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탄생>과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연구자의 탄생』 - 김성익 외

대략 80년대에 출생했고, 90년대에 10대를 보낸, 2000년대 학번의, (이 책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안은별이 개념화한 바 있는 ‘IMF 키즈’ 세대에 속한 10명의 ‘인문학 연구자’들의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로 기획된 책이다. 최근 대학에서는 분과별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인데, 이른바 ‘MZ 세대’인 내가 학교에서 마주할(하고 있는) ‘새로 부임한 젊은 교수’들이 대략 이 세대의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방금 MZ 세대를 검색해보니 ‘MZ세대’는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출생집단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 교수님, 우리 같은 세대였어요!)

‘연구노동자의 자기기술지’에 가까운 글도 있었고 자신들의 연구관심에 대한 시론(試論)을 전개한 글도 있었다. 주목해야할 것은 양자 간의 연결고리이다. 생애의 어떤 국면이 이들을 ‘연구자’로 거듭나도록 했으며, 이들의 학술적 관심사가 각자의 유년기 및 청년기 경험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연구자’와 ‘연구대상’의 관계는 분리가능한 것인가? ‘연구’ 내지 ‘공부’가 단순히 직업을 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식론적 실천이자 매혹적인 사회비판’(오혜진)이거나, ‘재미라는 종교’(김신식)일 수 있다면, 그것은 연구자의 공적, 사적 생애경로와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은 대학의 ‘연구 행위’에 대한 나의 낭만적인 망상일 뿐이고, 가능하면 ‘전도유망하며’, ‘논문양산이 손쉽고’, ‘국가와 사회로부터의 수요가 상존하는’, ‘돈이 되는’ 분야를 선택하는 것이 연구’노동자’의 보다 합리적이고 영리한 판단인 것인가?

페미니즘(오혜진, 윤보라, 배주연), 경제인류학(이승철), 정치학(양명지), 영문학(김성익), 사회학(김정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이들의 연구주제는 넓은 의미의 ‘문화연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다. 이들의 연구는 ‘데이터를 가공해서 통계를 돌리는 식’이 아니라, 문헌을 일일이 ‘읽어내며’ 한 땀 한 땀 ‘썰을 푸는’ 유형의 연구다. 그러니까 이들의 연구는 대량으로 ‘양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들이 생산해내는 지식이 국가나 사회에 ‘당장의’ ‘즉물적인’ 효용을 제공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자본주의 대학에서 가장 손쉽게 ‘구조조정’ 당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한 취약한 존재이며, 자신들의 연구가 어떤 ‘효용’을 갖는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한민국에서 인문학 연구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물어보게 된다. (단, 공저자 중 이승철과 양명지는 각각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와 하와이대학교 사회학과의 전임교수로 자리를 잡았다)

젊은 연구자들답게 이들의 문제의식은 첨예하고 시의적이라서 이 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연구주제들의 ‘아카이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미셸 푸코의 통치성 논의를 금융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분석에 접목시킨 이승철의 글과, 첨단 (자연)과학의 발전이 야기한 ‘물질적 세계로의 이행’으로 인해 ‘세계의 텍스트성’이 의심받기 시작한 상황 자체를 인문학이 처한 문제상황인 것으로 규정한 김성익의 글은 두고 두고 읽어볼 만하다.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 오혜진

오혜진은 ‘국어국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틀을 표방하지만 실은 문화연구에 가까운 작업을 하는 신진문화연구자이다. 따라서 오혜진의 분석대상은 문학작품에 그치지 않고, 영화와 웹툰 및 정치(문화)현상 일반을 아우른다.

그러나 오혜진의 문화분석은 개별 작품 자체의 미묘함과 복합성을 풍부하게 되살리고 재조명하기보다, 모든 작품을 ‘페미니즘’이라는 행동주의의 맥락에 평면적으로 위치 지우거나, 페미니즘의 견지에서 거북하거나 용인하기 어려운 요소에 대해 손쉽게 비난하는 것을 주된 전략으로 삼고 있어 제대로 된 ‘비평’에 값 하지 않는다. 그녀가 이자혜의 웹툰 <미지의 세계>를 열렬히 지지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여성 없는 포르노(BL)’를 즐길 줄 알고, ‘(여성)신체적인 것’을 저항의 처소로 삼으며, 한껏 불온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니컬한 페미니스트 투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그녀가 보기에 ‘가부장적 여성혐오’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은 드물 것이다. 반대로 그녀는 페미니즘적으로 반가운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해지고 비평적으로 마비되곤 하는데, 게이 합창단을 다룬 다큐멘터리 <위켄즈(2016)>와 퀴어 다큐멘터리 <불온한 당신(2017)>을 맥없이 지지해버리는 대목에서 비평적 긴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그녀에게 찬사 받는 작품을 쓰거나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다 - 이것은 비평가에 대한 최대한의 모욕이다 - 웹툰 <미지의 세계> 속 ‘미지’같은 소재를 등장시키기만 하면 된다. 여성주의 비평을 규범적으로 특권화하는 게으른 관성으로부터 이 젊은 평론가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의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녀가 요즘 관심을 두고 있다는 ‘재현의 윤리’ 테마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나 랑시에르의 논의를 떠올리면, 게으른 반복에 머물고 있을 뿐, 거기서부터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은 그 효용을 다했으므로(종언), 문학보다 시급한 ‘사회운동’(어소시에이션)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혜진에게도 문학은 끝났고, 비평도 그다지 의미는 없는 바, 오직 ‘여성혐오 사회의 전복’이라는 ‘사회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책의 제목,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은 완전한 이율배반이다. 근본적으로 오혜진은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비평적 자살'을 위한 좋은 알리바이가 된다. '운동'에 투항하기 위해 특정 ‘진영’에 들어가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개념적 도구에 숨어 비평적인 태만을 감수하는 이런 손쉬운 타협은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영리한 전략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은 20~30대 여성을 주된 문화소비계층으로 두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라면 이들 ‘새로운 독서주체’가 아무리 ‘저급한 문학’(나는 문화예술이야말로 저급한 것과 고급한 것이 따로 있다는 꼰대적인 소신을 가지고 있다 – 그걸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적인 자살 아닌가?)을 읽어도,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취향의 발굴’이자 그 자체로 ‘정치적 실천’일 수밖에 없다 – 언제부터 ‘실천’이 이토록 가볍고 용이한 것이었던가? 결국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에 몰두하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출판시장의 소비자-대중에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자승자박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적인 집단자살을 감행 중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유일하게 기억에 남길만한 것이 오혜진이 ‘문학비평’ 범주에 속하는 논의에 뛰어드는 대목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90년대 한국소설의 사소설적 경향, 내면에의 천착, 취향과 개성에 대한 몰-역사적(자폐적) 집착이 2000년대까지 이어져 한국문학이 ‘타락했다’는 진단과, 따라서 정유정-천명관-성석제-김언수 류의 ‘장편 이야기꾼’을 발굴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장편 대망론’이, 사실은 80년대 문학의 ‘가부장적 리얼리즘’ 전통에 대한 향수일 뿐만 아니라, 영화화-세계화-시장화에의 ‘자본주의적’ 욕망과도 공명한다는 관찰은 흥미롭다. 특히 이 구도를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문단 내에서의 신경숙 비판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백낙청의 “창비”가 90년대에 이르러, 80년대적인 좌파민족주의 문학으로부터 전향하여, 스타작가를 발굴하고 키워서 성공적으로 세계화(『엄마를 부탁해』(2008))하는 상업적 모델에 투항한 것에 대한, 다분히 586스러운 비난이기도 하다는 것. 그렇다면 586스러워지지 않으면서도 신경숙의 저질 문학을 마음껏 조롱할 수 있는 비평적 좌표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설정 자체는 어찌됐든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최은영-강화길-조선희-명지현을 동시대 페미니즘 문학의 계보에 올리려는 시도와, 전경린-최윤에 대한 재해석은, 어느 정도 예상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비평'에 미달하지만, '소개'와 '정리'의 역할만큼은 충실히 해내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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