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를 읽고

볼테르(1694~1778)는 프랑스혁명이 있기 10여년 전에 죽었으나, 혁명 이후 팡테옹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볼테르가 귀족들과 잘 어울렸고 계몽 군주들과의 서신 교환에 열심이었으며 광신적 열정을 혐오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가 오늘날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일평생 자기 자신의 삶을 연출하여 ‘대중’ 앞에 내 보이는 ‘공연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런 ‘오해’를 싫어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도 ‘항상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자각 속에서 살았다’. 이것은 볼테르가 일생에 걸쳐 남긴 방대한 저술의 장르적 다양성만큼이나 후대인들로 하여금 그가 정확히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어렵게 한다. 저자는 볼테르의 다면적인 생애를 중심으로 볼테르와 그가 살았던 18세기 지성사에 대한 개괄을 시도한다.

볼테르는 자신의 이력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연극인으로서 시작하였다. 그는 <오이디푸스>로 24살에 출세했고, <탕크레드>, <자이르> 등의 연극을 흥행시키며 배우이자 작가로서 무대 안팎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전적인 형식 속에 근대적인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것이 그의 특기였는데, 이것은 당대의 ‘고대파와 근대파 논쟁’ 구도 속에서 그가 근대파적 신념을 지지하면서도 문예적으로는 고대파적인 입장을 고수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요컨대 그는 ‘고대파가 됨으로써 근대파가 되고자’ 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초기 걸작인 <앙리아드>(1723)에도 반영되었다. <앙리아드>는 부르봉 왕조를 개창한 앙리 4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프랑스의 ‘국민적 서사시’로 기획되었는데, 볼테르는 여기서 고전적 형식미를 지키면서도 ‘종교적 관용’을 중요하게 다루며 고전적 서사시를 주제적으로 혁신하였다. 한편, 볼테르가 쓴 운문 시에는 그가 호라티우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주의로부터 받은 사상적 영향이 반영되어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가상디는 에피쿠로스주의를 이신론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였는데, 초기 볼테르는 바로 이 에피쿠로스주의의 합리주의적 유물론과 反형이상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볼테르는 1726년부터 2년간 영국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쓴 <영국인에 관한 편지>(프랑스에서 1733년 <철학편지>로 출간)는 여행기의 외관을 한 볼테르의 정치적‧사상적 선언문으로, 그가 에피쿠로스주의에서 근대 영국철학으로, 종교철학(이신론)에서 실용주의(정치경제)로, 그리고 운문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편지>의 볼테르는 기본적으로 영국 찬양자(Anglophile)로, 영국의 근대정신과 종교적 관용에 준거하여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단순한 이항대립을 설정하여 오늘날까지 익숙한 철학사적 구도 – 영국의 경험주의와 대륙의 합리주의 – 를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의 이신론적 입장을 뉴턴, 로크, 베이컨의 경험주의와 유비하고, 프랑스의 종교적 권위주의와 절대주의를 데카르트와 유비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대치시켰다. (이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부당하게 단순화되었고 프랑스의 고유한 경험주의 전통(가상디)도 무시되었다.) 한편, 볼테르는 <편지>에서 영국의 왕립거래소를 묘사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상업적 교류’와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18세기에 이르러 상업이 정치사상의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된 것을 반영한다. 이 맥락에서 종교적 관용이 국제적 상호교류를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모두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묘사는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대담한 정치적 성명’이 된다. 문체의 측면에서 <편지>는 간결하고 재치 넘치는 영어 산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볼테르는 <편지>를 통해 유장하고 현학적인 프랑스어 문체에서 탈피하여 특유의 반어적이면서 비유적인 산문 문체를 통해 ‘대중적인’ 글쓰기 스타일을 개척했다(‘뉴턴의 사과’ 이야기도 <편지>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볼테르가 ‘나는 영국인처럼 생각하고 쓴다’고 했을 때, 그것은 영국에 대한 단순한 예찬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적‧문체적 전환에 대한 선언이었던 셈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연인이었던 여성 과학자 샤틀레 부인과 함께 1730년대~1740년대 이른바 ‘뉴턴 전쟁’에 가담, 뉴턴을 옹호하며 데카르트주의에 맞섰는데, 저자는 이것이 사상적 대결이었다기보다 프랑스 과학한림원 지배층과의 권력 대결이었다고 평가한다. 볼테르는 <뉴턴 철학의 요소들>(1738)을 통해 뉴턴을 유럽에 상세히 소개했고, 이것에 대한 당대 지성계의 반응에 수차례 재응답하며 유럽에서의 과학논쟁을 선도했다. 18세기 중반 프랑스 과학한림원에서 데카르트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뉴턴과 로크의 경험주의와 과학적 방법론을 중시한 볼테르의 노선은 결과적으로 역사적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볼테르는 프랑스의 구체제 속에서 귀족들과 가까이 지내며 언제나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구하였다. 이것은 그가 루이 15세의 궁정사관으로서 왕실을 예찬한 일이나, 이후 계몽군주였던 프리드리히 2세, 예카테리나 2세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왕의 철학적 고문 역할을 하고자 한 것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볼테르에게서는 지식인으로서 유지한 궁정과의 일정한 긴장관계도 관찰되는데, 이는 역사가로서 볼테르의 주저인 <루이 14세의 세기>(1751)와 <민족들의 습속과 정신에 관한 고찰(습속론)>(1756)에 잘 드러난다. 볼테르는 루이15세의 궁정사관이었음에도 <세기>에서 선대 왕이었던 루이 14세를 위대한 왕으로 칭송하며 강렬한 서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익숙한 ‘태양왕 신화’를 창조했다. <습속론>에서는 유럽과 기독교 문명을 상대화하여 기독교주의적 보편사 기획(보쉬에)에 맞서 새로운 ‘인류 전체의 문화사’를 쓰고자 했다.

1750년대 중반 이후 볼테르에게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의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다. 그는 제네바에 정착하여 출판업자 크라메르와 함께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던 중 리스본 대지진(1755)에 대한 신학자들의 반응(“리스본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다”)에 분개, 그것에 대한 문학적 대응으로서 <리스본의 재앙에 관한 시>(1756)와 <캉디드>(1759)를 내놓았다. 여기서 그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 혹은 모든 형태의 교조적 신념체계를 조롱하며 자신의 이신론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760년대가 되면 볼테르는 거의 사회운동가로 변모하게 된다. 페르네에 정착한 볼테르는 당시 가톨릭 세력에 의해 부당하게 잔혹한 처형을 당한 말라그리다와 장 칼라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엄청난 양의 출판물과 편지를 통해 전 유럽을 상대로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 끝에 두 일화를 ‘공적인 사건’의 수준으로 격상시켜 유럽에서 최초로 ‘사건을 발명’했다. 이때의 문제의식을 확장하여 가톨릭의 광신주의를 비판하고, 불관용의 역사를 파헤쳐 ‘관용’을 보편적 원칙으로서 받아들이고자 한 2부작이 바로 <관용론>(1763)과 <철학사전>(1764)이다. 특히 <관용론>에는 의미심장하게도 이러한 맥락에서 ‘인권’(le droit humain) 개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말년의 볼테르는 무엇보다 대중과 여론의 속성을 파악하고 다양한 매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당대의 ‘인기인(셀러브리티)’이었다. 그가 하버마스가 정의한 ‘공론장’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서 무차별적인 ‘대중’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는 유명인이었다는 사실은, 계몽사상의 계보에서 볼테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볼테르의 ‘계몽철학’이 단선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을 이룬다고 보거나(다니엘 모르네(Daniel Mornet)), 볼테르의 이신론적 입장을 ‘온건 계몽주의’로 분류하고, 이것과 대비되는, 스피노자적 유물론으로부터 연원 하는 무신론적 ‘급진 계몽주의’를 중시(조너선 이즈리얼(Jonathan Israel))하는 입장에 서면 볼테르의 진정한 급진성을 파악할 수 없다. 볼테르의 진정한 급진성은 그의 ‘실용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위한 글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가 데니스 라스무센(Dennis Rasmussen)이 계몽사상을 ‘실용적 계몽사상’과 ‘추상적 계몽사상’으로 분류한 것이 이즈리얼의 ‘무신론 대 이신론’ 구도보다 더 적절한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볼테르가 전개한 사유의 ‘내용’보다도, 그가 지니고 있었던 언론인적 감각과 산문 작가로서의 재치야말로 ‘계몽적 정신’에 더 부합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볼테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이, 그의 역사적‧철학적 ‘주저’들이 아니라 후기에 ‘공적 지식인’으로서 내놓은 풍자물(<캉디드>)이라는 사실이 볼테르의 입장에서 유감인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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