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태서, <30년의 위기>를 읽고

좀 더 본격적이고 비판적인 긴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시간을 도저히 낼 수 없어 짧게나마 메모를 남기려고 한다.

트럼프 당선이 결코 예외적인 ‘사고’가 아니었으며, 미국사 속에 이미 존재해온 여러 경향성들 중 하나가 특정한 계기로 인해 발현된 것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대내외적인 이유로 인해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라는 점을 상세히 논증하는 것은 2016년 이후 미국론의 기본과제다. 미국 국내정치의 포퓰리즘적인 경향성 강화라는 대내적인 요인과 중국의 부상 및 최근 국제사회의 야단법석(…)이라는 대외적인 요인은 저널리즘적인 수준에서도 누구나 짚어낼 수 있다. 차태서는 이것을 미국사의 맥락 속에 위치 지움으로써 역사적인 층위를 덧댄다. 그러니까 트럼피즘은 국내정치적으로는 잭슨주의, 대외적으로는 닉슨주의의 재탕인데,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미국외교의 사상적인 토대를 제퍼슨주의(공화주의)에서 찾으면서 트럼피즘과 그것의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피즘과 공화주의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해석을 하는 패트릭 드닌(좌)과 대니얼 듀드니(우).

이 논의는 많은 부분 저자의 유학시절 지도교수인 대니얼 듀드니(Daniel Deudney)의 ‘공화주의 안보이론’(Republican Security Theory)에 빚지고 있다. 아메리카 혁명의 결과 도출된 ‘연방’ 개념에는 국내와 국제가 중첩되어 있었으며(가령 ‘미합중국’이 유럽식 근대국가와는 상이한 조직원리에 기초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연방헌법 자체가 주(state)들 사이의 국제평화조약이었다고 보는 식이다), 이것이 미국 예외주의의 본질이자 미국식 ‘탈근대 네트워크 국제질서’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대니얼 듀드니에 의지하여 미국 주도 국제질서의 기원을 ‘공화주의’에서 찾고(‘필라델피아 체제’), 오바마의 ‘동아시아 지역 아키텍처 조형 방식’에도 국내와 국제의 긴장을 유지하는 ‘탈근대 네트워크 외교’가 유지되다가, 트럼프 이후 ‘근대적 완전주권’으로의 퇴행이 벌어졌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퇴행’을 뒷받침하는 것은 네오콘들과 ‘신주권주의 국제법’ 이론가들이다.

그런데 미국의 ‘네트워크’ 외교가 비근대적, 비전형적, ‘예외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탈근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탈근대적’이라는 표현에는 (저자가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 규범적인 뉘앙스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표현 자체가 부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저자의 논의에서는 제퍼슨주의(공화주의)와 잭슨주의(포퓰리즘)의 관계설정이 애매해 보인다. 저자는 패트릭 드닌(Patrick J. Deneen)의 ‘탈자유주의’ 논의를 공화주의와 잭슨주의 사이의 연결고리로 제시하는데, 드닌의 구도에서 보면 트럼피즘은 오히려 철저히 ‘공화주의적’이다. 이는 ‘공화주의적 안보’를 ‘탈근대적’인 것이라고 보고,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근대적 완전주권으로의 회귀’로 규정하는 저자의 논의와 상반되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패트릭 드닌에 대한 저자의 또다른 최근 논평으로는 https://eai.or.kr/new/en/project/view.asp?code=&intSeq=22681&board=kor_issuebriefing&keyword_option=&keyword=&more= 참고)

 

EAI | the East Asia Institute

 

eai.or.kr

 

미국외교행태가 국내정치의 공화주의적 지향에 의해 어떻게 매개되고 있는지가 이 모든 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퍼슨주의와 잭슨주의의 관계에 대한 보다 세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트럼피즘의 정치적 기반 중 하나로 흔히 일컬어지는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의 역사적 기원을 꼭 공화주의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고전적인 좌파적 구도에서 보는 것이 좀 뻔하기는 해도 더 깔끔해 보이는데, 저자와 패트릭 드닌은 왜 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미국사 속의 ‘좌파적 모먼트’들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 주류 미국사가들의 어떤 경향성을 반복하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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