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유대인, 발명된 신화>를 읽고

한겨레신문 국제부 정의길 기자의 세 번째 책이다. 이제 보니 정의길 기자의 책을 모두 읽었다(<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그런데 그의 책들은, 저자의 박학다식함에도 불구하고, 읽을 때마다 묘하게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벌써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중동문제를 다룬 정의길의 <이슬람 전사의 탄생>은, 같은 언론인 출신인 박정욱 PD의 <중동은 왜 싸우는가>보다 훨씬 잘 안 읽혔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문단과 문단, 장과 장, 나아가 책의 전체 구성이 유기적이지 않고 단순 나열식에 가까워서 그런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면, 책 전체가 특집 기사들의 단순 모음집 같다. 이런 방식은 진행자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거나 해당 주제에 대해 ‘썰을 푸는’ 포맷의 대담 프로그램에는 잘 어울리지만(실제로 저자가 각종 영상매체에 출연해서 국제분쟁 이슈를 소개해주는 영상들은 귀에 잘 들어온다), 책으로 출간되면 장황하게 느껴진다. 책 자체가 많은 정보를 단순히 쏟아내고 정리하는 것에 치중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전체 흐름이 잘 정리되지 않고 각 챕터들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문장도 좀 별로다. 사실상 ‘유대인의 모든 것’을 다 정리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책인데, 그러기엔 내용이 얄팍해서 이 책의 내용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유대인의 역사’에 관한 많은 정보를 요약 정리해 놓고 있어서 식견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된다. 독자가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3장과 12, 13, 14장만 읽어도 충분하다.

이 책이 굳이 앞부분에서 성서신학과 이스라엘 고대사까지 소개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성전파괴 이후 가나안으로부터 추방당한 뒤 ‘흩어져버렸고’(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 땅은 무주공산이 되었다는 성서의 서술이 ‘신화’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성서 고고학은 출애굽도, 로마 제국에 의한 대규모 유대인 추방 사건도 발생한 적 자체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지중해 일대의 유대교도들은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인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원주민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것이고, 팔레스타인 지역 원주민인 ‘펠라힌’(fellahin)들, 즉 아랍인들이야말로 성서에 등장하는 유다 왕국의 진정한 후예에 가장 가깝다는 것이 슐로모 산드의 논쟁적인 주장이다(이스라엘 핑켈스타인의 <발굴된 성서(The Bible Unearthed)>와 슐로모 산드의 <만들어진 유대인>은 1980년대 이스라엘 ‘신역사학파’의 대표적인 성과다). 사실 민족주의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만들어진 전통이요 근대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렇게 놀랍거나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유대인의 경우 성서와 기독교의 권위가 끼어들고 있어서, 또 19~20세기 유럽 역사 속 반유대주의로 인하여, 이런 주장 자체가 불온하게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좌)과 슐로모 산드(우)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다른 것보다 요즘 이스라엘 정세가 심상치 않아서다. 신뢰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시선으로 이스라엘의 국내정치 사정을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근 이스라엘 극우 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사법 개혁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긴밀하게 얽혀 있는, 이스라엘의 치열한 국내정치 동학의 결과물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세력은 원래 동유럽 출신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현지인들과의 공존을 추구했다. 실제로 1970년대 이전까지 이스라엘 정치권의 주류는 좌파 노동당이었다. 문제는 건국 이후 이스라엘로 새롭게 유입된 ‘유대인’들이었다. 1차 중동전쟁 중 이스라엘은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작전을 펼쳤고(세파르디 유대인),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유대인들도 대거 이스라엘로 유입됐다. 그러나 기존의 아슈케나지들과 문화적, 정치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이들은 자신들이 차별당하고 있다고 느꼈고, 특히 점령지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랍과 평화협상을 하면 자신들의 거주지를 잃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세파르디와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오늘날 이스라엘 극우파의 핵심 지지세력이다.

70년대 후반 이후 이스라엘 국내정치는 아랍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는 노동당 정부와, 그것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극우 유대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1977년에 세파르디 유대인들의 지지 이탈로 인해 노동당(이츠하크 라빈)에서 리쿠드당(메나헴 베긴)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우경화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협상을 통한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이 모색되고 있었다. 지미 카터 행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평화협상에 대한 압박이 워낙 강해서 대 아랍 강경노선의 리쿠드당 정부조차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상(미국-이스라엘-이집트)에 임해야만 했다. 1991년에는 걸프전 이후 부시 행정부가 중동평화협정을 밀어붙여서 리쿠드당의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가 마드리드 평화회의(1991)에 참여했다. 그러자 이스라엘 극우 정당들이 불만을 표시하면서 연정에서 탈퇴했고, 그 여파로 노동당이 정권을 탈환하게 된다. 라빈 총리 2기와 그 뒤를 이은(라빈 총리는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시몬 페레스의 노동당 정부가 팔레스타인과의 오슬로 평화협정을 강력하게 추진하지만 국내 우파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또 이기지 못했다. 정권이 잠시 네타냐후의 리쿠드당으로 넘어갔다가, 이-팔 분쟁의 피로감이 고조되면서 다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가 정권을 잡았다. 마지막 평화협상의 기회였지만 이미 양분되어 있던 이스라엘 내 여론 지형 속에서 바라크 총리는 힘을 쓰지 못했고, 클린턴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에도 불구하고 오슬로 평화협정은 최종 결렬되고 말았다.

바라크 총리의 뒤를 이어 등장한 아리엘 샤론은 ‘극우 폭주’를 시작한다. 때마침 이 시기는 9.11테러로 인해 “미국-이스라엘-수니파” 대 “이란-레바논(헤즈볼라)-하마스-시아파”의 중동 지정학이 강화된 시기였다. 아리엘 샤론은 ‘테러와의 전쟁’ 구도 속에서 2차 인티파다에 대한 강경 진압은 물론 헤즈볼라 격퇴를 명분으로 레바논 침공까지 감행한다. 샤론의 뒤를 이은 올메르트 총리는 가자 지구를 상대로 한 일방적인 군사공격을 시작했고, 이는 현재 네타냐후 정부 시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네타냐후의 反팔레스타인 기조와 유대 민족주의는 트럼프 행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현재 네타냐후와 리쿠드당은 이스라엘의 확고한 제1당으로서 사법개혁마저 시도하면서 이스라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종족주의’가 이스라엘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는 슐로모 산드의 지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하겠다.

바이든과 네타냐후

이스라엘의 경우가 국제적인 평화협상 시도에 대한 반동으로 국내에서 극우 세력이 부상한 것으로서 피터 구레비치가 말한 ‘2차 이미지 역전’ 현상이었다면(국내정치가 국제관계에 종속), 미국의 상황은 반대로 국내정치가 대외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존 미어샤이머와 스티븐 월트는 2006년에 미국의 중동 정책이 국내정치(‘이스라엘 로비’)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며 미국이 이스라엘에게 ‘비정상적인 관대함’을 베풀고 있다고 비판했다(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대명사와도 같은 두 사람은 이 글로 ‘반유대주의자’라며 격렬하게 비난 당했다). 이것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이 미국외교를 비판하는 방식인데, 탈냉전기 미국 외교가 이익과 전략에 기반한 현실주의 외교가 아니라 자유주의 및 개신교-보수주의 이념에 기초한 가치외교였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떨까? ‘민주주의 외교’와 ‘가치 외교’를 내세운 바이든 정부지만 지금 이스라엘에 대해서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려를 표명하는 것 정도다. 누구든 미국에서 그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미국 내 개신교 보수주의 세력으로부터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지난 7월에 결국 미국은 관행대로 네타냐후 총리를 미국에 초청했다. 중국이 사우디-이란 중재를 주선하는 등 중동 내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 속에서, 네타냐후가 중국을 먼저 만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단극적 순간(unipolar moment)’을 누리던 탈냉전기 미국외교와 미중 패권경쟁기 미국외교는 겉모습은 같을지 몰라도(‘가치 외교’) 근본적인 작동방식은 상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과거 평화협정 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상한 이스라엘 극우세력은 이제 거꾸로 이스라엘의 대외정책을 좌지우지할 힘을 지니게 되었다. 네타냐후가 시도하고 있는 사법개혁은 행정부에 대한 대내적인 제어 장치를 하나 없애는 것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시민들의 인권에 대한 최후의 방어수단으로서 이스라엘 법원을 무력화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단순한 내정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희망은 이스라엘의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사회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현재 6개월 넘게 반정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안전과 평화는 이들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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