 공적 통치를 지향한다면, 로티는 개개인이 추구하는 사적 진리와 무관하게, 공적인 연대는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를 준수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로티의 실용주의적 진리관이 이런 단절을 정당화한다.

구체적으로는 노엄 촘스키 같은 지식인이 이런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의 예시가 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촘스키는 대표적인 사회참여적 지식인이자 언어학자이다. 그런데 촘스키가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정책이나 자본주의의 병폐에 전투적으로 맞설 때, 그것이 촘스키의 언어학적 입장, 예컨대 ‘변형생성문법’ 따위로부터 연역된 입장인 것은 아니다.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 자신만의 사적 진리를 추구하지만, 공적으로는 넓은 의미의 ‘사회적 선’을 위해 논리를 만들고 부당함에 저항하는 참여적 입장을 견지한다. 촘스키 자신 역시 자신의 언어학적 입장과 정치적 입장을 연결시키지 말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국식 ‘지식인의 사회참여’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 모델을 따른다면, 예컨대 임지현은 자신의 탈민족주의적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것의 연구자가 될 필요가 없다. 또 백낙청은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분단체제라는 이름으로 이론적으로 종합할 필요가 없다. 임지현과 백낙청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학문적으로’ 정당화‧특권화 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입장과 주장에 대한 (마땅히 그랬어야 할) 보다 건강하고 활발한 (학술적 논쟁이 아닌) 민주적 토론이 가능했을 것이고, 그들 역시 나름대로 자신이 속한 분과학문의 틀 속에서 이른바 글로벌 지식장에 독창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임지현(좌)과 촘스키(우)

5.

임지현‧백낙청 류 사회참여의 성과와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임지현 스스로 규정하듯이 그가 서양사학자로부터 ‘기억활동가’로 ‘전향’했다고 보면 2000년대 이후 임지현의 작업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전문화되고 세부화 된 현대적인 학술장에서 지식인이 글로벌 지식장에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동시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참여하고 기여하는 일이 지속가능 하도록 하기 위한 일반론을 제시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임지현의 학문 여정은 분명 문제적이다. 임지현이 순수 ‘국내파’임에도 국제적 학술장에서 ‘인정’받는 인문학자의 대표로 자주 거론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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