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협상과 민족주의: <북일 교섭 30년>을 읽고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북일교섭 30년>을 읽고

1. 고이즈미의 방북은 일본 외교의 ‘일탈’이었나

북한위협에 대한 억지를 주목적으로 했던 한미동맹과 달리 미일동맹은 그 출발부터 동북아질서 안정이라는 지역 수준의 전략적 목표 하에서 결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한미동맹이 한국의 국내정치와 정부 별 대북정책 기조에 따라 비교적 탄력적으로 운용되어온 것에 비해 미일동맹은 미국의 대전략에 종속되어 대체로 일관성 있게 운용되어 왔다. 미국 동북아 전략의 중심은 언제나 미일동맹이 차지해왔고, 한미동맹은 그 하위파트너에 불과했다. 미일동맹은 1951년 체결 이후 세 번(1978년, 1997년, 2015년)에 걸쳐 ‘안보 가이드라인(방위협력지침)’ 개정을 거치며 꾸준히 강화되고 발전(확장)해 왔다. 최근의 주목할만한 변화는 ‘아시아-태평양(아태)’에서 ‘인도-태평양(인태)’으로의 변화다. ‘인도-태평양’ 개념은 아베 총리가 먼저(2016년) 제시한 것을 바이든 정부가 수용한 것(2021년)이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주도하는 대외전략의 역사수정주의적인 측면에 주목하지만, 서방의 시각에서는 일본 외교의 국제주의적, 보편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미일동맹의 이 같은 전략적 일관성과 보편성을 고려하면,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과 북일정상회담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심지어 당시는 9.11 테러 직후 북한이 ‘악의 축’으로 낙인 찍힌 시점이었다. 미일동맹의 위상이나 무게감을 고려하면 일본은 언제나 미국과의 긴밀한 전략적 공조 하에서 일관된 대외노선을 밟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떻게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와 단독으로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에 국제정치적 요인보다 일본 내 좌우 시민사회의 압력이라는 국내정치적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2. 북일교섭의 역사적 의미와 청중비용(audience cost)

일본에게 북한은 ‘최후의 전후처리 미달성국’이다.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는 것은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의 유산을 최종적으로 청산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길을 여는 길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작지 않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사회는 그런 측면에 주목하여 80년대부터 북한과의 수교를 추진해왔다. 남한 군사정부와 맺었던 1965년 한일협정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역사문제’(제2조의 해석문제)를 북한과의 협상에서만큼은 제대로 다루어야 했다. 마침 고르바초프 집권(1985년)과 노태우의 7.7선언(1988년)으로 전후 냉전질서 혹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이삼성)’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한국은 공산진영인 중국-소련과, 북한은 서방진영인 미국-일본과 수교하는 것을 ‘교차승인’하는 방안이 한일 양국 정부(전두환-나카소네) 차원에서 합의되었다. 북한 역시 고르바초프의 ‘전선 이탈’에 직면하여 서방 진영과 수교할 필요성이 생긴 참이었다.

이와 같이 우호적인 국제환경에서 1990년 가네마루-다나베 방북을 기점으로 북일교섭이 시작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북일관계의 원점이 되어야 한다는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사회당을 통해 일본 정부 입장에 반영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 또한 처음에는 대체로 ‘사죄로 시작된 북일교섭을 받아들였다’. 일본의 좌파 시민사회가 추진했던 ‘진보적 북일수교’의 흐름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같은 유력 정치인이나 대북외교를 전담한 외교관 다나카 히토시 등을 통해 꾸준히 이어졌으며, 일본의 식민지배 사죄를 포함한 ‘평양선언(2002)’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일본 내 우익 진영이 주도한 혐북의 흐름 또한 8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특히 90년대에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우익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졌다. KAL기 테러리스트 김현희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확인되어오던 납치자 문제가 김정일의 입을 통해 실제 있었던 일인 것으로 확인되자 일본 내 우익 진영(사토 가쓰미의 ‘현대 코리아’ 그룹 등)과 정치인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여 대북 강경론과 압박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보적 북일수교’를 주장하던 와다 하루키 등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대북 비밀교섭을 이끌었던 다나카 히토시 역시 주요 공격대상이었다(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서브컬쳐에서 외교문제가 다루어지는 방식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울트라 달러>는 다나카 히토시에 대한 음모론적 음해를 소재로 한 정치 장르소설로, 다나카에 대한 우익 진영의 ‘문필린치’였다. 그런데 러시아와의 북방영토(쿠릴열도) 반환 협상을 주도했던, 이 책에도 잠시 언급되는 외교관 사토 마사루를 주인공으로 한 이토 준지의 만화 <우국의 라스푸틴>은 사토를 ‘일본의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우국지사’로 묘사한다. 저자인 와다는 사토 마사루 등 대러외교 그룹이 배임죄로 체포되었을 때 이들을 변호했다고 한다. 일본에게 러시아 문제는 좌우 시민사회에서 각각 어떻게 인식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고이즈미 총리의 정확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는 이 책을 읽어도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고이즈미 총리는 정말로 북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총리는 ‘개인외교’ 차원에서 미국에도 알리지 않은 채 다나카의 비밀교섭을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아베 등 내각 내 강경파를 제대로 통제한 것도 아니었다. 방북 후 기자회담에서는 납치자 문제만 언급하고 나머지 문제에 대해 침묵해버렸다. 결국 고이즈미 총리 자신은 ‘무사상(無思想)’이었고, 그는 국내의 좌우 시민사회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역사적 사죄 대 납치자 문제 해결) 형성한 북일교섭의 동력에 ‘휘둘려’ 별 생각 없이 대북외교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은 납북자 일시귀국 후 북한과의 약속파기, 요코타 메구미 유골 DNA 감정 스캔들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북한과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였고, 북일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저자는 북일수교의 중심 의제가 좌파 시민사회운동에서 제기한 ‘역사적 반성’으로부터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중시하는 ‘납치자 문제’로 넘어가버린 것을 아프게 회고한다. 아베 총리는 집권 후 납치문제에 대한 비타협적 강경책인 ‘아베 3원칙’을 천명했고, 북한 역시 2차 핵실험(2009)을 통해 9.19 합의를 파기해버리면서 북일수교의 모멘텀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민주당 정부에서도 북일협상은 지지부진했고, 아베 2기 내각에서의 스톡홀름 합의(2014) 역시 이후 협상 진행과정을 보면 아베의 국내정치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사죄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3. 북일 국교정상화는 가능한 일이었나

그렇지만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로드맵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어도 북일수교가 저자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먼저 국제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있다. 정상회담까지는 미국 몰래 성사시켰지만, 북핵문제가 끼어 있는 상황에서 일본이 북한과 마음대로 수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다나카 히토시가 정상회담 후 6자회담의 진전을 거쳐 북일수교로 이행하는 단계적 구상을 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북일수교만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이를 통한 동북아시아 정세의 ‘현상변경’이 가능했을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2000년대 세계질서가 그러한 외교적 상상력이 통하는 시공간이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본 내 우익 진영의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사죄하라’는 국내 진보파에 더해 90년대 이후로는 민주화된 남한정부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죄를 요구해오는 상황에서 일본 우익은 극심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악명높은 ‘새역모’(96년)도 그러한 맥락에서 시작된 반동이었다.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 문제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국내 여론을 무릅쓰고 북일교섭에서 역사문제를 전면화하고 납치자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가 참여했던 진보적 북일교섭운동의 흐름을 주된 서사로 제시하지만, 일본의 주류에게 중심서사는 납치자 문제로 대변되는 ‘피해자 서사’가 아니었을까? 장기 지속하는 동아시아 냉전질서와 일본 국내정치의 우경화 흐름을 고려하면, 단지 ‘납치자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된 것’만이 북일교섭을 가로막았다고 보는 것은 일본 시민사회의 서사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4. 외교협상과 민족주의

저자의 납치자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한국인 독자가 봐도 서늘해 질만큼 냉철하기 이를 데 없다. 저자는 처절한 외교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로서, 죽은 납치자를 살려내라는 식의,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주장에 얽매이는 것은 역사적 화해와 국가 간 신뢰구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역자는 옮긴이 후기에서 와다가 철저한 지한파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위안부 합의파기에 반대한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일본 내 납치자 문제의 제기와 확산 과정을 몸소 경험한 와다는 위안부 문제도 적정선에서 봉합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한일화해의 걸림돌로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위안부 합의가 아베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양보를 한 것이라는 점에서 와다는 합의를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위안부 문제와 납치문제를 대등하게 이해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위안부는 제국주의 시대에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진 전시 성범죄였고, 일본인 납치는 준실패국가인 북한의 일탈적 테러행위였다. 일본사회가 납치자 문제에 대해 보여야 하는 절제와 자제를, 한국사회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교주의적인 태도다. 인권문제를 숫자로 따질 것은 아니지만, 숫자로 봐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납북 일본인의 규모는 17명에 불과하여 전시 위안부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납치자나 북한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사회가 유난히 감정적이고 격앙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실제로 납치자 문제가 일본 내 우익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방식(혐북과 음모론)으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는 여성인권단체인 정의기억연대가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서 (한국적인 맥락에서 다소 왜곡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보편적 여성인권운동의 측면이 강했다. 우리는 적어도 혐일과 음모론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 않다. 국내정치에서 민족주의가 부상할 경우 협상의 윈셋이 축소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를 외교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은 부적절하다지만, 위안부 문제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 의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의 납치자 문제야말로 ‘민족주의적’이고 감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본인들이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 보이는 격앙된 태도도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21세기적인 맥락에서는 역사적 화해와 국가간 협상을 이유로 보편적 인권의 문제가 도외시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맥락에서 보자면, 가령 북한인권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을 위해 한국정부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해 ‘자제’해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부 역시 ‘역사적 사죄와 반성’을 위해 자국민에 대한 타국의 테러행위를 외면할 수 없는 국내정치의 구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해할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교에서 과거사나 인권문제를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은 대화의 여지를 지나치게 좁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는 되새길만 하다. 국가 간 외교협상에서 어디까지가 유연성을 발휘하여 협상할 수 있는 영역이고, 어디부터가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역린이 되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는 사회적 합의의 문제다. 이때 국내정치적으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 혹은 (상대국의) 인권문제가 부상할 경우 외교적 자율성은 크게 훼손된다. 인권문제와 같은 보편적 의제를 협상테이블에 절대로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구 공산권 국가들은 서구로부터의 인권문제 제기를 존재론적 안보위협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문제다(국제법상 내정불간섭 원칙과 국제인권규범은 서로 딜레마 관계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전이 정부와 민간의 정보 비대칭을 감소시킨 것 역시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적 자율성 훼손에 일조하였다. 협상을 하려면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백주 대낮에 지도자가 자국의 이익이나 인권문제를 ‘통 크게 양보’하는 것을 용서할 국내정치 행위자는 없다. 사방팔방이 백주 대낮이 되어버린 디지털 사회에서 국가 간 ‘밀실합의’나 지도자들 간 ‘흉금을 터놓고 하는 대화’의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과감한 외교적 상상력이 작동할 수 없도록 하는 이런 제약 때문에 국가들을 진공상태의 합리적 행위자로 바라보는 게임이론을 외교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일정한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사의 디테일을 공부해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협상의 디테일에 주목하자면 실무 외교관의 비망록이나 최종적으로 합의한 ‘선언문’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다. 어느 때보다도 국가 간 협상의 기술이 필요한 오늘날, 데탕트 시대의 ‘해빙외교’와 한국 북방정책의 구체적 메커니즘에 다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소련과의 국교정상화는 고르바초프의 일방적인 양보로 가능했기 때문에 오히려 특수한 사례였다. 일소수교(1956), 중일수교(1972), 미중수교(1979), 한중수교(1992), 그리고 북일교섭 및 북미수교의 시도에서 무엇이 쟁점이었고 서로 어떤 양해를 했던 것인지, 또 당시 주변국들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북일수교 이야기로 돌아오면, 고이즈미의 방북은 일본의 국내정치와 동북아 국제질서가 부딪혀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했던 외교적 사건이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때 일본의 국내정치가 동북아 냉전질서를 둘러싼 외교적 상상력을 북돋웠던 것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제약했던 것인지가 정치학적 쟁점이 되겠다. 북일교섭사는 대내적 시민정치와 대외적 베스트팔렌 질서의 역학관계에 대한 중요한 사례다.

 

5. 보론: 미일동맹은 한미동맹이 따라야 할 모범인가?

미일동맹과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한미동맹의 유연성은 한국외교의 자산일까 부채일까? 보수 우파적인 안보관을 가진 이들은 미일동맹의 전략적 일관성과 확실성을 부러워하며 한미동맹을 미일동맹과 대등한 수준의 ‘글로벌 포괄적 전략동맹’으로 격상시키고자 한다. 반면 민주당 계열은 한미동맹의 상대적 유연성을 최대한 활용해서 미중 사이에서, 혹은 대북정책에 있어 한국정부의 외교적 자율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지난 해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무게추는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한미일 협력의 틀 속에서 한국은 기존의 ‘미일동맹의 하위 파트너’에서 나아가 보다 ‘글로벌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추’ 국가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를 두고 진보적 전략가들은 ‘연루의 위험’을 우려한다. 주한미군의 역할이 북한 억지에 한정되지 않고 ‘글로벌한’ 수준으로 확대될 경우, 가령 중국이 대만침공에 앞서 주한미군의 기동성을 무력화하기 위해 (북한을 통해) 남한을 선제타격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섬뜩한 시나리오도 등장한다.

언제까지고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고수하다가는 최종적으로 양쪽 모두로부터 ‘방기’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한국 정부의 정체성 자체가 중국식 권위주의보다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나 ‘규칙 기반 질서’와 친화적일 수밖에 없음을 고려하면, 윤석열 정부의 ‘전략적 확실성’ 노선은 불가피했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정책의 입안자들이 절대적으로 고수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나 유사사태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따르자면 한반도, 특히 북핵문제가 미중 전략경쟁에 직접적으로 연루되는 일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외교적 목표는 없다. 한미동맹을 미일동맹 수준으로 격상시켜 국격(?)을 높이겠다는 의지가 그 원칙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참모들에게는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 것 같다. 민주당의 반일민족주의 외교도 문제였지만, ‘우리도 일본처럼 되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야말로 뒤틀린 민족주의 외교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어차피 단기간에 한미동맹이 미일동맹 수준으로 밀착할 수는 없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의 합류 속도가 너무 빨랐다거나, 그 과정에서 한중관계를 ‘포기’하는 등 외교적 정교함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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