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화 운동의 바람직한 방향

90년대 왕가위 영화의 묵시록적인 분위기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1989년 중국 본토의 천안문 학살을 목도한 홍콩시민들이 느꼈던, 자신들이 그와 같은 야만적인 체제에 편입되게 될 ‘8년 뒤’에 대한 불안과 체념의 반영이다. 천안문 사건 이후 많은 홍콩 시민들은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서방국가로 ‘탈출’을 감행했지만, 그럴 여력이 없었던 이들은 홍콩에 남아있어야 했다. 왕가위의 90년대 영화들의 근저에는 이들 잔류자들의 ‘자포자기의 정서’가 놓여있다.

 

홍콩의 정서는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홍콩 정체성’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친중과 친서방을 진동하며 성립되었다. 홍콩의 역사는 1840년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아편전쟁의 결과 홍콩은 제국주의 영국의 손에 넘어갔고, 그 후 1997년 반환까지 150년이 넘는 세월을 (일본 제국주의 시절 약 4년을 제외하고는) 서방세계의 일부로 있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중국의 전략적 필요에 의해 홍콩은 영국의 일부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절 눈에 띄는 사건은 1967년의 67폭동이다. 이것은 본토에서 벌어지던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마오주의-반영제국주의 폭력시위였다. 이 시기 홍콩내에서의 친중은 반제국주의적 마오주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폭력시위를 계기로 영국 당국은 홍콩 사회 내의 여러 사회적 요구들을 받아들였고, 홍콩은 세계적인 금융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67폭동 이후 폭력시위는 홍콩 사회 내에서 터부시되었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파괴된 중화의 요소들이 홍콩에서는 일부 유지되기도 했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달리 대외교류가 많았기 때문에 홍콩에서 유지되었던 중국적인 문화요소들은 중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홍콩의 무협영화나 치파오, 광동어 등이 많은 부분 중국의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부터 이미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있었던 조약을 무효로 취급했고, 지정학적인 특성상 중국은 홍콩을 언제든지 무력으로 점령해버릴 수 있어 영국의 입장에서는 홍콩 점거의 의미가 없었다. 결국 1984년 대처와 덩샤오핑의 협상으로 영국이 홍콩을 1997년에 중국에 반환하기로 했다(중영공동선언). 홍콩은 ‘고도자치’, ‘일국양제’, ‘항인지항’의 원칙 하에 1997년부터 2047년까지 중국의 특별행정자치구로서 체제를 보장받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지속적으로 홍콩의 자치를 위협했다. 2003년 국가보안법, 2012년 조슈아 웡이 주도했던 국민교육 반대 시위, 2014년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던 우산혁명, 2016년 노점상 보호를 외친 피쉬볼 혁명, 2017-18년의 범죄인 송환법 반대시위, 그리고 2019년 결국 패배로 끝난 홍콩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홍콩 시위의 일관된 요구는 중국 대륙이 제국주의적 횡포로부터 ‘일국양제’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불과 50년전에는 영국에 반대하며 중국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오늘날엔 중국에 반대하면서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게 해달라고 항의하는 셈이다. 이것은 홍콩 사회가 한 차례 세대 교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근 홍콩 시위는 홍콩 반환 이후 출생한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홍콩 반환 이전 세대와 달리 이들 신세대 시민들은 일종의 영국 시민권인 ‘BNO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탈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에게 홍콩의 자치 문제는 더욱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우산혁명

눈 여겨 볼 것은 특히 시진핑 체제의 등장 이후 시위의 강도와 빈도가 거세어졌다는 것이다. 홍콩 뿐만 아니라 신장 위구르, 티베트, 내몽골 자치구 등 일체의 분리주의에 대한 시진핑 체제의 거친 탄압은 시진핑 체제의 등장 배경과 성격을 고려할 때 필연적인 일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위기의식이 본격화되었고, 오바마 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해 이른바 ‘아시아로의 회귀’를 외교정책 기조로 삼기에 이른다. 2015-16년에는 미중외교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중국은 ‘중국제조 2025’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대한 경제 추격을 기정사실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공산당은 이전까지의 정권 이양 패턴을 깨고 이례적으로 전임자의 수렴청정 없이, 당-군-정의 전권을 시진핑에게 부여, 일인 독재적인 ‘시진핑 체제’를 탄생시켰다. 시진핑 체제의 제국주의적인 성격은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 시위는 중국 제국주의에 대한 간헐적이고 국지적인 저항운동의 한 반영이자 그 대표이다. 운동 내부에서는 아예 홍콩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본토주의)나 중국 내에서 광범위한 자치를 보장받을 것을 요구하는 민주파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고 있지만, 보다 바람직한 운동의 방향은 중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세력(예컨대 대륙의 농민공)과 연대하여 운동을 보다 급진화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전명윤, 리멤버 홍콩)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