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운옥, <낙인 찍힌 몸>을 읽고

작년에는 유독 ‘이민’, ‘정체성’, ‘인종’ 등 문화정치학의 개념어들을 다룰 일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대중서로서 인종과 관련된 대중문화 컨텐츠 및 이슈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하며 ‘인종’이라는 문제적인 범주의 형성, 수행, 재생산의 과정을 추적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이나 마치 교양강의를 듣는 듯 무척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어(실제로 저자의 대중강연이 책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아주 흥미롭게 읽었고, 표지도 화려해서(?) 퍽 마음에 들었다. 중‧고등학생들을 상대로 이 책을 읽히면서 독서토론 수업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서 대중교양서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듯하다(최대다수의 독자를 상대로 한 대중서를 쓰려면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아래에는 몇 가지 기억해 둠 직 한 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다.  

19~20세기 영국의 우생학 운동사를 전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시간적 범위를 넓혀 18세기와 21세기에 재현되고 수행된 개념으로서의 인종주의를 소개한다. 인종주의의 기원은 그 출발부터 과학적인 것이라기보다 미학적인 것이었다. 18세기 린네의 분류학과 캄퍼르, 블루멘바흐의 비교인종분류학은 의외로 19세기 인종주의의 직접적 기원이 아니다. 피부색에 따른 차이를 위계화하고 백인 우월주의적 인종관을 정당화한 것은 차라리 빙켈만의 신고전주의 미학과 사진사 조셉 질리(Joseph T. Zealy)의 다게레오타입 사진들이었다. 빙켈만은 하얗게 빛나는 고대 그리스 조각을 이상적인 미술품으로 여기면서 서구의 유서 깊은 ‘색채공포증’에 미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마틴 버낼이 『블랙 아테나』에서 폭로한 바와 같이 이는 서구문화의 기원을 그리스적인 것으로부터 찾고 이집트‧오리엔트 문명과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세기 인종학자 루이스 아기시(Louis Agassiz)는 사진사 조셉 질리에게 의뢰하여 ‘질리 시리즈(Zealy Series)’라고 불리는 ‘인종 샘플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사진들은 유럽인의 초상화와 대조되는 모욕적인 흑인 나체 사진들로, 시각적으로 인종주의를 수행‧재생산하는 효과를 낳았다.

인종주의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거쳐 20세기의 반유대주의와 유대-민족주의, 21세기의 이슬람포비아로 반복 수행된다. 대서양 노예무역 폐지에 대한 유럽의 기념문화는 정작 억압과 착취의 당사자인 흑인 노예들보다 윌버포스(W. Wilberforce) 같은, 노예들을 ‘구원한’ ‘백인’ 노예제 폐지론자에 대한 숭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에릭 윌리엄스는 이를 두고 ‘영국인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예제를 연구한다’고 적절하게 비꼰다. 저자는 이에 맞서 사르키 바트만(사라 바트만)을 비롯한 흑인-여성-노예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고자 한다(‘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은 20세기의 대단히 문제적인 민족이다. 유럽의 오랜 반유대주의와 나치 독일의 학살을 피해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들은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것으로도 모자라 같은 유대민족 내부의 미즈라힘과 베타 유대인을 인종화 하며 유대-민족주의를 강화한다. 21세기의 인종주의는 ‘이슬람 포비아’로 나타난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정체성이 ‘안보화’되어 유럽 내 이슬람 혐오가 확대되었고, 이는 ‘브레이비크 사건’과 같은 혐오범죄로 이어졌다.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과 관련된 유럽 내의 논란은 ‘몸’에 대한 낙인이 비단 생물학적인 의미의 ‘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끝으로 이 책은 한국의 이주노동자 문제를 언급, 한국도 인종주의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상기하며 마무리된다.

 

(쓰다 보니 또 길어지는데) 번외로 한 가지 정리해둘 것은 ‘디아스포라’와 ‘다문화주의’라는 개념어의 문제성에 대한 것이다. 두 개념 모두 얼핏 듣기에 마치 세계 여러 나라의 다종다양한 문화에 대한 존중을 반영한, ‘문화 상대주의’ 정신을 담은 포용적인 개념들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엔 21세기 버전 민족주의의 ‘연성화 된’ 부활이라는 문제적인 맥락이 숨어 있다.

‘디아스포라’는 영토 국가에 국한되지 않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한 탐색이다. ‘우리 민족’이 ‘원래는 모여 있었으나’ 어떤 비극적 계기로 인해 ‘흩어졌으니’ 마땅히 ‘다시 모여야 한다’는 뉘앙스를 상상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셈. 물론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문학 비평에서 쓰일 때에는(‘디아스포라 문학’) 기존의 유럽 중심적인 ‘민족문학’으로부터 벗어나 민족 범주에 묶이지 않는, 목소리를 잃었던 경계선 상의 존재들, 타자들, 이방인들, 소수자들의 서사를 구축해보자는 해방적이고 저항적인 맥락이 있지만 현실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최근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나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타지에 가서 고생하는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과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다(국내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딱 그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같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인 조선족이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방식을 떠올리면 그와 같은 ‘글로벌 핏줄 찾기’의 노력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것이 가장 악마적으로 구현된 사례는 물론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운동과 이스라엘 건국이었을 것이다. 또 최근 중국이 중화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글로벌 중화민족 찾기(만들기)’에 나선 것도 의미심장하다. 결국 오늘날 현실에서 ‘디아스포라’는 민족의 요건을 완화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우리 민족’으로 포섭하려는 국민국가들의 인적 자본 동원 이데올로기로 전락했다. 디아스포라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 대한 호명이, 특정한 맥락에서는 외세에 의해 강제로 흩어져야 했던 민족의 희생자 의식을 자극한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다문화주의는 더욱 명백하게 문제적이다. 다문화주의는 정체성에 대한 ‘문화적 인정(투쟁)’에 기반한 새로운 시민권 모델로, 기존의 자유주의적 시민권 모델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대안으로 90년대에 서구사회에서 일찍이 제안되고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유럽에서 잇따라 실패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다소 남아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다시 권리와 의무의 체계에 입각한 자유주의적 시민권 모델을 보다 포용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선회하는 추세다. 이러한 경향은 다문화주의가 지닌 정치철학적 난점들 속에 예비된 것이었다.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인정’에 집중하는 바람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의 기조 속에서 ‘계급적 분배’의 문제를 주변화 한다. 가령 이주노동자 문제를 ‘계급 문제’가 아닌 ‘다문화 문제’로 간주하는 것은 이주노동자 문제의 계급정치적 맥락을 은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정책’이 (이주노동자의 권리 보장이 아닌)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온정주의적 배려(?) 및 혼혈청소년들의 동화주의적 적응에 초점을 두고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다문화주의 모델 자체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사실 이주민 이슈를 한국사회의 인구 부족 문제와 연결짓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다 - 결혼이주여성들이 '한국인을 더 만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한 다문화주의는 문화적 정체성에 기반하여 권리를 승인하고자 하다 보니 권리의 주체인 이주민들을 특정한 문화적‧종족적 정체성에 종속시킬 위험이 있다. 결국 다문화주의 모델은 ‘우리-문화’와 ‘그들-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적 구별 짓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드러운’ 버전의 은폐된 민족주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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