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고

장애학은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손상이 임상적, 의료적 개념이라면, 장애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다. 장애학에서 장애란 치료되고 교정되어야 할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고, 실천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사회적 구성물’이다. 여기서부터 장애학은 이미 다른 어떤 정치철학의 전통보다도 더 파격적이다. 장애학은 담론이나 이데올로기의 차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생물학(몸)을 극복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것(몸)’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해체할 것을 요구하는 페미니즘의 정치학은 ‘장애학’의 수준에 이르러야 진정으로 그 급진적 면모를 다 드러내는 셈이다. 페미니즘이 자신의 논리의 일관성을 지킨다면 반드시 장애학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장애학’은 이런 저런 난잡한 논란에 휘말리며 국내에서는 사실상 그 정치적 생명력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페미니즘’을 급진적으로 전유할 좋은 탈출구가 될 것이다. 최근 국내에 관련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바람직하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을 연관 짓는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장애인 차별과 동물 차별은 모두 ‘인간중심주의(비장애중심주의)’로부터 연역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는 장애해방운동과 동물해방운동은 최소한 연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현실에서 장애운동과 동물운동은 서로 충돌하는 아이러니를 흔히 노정한다. 장애운동은 장애인의 ‘인간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니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외친다. 동물운동 역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장애를 ‘착취’한다. 동물이 ‘인간과 충분히 닮은 정도의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물권 옹호의 흔한 논거이다(동물의 ‘쾌고감수능력’이나 ‘의식의 유무(신경전형성, neuro-typicallism)’ 문제는 동물에게 ‘의식’이 있으므로 동물을 ‘물건’대하듯 대해선 안 된다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암묵적으로 인지능력이 부족한 지적 장애인과 자폐아를 차별하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인 것처럼 여겨지는 두 운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중심주의에 ‘의존하여’ 당사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이런 방식으로는 두 운동 모두 불완전하고 타자-배제적인 주장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장애인과 동물의 교차성(intersectional)이다. 가축화된 동물은 많은 경우 ‘장애’를 가지고 있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더 많은 계란을 낳기 위해, 더 많은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강제로 신체를 개조 당하기 때문이다. 장애인들 역시 쉽게 ‘동물화’ 되곤 한다. 저자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장애인들의 뒤뚱거리는 걸음이나 불완전한 신체가 동물에 빗대어져 조롱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렇다면 동물윤리를 ‘불구화’하고, 장애인들이 ‘동물임을 주장’하는 것은 장애운동과 동물운동이 연대를 모색할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해방’을 쟁취할 길일 것이다.

 

이 책은 명징한 주장을 담고 있지 않다. 논증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일화와 감상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비거니즘이나 돌봄윤리 같은 ‘대안’은 강렬한 문제의식에 비해 소박하고 식상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파괴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피터 싱어와 저자의 대담을 담은 12장이다. (이 대화는 거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대심문관만큼의 전율을 일으킨다 - 그리고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의 화두는 다분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이 경우 대심문관은 피터 싱어이고, 예수 역할은 테일러가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겠다) 장애인 당사자이기도 한 테일러에게 피터 싱어는 그의 장기인 ‘사고실험’을 변주하여 질문한다. ‘만약 2달러짜리 알약만으로(그만큼 간단하게)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의 장애가 완치될 수 있다면, 그 약을 먹지 않을 것인가?’ 이 질문은 곧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조금의 ‘좋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테일러는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자신의 장애는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을 다양화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자신의 예술가적 인식에 ‘도움이 된다’고 밝힌다. 장애란 곧 다양성이고, 장애의 존재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양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고통스러운 삶일지라도 그 나름 지속할(견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고통받는 삶은 지속되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당도했다. 장애문제란 곧 고통의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는 저자의 한계도 엿보인다. 강렬한 12장에 뒤이어 저자는 고통받는 동물들을 구출해내는 일의 당위성을 강변하는데, 이것은 결국 ‘고통받는 삶이 지속되어선 안 된다’는 공리주의적인 주장으로 회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기분열은 이론과 실천을 구별 짓지 않고자 하는 ‘장애학’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장애인의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과, 그런 삶이 ‘존재해도 좋다(혹은 존재해야 한다)’라는 ‘가치’의 문제는 동일선상에서 자기-완성적으로 제시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물질적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고도의 의식세계를 지닌 인간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그리고 저자의 급진적인 문제의식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해 말기 암 환자의 삶을 예로 들어보자. 먼저, ‘암’은 장애인가, 손상인가부터 문제시된다. 우리는 암을 ‘손상(질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이를 예방하거나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뎌야 하는 환자들의 삶은 장애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장애학의 관점에서라면 이런 삶은 (‘손상’이 아니라) ‘장애’의 차원에서 보다 넓게 사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테일러는 우리가 암을 두려워하고, 제거하거나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 자체를 ‘암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보고 있는 셈이다. 암을 가지고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삶’은 제거되거나 지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추구될 ‘가치 있는 삶’이다 – 이를 테면 이들 암 환자의 삶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양화한다’.

 

‘장애’의 자리에 ‘질병’, ‘고통’, 혹은 ‘가난’과 같은 단어를 번갈아 대입해보면 장애학의 문제의식(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화두 자체)이 참으로 어렵고 묵직한 문제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깨달을 수 있다. 이 책의 어떤 대목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듯이, 장애학의 종착점은 무정물인 ‘돌멩이의 존엄성’까지도 존중하는 수준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완전한 전복’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수나우라 테일러의 문제의식은 들뢰즈-가타리의 ‘동물 되기’나 크리스테바의 ‘abject’와 괴물의 미학, 또는 최근 소개되고 있는 ‘포스트 휴머니즘’(브뤼노 라투르, 로지 브라이도티)과 관련 지어 음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존재와 당위의 문제, 물질과 의식의 문제, 그리고 ‘손상’과 ‘장애’의 차이를 언어철학적으로 다루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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