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을 읽고

 

대학생 저술가 임명묵의 중국 현대사 관련저서이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197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현대정치사를 간략하게 개괄한 후, 시진핑 시대에 들어선 이후 중국의 대내외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나의 중국 정치에 대한 이해는 매우 초보적인 것이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체제이지만, 그 내부에 3대 파벌(공청단, 상하이방, 태자당)이 있고, 이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통한 통치가 정착해 있다. 이들 간의 권력투쟁 끝에 시진핑이 2013년부터 국가주석이 되었으며, 이 시진핑은 대내적으로는 일인독재체제를, 대외적으로는 ‘일대일로’로 상징되는 공세적 대외노선을 취하고 있다는 인상 정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덩샤오핑 시대와 그 이후의 중국 현대사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시진핑 체제는 중국사회 내부 논리상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내전 끝에 1949년 중국을 통일한다. 마오쩌둥의 1958년 대약진운동은 대실패로 끝났고, 1966년 문화대혁명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여론을 뒤집기 위한 정치적 이벤트였다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이후 중국에게 1976년은 저우언라이 사망 – 1차 천안문 사태 – 탕산대지진 – 마오쩌둥 사망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혼란의 해였다. 중국은 마오쩌둥 이후를 고민해야했다. 공산당 원로들은 ‘양개범시’를 내세운 화궈펑과 ‘실사구시’의 덩샤오핑 중 덩샤오핑을 선택했다(1978년 3중전회).

 

덩샤오핑은 광둥성과 푸젠성 등 5개 연해지역에 경제특구를 지정하여 ‘개혁개방’ 경제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포산도호(농가별 생산책임제)’와 ‘향진기업’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한다. 대외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도광양회’로 대표되는 비개입주의 외교노선을 밟는다. 이런 덩샤오핑의 행보를 두고 개혁성향의 ‘건설파’와 보수적인 ‘균형파’가 대립하는데, 덩샤오핑은 후에 ‘집단지도체제’를 정착시켜 대내정치적 균형을 꾀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원로들의 은퇴를 제도화하는 장치였다. 덩샤오핑에게는 경제-정치-외교의 세 국면에서 엄중한 과제가 주어졌고, 그는 이 과제들을 해결하면서 ‘선부론’, ‘집단지도체제’, ‘도광양회’라는 유산을 남긴 것이다.

 

덩샤오핑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건설파와 균형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천안문 사태 때 학생들이 개혁성향이 강한 후야오방의 복권을 주장하며 민주화를 요구하자 인내심을 잃고 유혈진압을 명령한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남순강화를 통해 ‘선부론’ 노선을 다시 강조한다. 경제성장 과정에서 축적된 불만과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도 경제성장과 개방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차기 지도자인 장쩌민은 본래 상하이시 서기였는데, 덩샤오핑이 그를 선택한 것은 역시 건설파와 균형파 사이의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건설파의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개혁성향이 너무 강했고, 균형파의 리펑은 천안문 학살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당시 장쩌민은 일종의 ‘중도파’로 기용된 것이었다. 장쩌민과 그 휘하의 저우융캉, 주룽지, 천량위 등은 이른바 ‘상하이방’이라고 불리는 계파를 구성한다. 장쩌민은 ‘삼개대표론’과 ‘사회주의적 시장경제(1992년 제14차 당대회)’를 구호로 내걸고 단웨이 개혁 등 시장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한 당 고위관료의 부패문제는 방치했다. 장쩌민 시기는 경제성장을 대가로 공산당 중심의 통치체제를 받아들인다는 ‘중국식 사회계약(신권위주의)’을 정립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후진타오는 낙후된 내륙지역인 간쑤성의 기술공무원 출신으로, 개혁성향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에게 발탁되어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티베트 소요사태 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덩샤오핑의 간택을 받게 된다. 덩샤오핑의 격대지정으로 지도자에 선출된 후진타오는 “정령불출중남해(중앙의 명령이 중남해를 넘어서지 못한다)”라는 말이 돌 정도로 리더십 위기를 겪었는데, 이는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는 내놓지 않았던 장쩌민의 수렴청정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중국의 당-군-정 체제에서 당은 당 총서기가, 군은 군사위주석이, 정은 주석이 원수직을 맡는다). 정치국상무위원회 9명 중 6명이 상하이방 출신으로 채워졌고, 상하이시 서기인 천량위는 하극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천량위는 부패스캔들로 축출당하는데, 이를 두고 공산당 파벌 간 권력암투로 해석하려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브루킹스연구소 리청 교수는 (현재는 해밀턴대에 재직 중인 것으로 보인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미국 민주당계열의 싱크탱크이다 – 흔히 세계최고의 싱크탱크로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의 파벌구도를 엘리트주의(태자당, 상하이방) 대 대중주의(공청당)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엘리트주의 대중주의
근거지 연해지역 (상하이, 광둥성, 푸젠성) 내륙지역 (충칭, 우한)
핵심그룹 상하이방, 태자당 공청단
이념 선부론 공부론
관심지역 도시 농촌
경제정책 성장주의, 수출 도농균형발전, 내수 (조화사회)
주도 국영기업 주도 계획경제 (부정부패) 법치주의, 시장주도 (민간, 시민사회)
정치지향 권위주의 (공산당) 정치개혁, 정치적자유
언론 <광명일보> <남방일보>
핵심인물 장쩌민, 주룽지, 저우융캉, 시진핑 후진타오, 원자바오, 리커창, 왕양

 

2008년은 중국식 경제발전과 통치체제의 폐해가 드러난 해였다. 멜라민 분유파동과 쓰촨성 대지진으로 드러난 부실시공 문제, 고속열차 사고(류즈쥔) 등 후진국형 사건사고가 속출하며 고속성장의 이면을 돌아보게 했다. 국영기업의 방만경영과 당 고위관료들의 부정부패 문제도 심각했다. 요소투입 위주의 발전에서 혁신과 생산성 향상으로 성장의 방식 변화를 꾀해야 했다. 후진타오는 이와 같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경제적 발전의 결과들을 ‘관리’하고 도농불균형을 해소하자는 ‘공부론’과 함께 당을 법의 지배 아래에 두어야 한다며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2012년, 보시라이의 ‘창홍타흑’은 이 구도를 흔들며 시진핑 체제의 등장을 부추겼다. 보시라이는 충칭을 근거지로 삼아 일종의 포퓰리즘 정치를 펼쳤다. 그는 공산당의 통제력 강화와 국영기업의 역할 확대를 내세우면서도, 의제는 공청단의 분배론과 균형발전론을 채택한다. (일부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를 연상시키는 ‘좌파 권위주의’의 모습이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의 입장에서 보시라이의 분배론은 ‘인민들의 사회경제적 불만이 마오이즘의 외피를 쓰고 폭발했던’ 문화대혁명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당의 장악력이 떨어지고 과도하게 ‘정치 자유화’가 이루어지면 천안문 사건과 같이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파급효과’가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보시라이는 스캔들로 축출됐지만, 사회경제적 불안을 틈타 선동가까지 등장한 상황에서, 당은 중국현대사의 양대 트라우마인 ‘문화대혁명의 망령’과 ‘천안문 사건의 망령’을 피해가면서 ‘공부론’과 ‘도농균형발전’을 이루어야만 했다.

 

한편,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로 중국은 국제사회로부터 인권표준을 준수할 것을 요구받기 시작했다. 국제사회는 다르푸르 학살사건에 대해 중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중국은 티베트나 신장지역과 같은 소수민족 문제 때문에 해외의 소수민족이나 인권이슈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보이면 공산당의 통제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는 입장이다. 과거 소련이 동유럽 위성국들의 국경확정과 내정 불간섭을 대가로 인권 조항을 받아들였다가(헬싱키 협정) 낭패를 본 전례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은 구조적으로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책임 있는 서방선진국’ 역할을 할 수 없다.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각국에서 티베트 문제와 관련한 반중시위와 그에 대한 맞불시위가 확산되며 중국 내 민족주의에 불이 붙기도 했다. 중국 내 민족주의 여론은 홍콩반환 문제나 양안문제 등에 대해서도 과격한 주장을 일삼으며 더 이상 미국에게 고개를 숙이지 말 것을 공산당에 요구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중국의 외교노선(‘도광양회’, ‘화평굴기’)은 자국 내 민족주의 여론의 반발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인구를 지탱할 식량과 에너지 수요 때문에 늘 불안에 시달리는 중국에게 미국의 절대적인 해상우위는 치명적이다. 미국이 당장 말라카해협을 틀어막는다면 중국은 석유 수입루트를 잃게 될 것이다. 중국은 공급망 다변화와 해외진출(저우추취)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처럼 중국의 발전에 따른 국제사회로부터의 개방압력, 자국내 민족주의의 확산과 지정학적 딜레마로 인해 ‘도광양회’에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시진핑은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이어받는다. 후진타오는 전례를 깨고 당 총서기 – 국가 주석 –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모두 넘겼다. 저자는 이것이 ‘중국공산당 내 두 파벌이 빚어낸 위기의식의 산물’이며, 후진타오는 공청단의 의제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시진핑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시진핑 체제는 ‘두 파벌의 상호 모순되는 합의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시진핑은 환경보호와 빈곤퇴치, 도농균형발전, 지속가능한 도시화 등 전통적인 태자당-상하이방 연합 정책이 아닌 개혁성향의 정책들을 전면에 내거는 동시에 사정정국을 조성하고, 파편화된 정책결정기구를 통합, 각종 영도소조의 조장 자리를 직접 맡는 등 공산당의 통제력을 우위에 두기 위한 조치들도 감행했다.

 

대외관계의 측면에서 시진핑은 중국의 경제적, 지정학적 딜레마를 돌파하기 위해 ‘일대일로’를 내세웠다. 일대일로란 육상(‘진주목걸이’ 부근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해상(말라카해협을 우회)에 ‘실크로드’를 건설해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해상우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들에게 중국식 개도국 모델을 수출하기도 했다(베이징 컨센서스).

 

정리하면, 현대중국이 당면한 상황은 고도성장기 이후 개도국이 흔히 겪는 ‘중진국 함정-민주화이행’ 국면인데, 일반적인 국가와 달리 중국은 스스로 ‘새로운 강대국 모델’이 되는 ‘제3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며, 이는 중국정치의 독특한 역학이 도출한 결론이었다. 따라서 덩샤오핑 이후 장쩌민-후진타오 시대와 시진핑 시대는 질적으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 (2세대) 시진핑 (5세대)
경제정책 선부론 공부론
정치체제 집단지도체제 일인중심체제
대외정책 도광양회, 화평굴기, 비동맹노선 신형국제관계, 일대일로
공통점 공산당의 영도, 당의 우위

 

중국 대외관계의 양상은 “1914년”과 “1815년”의 두 역사적 전례를 닮아 있다.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대결론’을, 1815년은 19세기 유럽협조체제라는 ‘협력론’을 대표한다. 중국 대외관계는 양자의 중간노선을 걷게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한편, 중국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브루킹스연구소 데이비드 샴보 교수의 ‘로터리 비유’를 참고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1) 신전체주의 2) 경성권위주의 3) 연성권위주의 4) 준민주화”라는 네 갈래 ‘로터리’에 서 있는 실정이다. 이 구도에서 시진핑 체제는 경성권위주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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