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문제 완전정복

(이 글은 박정욱의 『중동은 왜 싸우는가?』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음)

 

중동은 세계사 공부를 할 때 섭렵하기 가장 난감한 ‘최고난이도’의 지역이 아닌가 싶다. 역사 자체가 길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한 두 군데가 아니며, 등장하는 민족도 여럿이다. 게다가 그들의 주된 이념인 이슬람주의는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낯설기 짝이 없다.

 

흔히 언론이 중동 관련 뉴스를 다루면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에 대해 설명해주겠다고 무려(!) 그 시작인 4대 칼리프의 계승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문제는 그것만 다루고 갑자기 오늘의 중동 뉴스로 점프한다는 것), 이는 사실 난센스다. 수니파와 시아파가 갈라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인 것은 맞지만, 현재 중동이 겪고 있는 고통의 역사적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면 그 역사를 전부 다 알 필요는 없다(그것은 ‘투머치’이다). 언제를 중동 지역 ‘근대’의 시작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한 후, 그 이전의 역사는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출발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를 이슬람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 너무 욕심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 생각에 이 지역의 오늘을 알기 위해서는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건국(1954)과 그 반작용인 나세르식 ‘아랍 민족주의’의 부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1차 세계대전때 영국이 저지른 ‘삼중 사기’의 결과이다. 1차 세계대전은 결국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과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 제국의 ‘삼국동맹’이 벌인 전쟁이다. 영국은 적국인 오스만 제국 내 아랍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오스만 제국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고자 했다. 영국의 표적은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였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적인 의미가 큰 헤자즈 지역의 메카에 대해서 아랍인의 자치권을 인정해왔는데, 그 수장을 ‘샤리프’라고 부른다. 아마도 가톨릭으로 치면 바티칸의 교황과 비슷한 위치일 것이다. 이 ‘이슬람 교황’은 상징성과 영향력의 측면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부흥하기에 너무나 좋은 캐릭터였다.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판무관이었던 맥마흔과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국가 건설을 영국이 지원하도록 약속하는 내용의 서한을 주고받는다(후세인-맥마흔 서한). 이후에 영국이 맺는 이율배반적인 대외협정으로 볼 때 영국은 아랍국가 건설에 사실 관심이 없었던 듯하지만, 후세인은 기대하는 바가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이 영국의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었다면, 프랑스와 맺었던 사이크스-피코 밀약은 영국의 진의를 보여주는 협정이다. 전쟁이 끝나면 영국은 이라크를, 프랑스는 시리아를 차지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공동관리하자는 내용이었다. 동맹국임에도 제대로 끼지 못한 러시아는 결국 10월 혁명 이후에 이 밀약을 세상에 폭로해버린다.

 

밸푸어 선언은 유럽 내 유대인들의 오랜 로비의 결과이다. 유럽 내의 반유대주의 정서는 오래된 것이지만, 프랑스 제3 공화정의 ‘드레퓌스 사건’은 결정적으로 시오니즘 운동(테어도어 헤르츨)을 부추겼다. 사실 이때의 시오니즘은 유대교적 정체성의 발로인 것은 아니고, 일종의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에 가깝다. 시오니즘을 주도한 유럽 내 유대인 지식인들(아쉬케나지)은 유대교적 정체성은 희박했던 것에 비해, 유럽에 머무르면서 접한 계몽주의와 사회주의에 고무되어 있었고, 유럽의 국민국가 건설을 지켜보면서 유대국가 건설을 꿈꾸게 되었다. 이미 서구화된 이들이 레반트 지역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리엔탈리즘적인 낭만주의에 가까웠다.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두고 ‘계몽된 정복’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로스차일드 등 유대인 자본가의 오랜 로비의 결과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밸푸어 선언). 이렇듯 전쟁 중에 영국은 레반트 지역을 두고 자국의 욕심을 드러내는 한편, 유대인-아랍인과 각각 상이한 약속을 하면서 오늘날 중동 분쟁의 1차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영국은 이 지역을 자기들이 차지해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끝난 후 산레모 협정(1920)을 통해 사이크스-피코 밀약으로 정해놓았던 국경을 확정,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맥마흔과 서한을 주고받으며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 받았던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은 분개했다. 후세인의 셋째 아들인 파이잘은 시리아의 국왕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시리아를 차지하도록 되어있던 프랑스는 전쟁을 통해 그를 시리아에서 쫓아내 버린다. 이들 하심 가문은 원래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헤자즈 지역마저 사우드 가문에게 빼앗기면서 갈 곳을 잃는다. 후세인이 영국에 강하게 항의한 결과, 영국은 지정학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트란스요르단을 하심 가문에게 넘겨주고, 후세인의 둘째 아들인 압둘라가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이 된다. 그러자 프랑스의 지배에 반발하던 시리아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결집하면서 프랑스는 불만이 높아지고, 영국도 프랑스와의 약속을 어기는 모양새가 되어 아랍인들에게 경고를 날린다. 결국 압둘라 왕은 시리아에 모여든 민족주의자들을 추방해버린다. 한편, 산레모 협정의 결과 이라크를 차지한 영국은 이라크인들의 거센 반란을 감당해야 했는데, 결국 이라크 직접통치를 포기하고 (시리아에서 쫓겨났던) 파이잘을 이라크 왕국의 국왕으로 내세워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때 샤리프 후세인이 영국으로부터 약속 받았던 것은 하심 가문의 중동지역에 대한 영향력이었지, 아랍 민중의 민족주의적 염원을 염두에 둔 국민국가 건설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요르단과 이라크에 명목상의 왕국을 건설해준 것만으로 영국은 맥마흔-후세인 서한에서 했던 약속을 나름대로 이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이 왕조를 인정하는 것에 큰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라크 왕국은 이후 친영국 괴뢰정권으로 인식되어 본격적인 아랍 민족주의 부흥의 흐름을 타고 1958년 쿠데타라 붕괴한다(이집트도 마찬가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리아에서도 지속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이 일어나고, 프랑스는 결국 1946년에 시리아 일대에서 철수한다.

 

1920년대 영국 자치령 팔레스타인 하에서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본격화되었다. 유대인 자본가들이 돈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매입하면, 유대인들은 정착해서 코뮌(소규모 공동체)과 키부츠(집단농장)를 경영하는 방식으로 레반트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미국의 관계를 떠올리면 초기 정착 유대인들의 사회주의 성향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불만이 쌓인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때부터 유대인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은 민병대(하가니, 이르군, 스턴갱)를 조직하면서 이에 대응했다. 1936년에는 팔레스타인이 對영국-對유대 폭력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는데, 영국은 강경진압으로 맞섰다. 몇 차례의 중재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1948년에 UN이 제출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통과되며 레반트 지역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독립한다. 그런데 기존의 인구구성을 고려하면 이 분할안은 명백히 팔레스타인에게 불리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분할안 통과는 사실상 아랍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양차 대전 내내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한껏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스라엘은 홀로 대규모의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으로 구성된 아랍연합군을 상대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독립을 건 전쟁이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모세 다얀 장군 등의 활약으로 이스라엘은 승리를 거둔다. 이 1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아랍 국가들은 충격을 받고 각종 국내 소요사태와 쿠데타로 후유증을 경험하면서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중동 지역의 근현대사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근대화 의제’를 중심에 두고 파악해야 한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신생국의 독립과 근대화는 20세기 역사의 핵심주제 중 하나다. 동아시아 지역은 ‘발전국가’ 모델로 근대화에 성공한 바 있다. 중동 지역은 ‘탈이슬람(세속주의)’ 모델로 근대화를 시도했던 셈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그어 놓은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아랍 민족주의’를 부흥시켜서 전근대적인 이슬람주의 신정국가에서 벗어나 세속주의 공화정으로 도약하는 것이 1950년대~60년대 중동의 근대화 모델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는 50년대 중동 근대화의 구호였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이집트의 나세르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당시에도 이슬람 왕정국가로 남아 있으면서 이슬람 원리주의를 배태하고 있었다.) 이들은 권위주의 독재를 통해 유럽식 근대화를 성취하고자 했다.

 

아랍 민족주의의 흐름
시기 내용 결과
1차 세계대전 反오스만 투쟁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 받고 반오스만투쟁(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하나 제국주의 열강의 기만으로 좌절.
이라크, 요르단에 하심 가문 왕조 건립.
1920~1940 反제국주의 투쟁 영국 철수(이라크), 프랑스 철수(시리아, 레바논)
1950~1970 친-나세르주의 제 2차, 3차 중동전쟁 / 시리아와 이집트 통합

 

50년대 아랍 민족주의의 구심점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집트의 나세르였다. 당시는 전통적으로 중동에서 패권을 행사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쇠퇴하고, 미국과 소련이 부상하여 본격적인 냉전체제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나세르가 이집트의 경제개발과 군비 증강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버리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2차 중동전쟁이 벌어진다. 수에즈 운하의 원래 주인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다. 군사적으로는 이집트의 피해가 더 컸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의 압박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집트의 우방국이었던 소련은 영국을 위협했고, 미국 역시 아랍인들의 여론을 의식해서 영국과 프랑스에 경고했다. 결과적으로 자력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중동에서 몰아낸 모양새가 된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마치 18세기에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전파했던 것처럼, 중동 각지에서 친나세르-아랍 민족주의 운동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리아는 자진해서 이집트에 흡수 통합되며 ‘아랍 연방 공화국’이 출범했고, 이라크에서는 세속주의 쿠데타가 발생하며 하심 왕조가 무너졌으며, 요르단과 레바논에서도 친나세르 소요가 발생했다. (시리아는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프랑스를 쫓아낸 경험이 있어 상대적으로 세속주의가 우세했고(바트당), 나세르 역시 1967년 예멘 내전 때 공화파를 지원하는 등 세속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음) 이 시기 중동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꺾어야만 했다. 나세르가 아랍 국가들을 동원하며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위기를 느낀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감행하면서 3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다.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참모총장과 모세 다얀 국방부 장관의 놀라운 판단력과 활약으로 범아랍진영이 완패하면서 나세르가 주도하던 아랍 민족주의는 기가 완전히 꺾이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이슬람주의가 부활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중동은 결과적으로 세속주의 근대화 모델을 폐기했다. 그 대안으로 중동 전역에 잠들어 있던 ‘이슬람주의’가 부활했다. 이슬람주의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현실정치에 적용하자는 정치적 이념이다. 이들이 보기에 세속주의자들이 추진하는 서구화는 이미 파탄이 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며, 이것으로는 중동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었다. 이슬람주의의 부활은 세속주의 근대화 과정에서 누적된 부정부패, 인권탄압, 부의 불평등, 물가상승과 같은 사회 저변의 불만들이 폭발한 결과이기도 했다. ‘근대화의 위기’ 국면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로 이행했다면(한국과 대만, 그리고 실패했지만 중국의 천안문 시위), 중동 국가들은 이슬람주의로 ‘퇴행’한 것이다. 그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수천년간 쌓여온 문화적 습속 탓도 있겠지만, 난데없이 레반트 지역에 버티고 있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3차 중동전쟁의 대패)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중동 사회의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해없이 이슬람주의를 종교적 광신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70년대 이후 중동 사회에서 서구식 근대화의 대안으로 떠오른 이슬람주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념인 ‘와하비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맞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이슬람주의 세력은 20세기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 활동을 시작한 무슬림형제단은 원래 근대적인 수단을 통해 이슬람을 전파하자는 취지의 대중단체로, 봉사활동이나 소년클럽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창시자인 하산 알 반나 역시 매우 보수적인 무슬림 출신이긴 하지만 폭력적인 수단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었다. 이들의 본격적인 ‘악명’은 이 단체 출신 사이드 쿠틉 때부터 유효하다. 나세르 정권 때 탄압을 받으며 과잉 정치화된 것도 이들이 테러조직화 되는데 일조했다. 1978년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 원리주의 부상의 분기점이다. 1980년에 호메이니가 후세인과 벌인 이란-이라크 전쟁은 중동 세계의 향방을 두고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가 맞붙은 전쟁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아랍의 봄’은 내전으로 이어지면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다시 한번 국제사회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였다.

 

호메이니의 이란혁명 이전까지 이란은 사파비 왕조로부터 아프샤르 왕조, 카자르 왕조, 팔라비 왕조를 거쳐야 했다. 원래 이란은 아랍인과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따라서 아랍 민족주의 부흥과 별도로 세속주의 왕정이 성립되어 있었다). 이들이 어떤 경로로 오늘날 이슬람 시아파의 맹주국이 되었는지는 중동사 공부의 주요 논점 중 하나다. 페르시아 제국과 조로아스터교로 정체화되는 이란인들이 이슬람 문명권과 섞이게 된 최초의 계기는 이슬람 제국(우마이야 왕조)이, 제국운영의 경험이 있는 페르시아인들을 관료로 등용한 것이었다. 페르시아 계열의 시아파 왕조인 부와이흐 왕조는 압바스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여 실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적인 정체성은 이후 400여년간 몽골계 제국들의 지배를 받으며 약화되었다. 오늘날과 가까운 의미의 ‘이란인’은 쿠르드족과 튀르크족 계열의 ‘사파비 부족’으로부터 연원한다. 16세기 초에 등장한 사파비 왕조의 초대 군주인 이스마일 1세는 페르시아 정체성을 강력하게 띄었다.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오스만 제국(수니파)과 차별화하기 위해 강압적인 시아파 강제 개종 정책을 추진했다.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직접 맞붙은 찰디란 전투 이후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중시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 노릇을 하게 된 경위이다. 사파비 왕조는 이란인들의 마지막 부흥기였다. 사파비 왕조 이후의 카자르 왕조는 존속했던 기간 내내 영국과 소련 등 외세의 개입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할 기회가 없었다. 팔라비 왕조를 세운 레자 칸이 친나치 노선을 걷자 영국과 소련은 기겁을 하고 1941년 이란을 침공하기도 한다. 팔라비 왕조의 두번째 군주인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시대에 야당인 국민전선 출신 총리 모사데그는 정치개혁을 비롯한 각종 근대화를 추진하고, 자주적인 국정운영을 위해 석유를 국유화하는 등 세속주의 개혁으로 국민적인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미국과 영국의 도움을 받아 팔라비 왕은 모사데그를 축출하고, 자기만의 ‘백색혁명’을 추진하지만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경제성장을 하긴 했다). 결국 이 시기에 누적된 불만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으로 표출되며 정권이 무너진다. 이란의 실패한 근대화와 터키의 성공적인 근대화는 여러모로 비교할 만하다. 이란은 근대화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반면, 터키는 적극적으로 외세를 차단하며 근대화를 진행했다.

 

호메이니가 세운 이란 공화국은 전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이슬람주의 공화정이었다. 나세르 때 세속주의 소요가 중동을 휩쓴 것처럼, 이슬람주의 국가가 현실화된 것을 목도한 중동은 (시아파) 이슬람주의 소요에 휩싸였다. 대표적인 곳이 친소련 정부가 들어섰던 아프가니스탄이다. 무신론 정권에 맞서 이슬람주의자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요청으로 소련이 소요 진압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 전쟁은 ‘지하드’로 인식되어 중동 각지로부터 무자헤딘을 자처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모여 소련에 맞섰다. 소련이 후퇴한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했던 이슬람주의자들이 각자 자국으로 귀국해서 원리주의 운동을 개시했다. 9.11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도 이곳 출신이다. 소련 후퇴 후,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남부의 이슬람원리주의 단체 탈레반에 의해 장악되었고, 탈레반은 알카에다를 아프가니스탄에서 품어주며 긴요한 관계를 맺는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학교와 같은 곳이었다.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깜짝 놀란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 내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끌어들여 이라크를 쫓아내는데(걸프전쟁), 이때 중동에 반미정서가 불타올랐다. 이슬람 원리주의의 관점에서는 같은 무슬림(후세인)을 쫓아내기 위해 십자군(미국)을 자국에 주둔시킨 것이었기 때문이다. 알카에다가 미국을 적으로 지목하는 선언(1998)을 한 것도 이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

 

9.11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킨 미국은 ‘잠재적 위협’인 이라크까지 무너뜨리겠다며 근거 없는 전쟁(이라크 전쟁)을 일으킨다. 이때 미국이 후세인을 축출한 것은 결정적으로 중동 내 힘의 균형을 깨뜨리며 이슬람주의가 완전히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세인은 강력한 세속주의 독재를 통해 중동의 무슬림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수니파인 후세인이 사라지자 이라크 내의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이슬람주의를 내세우며 권력을 장악했다. 정규군 출신 수니파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원리주의 무장세력에 흡수됐다. 아무런 계획없이 후세인만 제거하자 권력의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두고 중동 지역의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세력들이 군웅할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2010년이 되어서야 이라크에서 철수한다.

 

이슬람 근본주의 무장단체의 부활
근본원인 중동 세속주의 근대화 실패 (제3차 중동전쟁 등)
촉발계기 이란 혁명(1979) → 이슬람주의 자극
직접원인 1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989) → 무자헤딘의 결집
→ 지하디스트들 각국으로 돌아가 원리주의 운동 개시, 무장단체 확산
2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1990) → 사우디아라비아 요청으로 미국 개입(걸프전쟁)
→ 사우디아라비아 내 반미, 이슬람주의 자극
3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크 전쟁, 2003) → 후세인 축출
→ 이라크 내 이슬람주의 부상

 

6일 전쟁은 중동 지역 내 이스라엘의 힘의 우위를 분명히 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의 양상을 바꾸어 놓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가지지구, 서안지구와 각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와 요르단의 의지, 이들과 이스라엘의 힘의 균형이 중요했다. 그러나 6일 전쟁의 여파로 이집트-요르단을 비롯한 아랍국가들은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아랍 민족주의의 쇠퇴) 독립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산하의 과격단체 ‘검은 9월단’이 요르단 총리를 암살한 것도 계기가 됐다. 이때 등장한 팔레스타인의 지도자가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아라파트는 테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한편,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각종 차별에 시달렸고, 높은 실업률로 고통받고 있었다. 레반트 지역에서 지속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크고 작은 충돌은 이스라엘의 군용트럭에 가자지구 주민 4명이 압사한 사건을 계기로 폭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1차 인티파다, 1987~1994), 이때 서안지구는 전국봉기지도부연합(UNLU)을, 가자지구는 하마스를 조직하며 시위를 확대시켰다. UNLU는 세속주의 성향이 강했고, 하마스는 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했는데, 이스라엘 정부의 전략적인 이간질로 두 세력은 거리가 점점 더 멀어졌다. 조지 부시 대통령의 주재로 1994년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며 인티파다는 잠정 종결됐지만,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을 계기로 양국에서 극우파가 집권하면서 내전 수준의 2차 인티파다가 발생하고 만다. 이스라엘은 유혈학살을 자행했고 팔레스타인은 자살폭탄테러를 일삼았다. 서안지구를 장악하고 있는 온건파 파타와 가자지구의 강경파 (테러조직) 하마스는 현재까지도 이스라엘과 분쟁 중이다.

팔레스타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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