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딕슨, 자이니치, 알파고

브루스 J. 딕슨, <당과 인민>
정치학자 브루스 딕슨의 <당과 인민>은 체계성과 균형감각을 두루 갖춘 뛰어난 중국정치학 개론서이다. 마침 시진핑 실각설이 나돌던 시기에 읽었다.
중국공산당의 ‘반응하되 책임지지 않는’ 통치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중국식 당-국가 체제의 내구성과 내적 합리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와 내각(총리)이 모두 당의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하여 공산당의 시민사회 관리기술,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여 구축한 감시체제 등에 대해 설명한다. 중국에는 가시적인 반체제적 시민단체는 없지만, 생활의제나 사회문제의 해결을 도모하는 시민단체나 NGO는 유의미하게 존재한다. 반체제적이고 서구적인 NGO는 중국 당국의 인가를 받기 어려워서 사회적 기업의 형태로 중국에 자리잡곤 한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도 ‘반체제적인’ 시민단체를 포용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수용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활동을 넘어서(법치주의의 틀을 넘어서), 근본적인 수준의 체제전복을 시도하는 ‘시민단체’를 기꺼이 수용하는 근대국가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중국이든 서구민주국가이든 ‘불온한’ 시민사회를 통 크게 수용하는 국가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서구적 편견을 상대화하여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다만 다양한 층위의 사회통제가 시진핑 집권 이후 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하고 있고, 그것이 중국공산당의 인민에 대한 반응성을 침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저자도 그 사실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민주화 이행에 대한 저자의 전망도 객관적이다.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란 근원적인 의미의 ‘민주정’이라기보다 집권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집단(주로 정당의 형태)이 강고하게 존재하고,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가 상시적으로 가능한 체제라고 할 것인데, 현재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의 통치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이 현실적으로 부재하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중국의 ‘민주화’나 ‘레짐 체인지’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내부의 지도자 교체 정도는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서구적인 의미의 대의제 도입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중국은 지방정부 단위에서는 제한적인 선거제도를 운용하고 있는데, 그 의의와 한계에 대한 설명도 이 책에서 접해볼 수 있다.
민족주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다. 저자는 중국공산당이 자국 청년들의 애국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거나, 그것에 휘둘리고 있다는 시각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한다. 종교의 경우 파룬궁처럼 그 규모가 위협적으로 커지는 경우에는 무자비하게 탄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일정한 수준에서 허용한다. 전체적으로 중국공산당과 (넓은 의미의) 중국 내 시민사회 사이의 긴장관계를 균형 있게 서술하고 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독자는 이것을 중국공산당의 내구성과 합리성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 활용해볼 수 있다.

이범준, <일본제국 vs. 자이니치>
저자가 기자출신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글이 엉망이다. 이런 책을 볼때마다 저자의 용기와 편집자의 나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저자는 지난 계엄-탄핵 국면에서 ‘기자출신 헌법학자’로 방송에 몇 번 등장했던 사람인데, 이번에 글을 보니 좀 어설픈 사람이었던 것 같다(같은 법조기자인 한겨레 이춘재와 비교된다). 저자는 법조전문 기자로서 일본의 법조인들을 인터뷰하면서 특이하게도 자이니치 문제를 탐사취재 하게 되었고, 이 책은 그 작업을 단행본으로 편집한 버전이다. 저자의 ‘헌법학’ 박사학위논문은 재일조선인 참정권 문제에 관한 것이다. 지도교수는 서울대 로스쿨 전종익 교수.
대체로 자이니치의 법적 권리투쟁을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김경득 변호사의 사법연수소 입소투쟁과 박종석 씨의 히타치 취업차별 판결에서의 승리는 재일조선인 권리투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므로 기본적으로 일본사회 법조인 인터뷰집의 성격을 갖는 이 책이 자이니치 권리운동사를 다루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밖에도 이 책은 조총련과 민단 문제, 조선학교 문제, 그리고 출입국문제와 참정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자이니치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제문제들을 두루 담고 있다.
국적과 관련된 참정권 문제와 출입국 문제는 읽을만했다. 국적과 참정권의 관계에 대한 나의 입장은, 참정권은 기본적으로 국적을 중심으로 부여할 것이 아니고 거주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참정권은 공동체를 구성할 권리이므로 실질적으로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인 관련성이 깊은 ‘거주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지, 형식적-혈통적인 국적자라는 이유로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은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사회 내부에서도 국적 문제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다. 조총련과 민단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LAZAK)는 재일조선인 권리신장을 위해 (‘조선적’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일본국적을 취득하자는 입장이고, 김경득 변호사 같은 경우는 재일조선인 정체성(조선적)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사실상 난민의 처지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조선적’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출입국 문제는 사실상 무국적자인 재일조선인들을 한국정부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출입국관리법과 관련해서 이 책은 “정영환 교수 여권발급거부처분 취소소송”(대법원 2013. 12. 12. 선고 2010두22610 판결)을 다루고 있다. 한국 헌법은 선언적으로 영토규정을 두고 있으므로 북조선의 인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취급한다(이것은 기본적으로 냉전주의적 사고관에 기반한 억지다). 그렇다면 북한주민도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에 따라 남북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은 남북교류협력법을 별도로 두었다. “북한주민은 상식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한국 국적이라고 할 수 없는데, 한국 국적이라고 선언한 다음 출입국에서 배제하기 위해 남북한교류협력법을 만든 것”이다. 대법원은 이에 따라 재일조선인이었던 정영환 교수를 북한주민과 똑같이 취급했다. 이는 조총련계 자이니치에 대한 이념적 편견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 아이덴티티를 좀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 유튜브에서 다큐멘터리도 찾아보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들을 검색해서 찾아보기도 했다. 서경식, 강상중, 이성시 같은 지식인 외에도 영화감독 최양일과 이상일, 야구감독 김성근, 축구선수 정대세, 유도선수 안창림 등이 재일조선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추성훈은 애매하다). 전 영부인 육영수 살해범인 문세광도 재일조선인이다.
유튜브에서 발견한 가와사키 에이코 씨의 사례를 보면서 자이니치 아이덴티티의 복잡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가와사키 씨는 창원 출신 아버지와 목포 출신 어머니를 둔 조선인으로서 일본에 정착했는데, 조총련계 조선학교를 다니면서 북한식 교육을 받고 그에 감화되어 1959년에 북한으로 ‘귀국’했다. 조총련의 북송사업으로 인한 북송규모는 9만 3000여명 정도이다(관련 문제를 다룬 책으로는 테사 모리스 스즈키의 <북조선 엑소더스>가 있다). 이후 가와사키는 북한에서 억압적인 생활을 하다가 ‘탈북’하여 일본에 정착해서 이번에는 반-조총련 운동을 벌이고 있다.
조선학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조총련은 사실상 일본 안에 작은 북한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는데, 조총련 당사자들이야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추궁하는 차원에서 식민지 시절에 일본에 정착한 재일조선인들의 ‘민족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재일조선인들이 동시에 일본사회의 구성원이기도 한 것이라면, 비상식적인 우상화교육을 방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장강명, <먼저 온 미래>
간단히 말해, 바둑 인공지능 ‘알파고’에 의해 세계 바둑계는 초토화되었다. 저자는 인공지능이 점차 상용화되기 시작하면 바둑계에서 벌어진 일들이 다른 영역에서도 벌어지는 것은(인공지능에 의해 초토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바둑계에서 ‘미래가 먼저 온 것’이다.
이 르포에 담긴 바둑인들의 인터뷰 속에는 ‘알파고 쇼크’에 직면했던 바둑계의 충격과 공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알파고 이후 AI가 인간기사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게 됨으로써 바둑을 둘러싼 세계관과 철학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바둑인들의 현실적인 생활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런 일들이 다른 영역이라고 해서 벌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AI로 인해 어떤 조건이나 기본전제 자체가 허물어져 버림으로써 이른바 ‘인간성’과 ‘인간적 가치’가 상실될 것을 우려한다. 소설가인 저자는 AI가 문학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특별히 우려하고 있다.
다만 저자의 논의는 현재 시점에서는 어떠한 구체적인 예측이나 인간성에 대한 항변도 봉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문학은 바둑과 다르므로 AI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 ‘알파고 이전까지 바둑계도 같은 입장이었다’고 하는 식인데, 결국 일종의 기술결정론 내지 전도된 기술만능주의(패배주의)의 입장에서 어떠한 반론에도 ‘AI의 놀라운 학습력과 잠재성’을 강조하면서 반론을 가로막는 식이다. 읽다 보면 좋은 SF 사고실험을 접했다는 기분은 들지만 딱히 현실 밀착적인 분석이나 탐구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이다. 사실 AI 관련 논의가 대개 그렇다(그 중에서는 이 책이 가장 나은 편이다).
바둑 이야기에 집중하는듯하다가 갑자기 정치, 사회, 민주주의 같은 거대담론을 끌고 들어오는 대목에서는 논리적 비약이 과하다. 이것은 장강명이 쓰는 신문칼럼에서도 자주 드러나는 문제점이다. 특히 9장과 10장에서의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전개는 책 전체의 완성도를 심각하게 떨어뜨린다.
AI에 의해 ‘애매한 중간층’이 박살나리라는 예측은 유의미했다. 알파고 이후, 바둑의 입문자나 초보자들은 이제 AI바둑 선생님들을 통해 인간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일정 수준 이상의 학습기회를 제공받게 되었다. 또, 최상급 프로기사들은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바둑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다(어느 분야이든 최상급의 대체불가능한 전문가들, 그 분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의사결정자들은 AI 쇼크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어중간한 위치의 아마추어나 프로기사들은 당장의 돈벌이가 궁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존재가치 자체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취재결과다. 이것은 AI가 진정으로 어떤 창의성이나 인격을 지닌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는 별개의, 당장 부닥칠 현실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분야이든 그 생태계를 지탱해주는 존재로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고인물’(최상급 엘리트)도, 신입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층’인지도 모르는데, AI가 그들의 존재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유효한 교훈으로부터 쓸모 있는 정치경제적 전망을 도출해보는 것은 추후에 시도해보기로 한다.
'Book Review > Social Sci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국제정치와 인공지능 (0) | 2025.12.19 |
|---|---|
| 법조인 자기서사의 무의식: 김두식, 문유석, 박주영의 에세이와 착한 법조인들 (0) | 2025.11.08 |
| 최장집주의라는 이름의 신념윤리: 박상훈, <청와대 정부>를 읽고 (0) | 2025.08.29 |
| 안희제, <증명과 변명>을 읽고 (2) | 2025.04.26 |
| 빈곤과 불안정노동 (0) | 2025.04.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