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윤형, <아베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내정치와 대외정책

 

한겨레 도쿄특파원을 지낸 길윤형 기자가 쓴 일본정치 관련 책이다. 아베의 정치적 입장을 그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사상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아베의 등장을 일본 정치 내부의 동학에 따른 결과로 파악한다.

 

1) 아베의 사상적 기원: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

기시 노부스케는 유년 시절 요시다 쇼인을 비롯한 ‘메이지 지사들’과 2. 26 쿠데타의 설계자인 기타 잇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서 ‘엘리트에 의한 영도’에 대해 강한 소신을 갖게 된다. 기시는 만주국에서 산업정책을 총괄했고, 태평양 전쟁 때는 대일본제국의 군수차관을 지냈다(“무관의 최고 책임자가 도조였다면, 문관의 최고 책임자는 기시였다”). 이 일로 기시는 A급 전범 ‘의혹’을 받아 스가모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고 정계에 복귀한다. 그가 반공사상과 풍부한 행정경험을 지녔기 때문에 미국이 재기를 허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후 일본의 두 패러다임, 보수본류의 요시다 시게루(좌)와 보수방류의 기시 노부스케(우)

기시가 수감 중일 때 정권을 차지한 것은 요시다 시게루였는데, 요시다는 전후 일본의 재건과 국가전략 노선을 세운 인물로, 이후 일본 정치에서 실리노선을 대표하는 ‘보수 본류’의 원조로 여겨진다. 그가 내세운 ‘요시다 독트린’은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부흥에 집중하는 것으로, 헌법 수호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는다.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가 된 뒤 요시다 내각의 모든 것을 뒤집으려고 했다. 기시의 ‘反요시다 사상’은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각’과 ‘복고주의’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독특한 반미주의’와 연결된다. 기시에게 일본의 ‘좋았던 시절’은 러시아와 청나라를 격파하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으로, 이 입장에 따르면 일본의 진정한 ‘자주독립’과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은 미국과의 관계를 쌍무적 관계로 ‘정상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자신이 직접 관여했던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역사 수정주의’ 입장을 견지한다. 이런 식의 자주노선은 일본의 ‘보수방류’ 흐름을 대표한다. 기시는 이런 맥락에서 아이젠하워와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추진하는데, 이때 그는 일본사회의 완강한 반대(안보투쟁)에 부딪혀 실각했다. 아베의 친가는 비교적 양심적 정치세력의 대표였으나, 아베의 정치적입장은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한편, 기시는 ‘안보’와 ‘개헌’ 외에 ‘일본식 사회보장’을 중시하는 복합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실제로 기시 내각 때 ‘국민연금(1959)’, ‘최저임금법(1959)’ 등이 실현되기도 한다. ‘성장’을 중시하고 ‘부패’와 ‘빈곤’을 추방하자는 기시의 입장은 그의 만주국 경험과도 관련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베의 ‘아베노믹스 2기’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개혁(고이즈미)과 달리 임금인상과 사회보장(육아지원) 등을 수반하는 공동체주의적 면모를 보인 이유다.

 

2) 자민당 파벌정치사: 보수 방류의 주류화

아베의 등장은 일본정치의 내부동학의 결과이다. 그의 등장은 보수본류의 붕괴와 우익의 위기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자민당 독주 체제(55년 체제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내각 출범 전까지 38년) 속에서도 주류는 보수본류였고, 보수방류는 비주류였다. 보수본류는 다시 이케다 하야토의 ‘굉지회(고치카이)’와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사토 에이사쿠의 ‘경세회(게이세이카이)’로 나뉘는데, 이들은 기시의 실각 이후 다시 ‘요시다 체제’를 복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케다 하야토는 절대로 헌법개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국민소득 배중계획’을 발표하여 일본을 고도성장기에 진입시켰다. 사토 에이사쿠 역시 경제성장과 함께 오키나와 반환, 비핵3원칙 등 실리 정책을 추진했으며, 일본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어 놓았다(1968년).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가 이끌었던 시기는 일본 자민당의 최전성기였다.

굉지회의 이케다 하야토(좌)와 경세회의 사토 에이사쿠(우)

사토 에이사쿠의 후임자 문제를 두고 후쿠다 다케오와 정치적 경쟁을 벌인 끝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에 취임한다(각복전쟁). 다나카는 국토균형발전의 비전을 제시하고(열도개조론)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자민당식 분배정치 모델’을 완성하는 한편, 집단적 자위권은 헌법의 제약으로 ‘행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처음 내놓았다. 그러나 다나카는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에 의한 ‘록히드 사건’ 폭로로 실각했고, 당내의 진보적 정치인이었던 ‘보수 지류’ 미키 다케오에게 내각을 내주었다. 미키 내각은 ‘일본의 방위비를 국민총생산의 1%로 제한한다’는 원칙을 천명하는 등 자민당의 헌법수호의지를 정식화 했다. 그러나 전직 총리 다나카에 대한 원칙적인 사법처리에 불만을 품은 당원들에 의한 ‘미키 퇴진운동’으로 미키파(정책연구회)와 나카소네파(지사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이 反미키 전선을 구축하자, 미키는 사임한다.

70~80년대 일본정치의 '야미 쇼군' 다나카 가쿠에이

미키 퇴임 이후에는 기시 노부스케의 직계인 ‘보수 방류’ 후쿠다 다케오가 총리직에 오른다(다나카가 막후에서 최대정적인 후쿠다와 야합한 것이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어둠의 쇼군(야미쇼군)’이라고 불릴 만큼 퇴임 후에도 인맥과 돈을 이용해 막후실세로서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후의 스즈키 젠코,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의 출범까지 좌지우지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다케시타가 경세회를 장악하면서 다나카파는 위축되기 시작하고, 10여년 뒤 고이즈미의 우정개혁과정에서 ‘공천학살’당함으로써 다나카파는 완전히 몰락한다. 이들 보수본류가 권력을 차지했던 60년대~90년대 초까지의 일본사회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고 시민사회가 반핵평화운동을 벌이는 등, 리버럴한 사회분위기와 전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시기였다.

두 번이나 일본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거물 정객' 오자와 이치로
일본 우익의 위기의식을 야기한 최초의 비자민 연립내각(1993~1996). 왼쪽부터 호소카와 - 하타 - 무라야마 총리.

자민당의 독주체제를 깨뜨린 것은 1993년 6월, 경세회의 2인자였던 ‘오자와 이치로’의 탈당이었다. 오자와는 신생당을 창당하고, 사회당, 공명당 등과 함께 ‘호소카와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오자와의 탈당으로 인한 경세회의 분열은 보수본류의 약화로 이어졌고, 이들의 ‘실리주의 가치’ 역시 당내 역학관계 속에서 위협받게 되었다. 권력을 빼앗긴 일본 우익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한 번도 빼앗긴 적이 없었던 권력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호소카와가 ‘침략전쟁’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뒤이어 취임한 사회당 출신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반성적인 역사관을 담은 ‘종전 50주년 기념 국회결의’을 추진하다가 좌초되자 이를 아예 총리담화로 만들어버린다. 1996년에는 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 집어넣겠다는 문부과학성의 검정결과 발표까지 있었다. 이 당시에 처음 제기되었던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는 줄곧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일본을 단숨에 피해자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아베는 바로 이 일본인 납치문제를 제기하면서 성장한 정치인 중 한 사람이다. 90년대 초반, 경제불안과 함께 보수본류의 정치적 위기와 우익 내셔널리즘을 자극하는 상황들이 겹치면서 오늘날의 일본 우익(청화회)이 부상하게 된 것이다.

 

3) 2010년대 이후 일본의 대외관계

개헌과 안보이슈를 중시하는 보수방류 세력의 주류화는 일본의 대외정책 변화와 직결된다. 일본 대외정책의 결정 요인으로 일본 내 정치엘리트의 리더십 변화를 들 수 있는 것이다. 보수방류가 주도한 2010년대 일본 대외정책은 크게 미일관계, 북일관계, 중일관계와 한일관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미일동맹은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영역이다. 일본과 미국은 모두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공통관심사가 있다. 이는 기시 노부스케 이래 미국과 일본의 ‘대등한’ 동맹이라는 아베의 개인적 야망과도 공명한다. 미국은 2013년 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에서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바란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아베는 이후 헌법 해석 변경(2014) –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2015) – 국내관련법령 정비(2015)를 통해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일본은 이를 통해 외교적 운신의 폭을 크게 넓혔다. 단적인 예로, 일본은 유사시 한반도에 자위대를 상륙시킬 수 있으며, 북한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 이러한 아베의 해석개헌은 1972년 다나카 수상의 해석을 뒤집은 것이다. 집단적 자위권이란 동맹국이 공격받았을 때, 일본이 직접 공격당하지 않아도 적국을 공격할 수 있는 권리인데, 일본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헌법상의 제약으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종전까지의 해석이었다. 그런데 아베는 내각법제처 장관 인사를 통해서 그 해석을 변경한다(“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아도 동맹국을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다”). 2015년 안보법제 개정 시에는 일본시민사회의 반대가 심했지만 아베는 개정안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다. 

 

북일관계는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선언 계획으로부터 시작한다. 2002년 남북의 6.15 공동선언과 같은 해 9월 고이즈미의 평양방문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바꿀 수도 있었던 모험이었다. 그러나 미국 네오콘들의 강력한 견제와 2002년 10월 2차 북핵위기 발생으로 이 모험은 좌절된다.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일본에게 사과하면서 사실 관계를 시인하자, 일본내 대북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아베는 이때 ‘대북강경노선’을 주장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결정적으로 일본은 일시귀국한 납치피해자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지 않음으로써 북일국교정상화를 무산시켰다. 아베는 납북자 문제를 해결할 정치인으로 보였지만 1차 내각때는 강경책만을 고집하며 성과가 없었다. 2차 내각 때인 2014년에는 ‘스톡홀름 합의’를 통해 이 문제가 진전되는가 싶었지만, 아베에게 납치자 문제는 애초에 자신의 지지율 상승 수단에 불과했다. 일본은 이미 사망한 납치 피해자들을 살려내라는 식의 주장을 계속했고 스톡홀름 합의는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의 상징적인 인물은 열세살에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자살한 요코타 메구미이다) 한편, 센카쿠 열도와 관련된 중일관계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한일관계 역시 일본 보수세력의 리더십 변수와 연계하여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일외교전은 전후 신생국과 패전국 사이의, 인류의 양심을 건 ‘정의의 싸움’이라는 측면이 있다. 이 외교전쟁은 양국이 기존의 외교적 합의를 ‘해체’하거나 ‘봉인’하는 것을 반복하는 식으로 벌어져 왔다.

인권운동가 김학순(1924~1997)과 이용수(1928~)

원래 한일관계는 1965년의 한일협정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 한일협정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서 ‘일본이 한국에게 5억 달러에 달하는 유무상의 경제지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한국인의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실명증언과 1992년 일본 방위청연구소에서의 증거문서 발견으로 일본은 기존의 입장(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관여하지 않았다)을 번복해야 했다. 미야자와 내각은 1993년 고노 담화를 통해 1)일본정부(군)의 관여와 2)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미 해결됐으니 국가가 이를 다시 배상할 수는 없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이었다(그러나 1965년 협정은 한일의 분리 과정에서 발생한 재산상 대차 문제를 해소한 청구권이었을 뿐, 일본이 한국에게 행한 비인도적인 범죄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더 타당하다). 일본 정부는 도의적인 차원에서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어 ‘위로금(속죄금)’을 전달하겠다는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 정대협은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배상금’이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맞섰다. 1965년 한일협정과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은 일본에 의한 위안부 문제의 ‘입막음 시도’였다(1차 봉인). 아베는 1차 내각 때 고노 담화를 무력화하려고 시도하지만, 위안부 피해자 출신 인권운동가 이용수가 미국 하원 연설을 통해 미국 하원이 위안부 문제를 인권유린 문제로 공식 비판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만들어 이를 저지했다. 이때 아베는 미국의 압박에 공식적으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일본과의 첫번째 외교 전쟁은 한국 시민사회의 승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참여정부를 상대로 외교문서공개소송(2002)을 통해 1965년 한일협정을 문제 삼았다. 참여정부는 2005년 민관합동위원회(2005)를 통해 한일협정으로 위안부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과 외교 교섭하지 않는 국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일본이 시도했던 1차 봉인을 완전히 해체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와 관련하여 노다 총리와의 2011년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정부의 결단을 촉구했지만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안을 내지 않자 ‘화풀이성 독도 방문’을 하면서 한일관계가 급속히 나빠졌다.

 

2012년 출범한 아베 2차 내각은 또다시 고노 담화 흔들기에 나섰다. 아베는 광의의 강제성과 협의의 강제성을 나누고 위안부 모집과정에서 협의의 강제성은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계속했고, 보수 일간지인 산케이신문은 위안부 증언의 신빙성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베는 고노 담화를 ‘아슬아슬하게 살려낼’ 수밖에 없었는데(2006년에 일본 우익의 하한선이 고노 담화임이 확인됐기 때문), 공식적으로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요구에 따른 추가적인 조치도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아베가 고노 담화를 인정했는데도 박근혜 정부가 경직적인 자세를 유지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한미일 삼각공조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대외 기조에 한일 간의 역사 문제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아베는 무라야마 담화를 상쇄하기 위해 본인의 수정주의적 사관을 담은 ‘아베담화’를 2015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 해 말 체결된 것이 12.28 합의였다. 이 합의의 내용은 일본 정부의 ‘국가 배상의 법적 책임’에 대한 인정없이, 국가예산 10억엔으로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를 65년 체제에 대한 ‘2차 봉인’이며, 이 합의는 ‘한국의 대일 외교사에서 잊히지 않을 불행한 날’이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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