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정유정)과 <헤어질 결심>(박찬욱)

어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을 보고 실망했다.

 

나는 정서경 작가와 협업을 시작한 이후의 박찬욱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대사가 유치하고 서사와 메타포는 조잡하며 기교와 트릭이 과해서 영화에 해가 된다. 드라마 작가 김은숙의 대사는, 그것이 일종의 ‘밈’이 되어 전국민적인 인기몰이를 하곤 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제아무리 ‘오글거릴지언정’ 최소한 대중의 (유치하지만 솔직한) 니즈에 복무하는 측면이라도 있는데, 정서경의 숱한 문어체 대사들은 당최 무엇을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다(별로 코믹하지도 않다!).

 

‘오글거리는 문어체’라는 사실 자체보다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뭔가 ‘진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체’하며 관객의 허영심에 호소한다는 ‘비윤리성’의 측면이다(외국인 관객에게는 이런 지점이 덜 거슬릴 수도 있겠다). ‘바다와 산’, ‘안개’, ‘원자력 발전소’, ‘자라’, ‘독립유공자’, ‘해파리’ 등의 자질구레한 설정들은(이동진은 벌써 색깔을 가지고 곡예적인 도상학을 시도하고 있던데),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끼워 맞춰가며 영화를 ‘해독’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일부 ‘영잘알 워너비’들에게는 무척 ‘그럴 듯한’ 설정들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엔 별로 영화적이지도 않으며, 과하게 내러티브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탕웨이가 ‘붕괴’를 검색하는 장면을 정말로 굳이 넣어야 했을까).

 

(그마저도 오마주 일색인) ‘과도한 스타일’은 이런 ‘영화적 빈곤함’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로 사용된다. 시체, 디스플레이, 생선(그리고 전지자 – Bird’s eye view 쇼트)의 시점 쇼트가 몇 차례 반복되는데, ‘정념’을 중요한 동력으로 삼고 있는 <헤어질 결심>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앵글의 선택은 ‘과도한 스타일’이 알리바이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심을 강화한다.

 

특히 불만스러운 것은 관객을 상대로 한 트릭의 남발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이 허리띠를 푸는 장면이나 탕웨이가 야산에서 박해일을 밀치려는 듯한 장면은 명백하게 관객을 ‘낚기 위한’ 트릭인데, 그다지 필요한 장면도 아니고, 이런 트릭의 남발은 나홍진의 <곡성(2016)>에 등장하는 교차편집 장면과 마찬가지로, 영화적인 지향점이 없는 상황에서 뭔가 그럴듯한 장면을 우겨 넣기 위한 최근 한국영화의 나쁜 습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의 ‘박찬욱 장편영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박쥐(2009)> 정도를 제외하면 참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각본을 통해 일종의 고전적인 연극성을 기대하는 것이라면 카메라가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으므로 모순이요(박찬욱 영화의 불균형은 곧 대사의 ‘연극성’과 편집의 ‘영화성’ 사이의 충돌이다), 유머를 시도하는 것이라면 별로 웃기지 않다는 점에서 실패다. 차라리 박찬욱 감독이 정말로 ‘장르영화’를 시도한 것이라면 그 나름 성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여성성’이라는 미명 하에 오늘날 한국의 대중예술 전반에서 무분별하게 지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성’의 핵심은 ‘정치적 전복성’인데, 최근 한국 대중예술의 ‘여성성’은 정치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은 채, ‘사춘기 소녀스러운’ 감성만 가지고 게으르게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젊은작가’들의 천편일률적인 단편 여성서사나, 일부 독립영화가 반복하는 테마를 떠올려 보라. 박찬욱은 이동진의 비호 하에 이 기조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주에 읽은 정유정의 <종의 기원(2016)>은 (중요하다기보다는) 소중한 작품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악’을 다루는 방식은, 이제는 서브컬쳐의 한 장르가 된 듯한 ‘자력구제 판타지물’과 ‘범죄예능(“알쓸범잡”이라니, ‘범죄’를 소재로 한 ‘예능’이라는 기획 자체가 충격적이다)’으로 대표되는 ‘오락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정유정의 ‘싸이코패스-되기’는 이런 흐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불만을 표시한다.

 

정유정은 숱한 ‘여성-되기’ 서사를 뒤집은 다음(피해자가 아닌 ‘포식자’의 시선), 시선을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 ‘싸이코패스의 자기탐구’를 시도하는 것으로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시도한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이 ‘싸이코패스의 서사’를 ‘엄마’와 ‘이모’의 ‘감시와 처벌’에 맞서 한 소년이 자유를 쟁취하는 ‘투쟁의 서사’에 유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유의 쟁취’를 낭만화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행위와 동일시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장르소설의 외피 속에서 변주한 것이다. 독자는 작중 ‘한유진’(주체)의 서사에 몰입하게 되면서도 패륜범죄의 흉악함 때문에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전지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런 종류의 긴장은 위대한 예술만이 시도할 만한 격조 높은 성찰에서나 우러나는 것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정유정의 최근작인 <완전한 행복> 역시 ‘자기애’를 테마로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 상에 놓인 작품이 아닐까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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