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노래』(레일라 슬리마니)와 <기생충>(봉준호)

레일라 슬리마니(좌)와 봉준호(우)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2016)와 봉준호의 <기생충>(2019)의 유사성은 “계급별로 거주하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다시피 한 후기근대사회에서 계급문제를 어떻게 서사화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당대 예술가들이 대응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정형화된 패턴이 있음을 시사한다. 계급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창작자는 먼저 하층 계급과 상층 계급을 ‘한 집’에 모아두어야 하는데, ‘보모’(달콤한 노래)나 ‘과외교사’(기생충)와 같은 ‘입주가사노동’은 아주 좋은 장치가 된다. 스탕달이 200여년전에 이미 『적과 흑』(1830)에서 이 방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입주가사노동 모티브’는 서사예술이 계층간 공간적 분리 문제를 해결하는 거의 필연적인 방법이라고까지 생각된다. (김기영의 <하녀>(1960)까지!)

창작자는 이어서 이들이 한 공간에 머물면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계급적 긴장’을 세심하게 묘사한다. 입주가사노동자들은 ‘집’이라는 내밀한 공간에 스며들어 상층 계급의 아이를 돌보고, 그들 가족의 생활을 보조하면서 상층계급 가족에게 일종의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상층계급은 피고용인에게 대체로 친절하고 온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들의 ‘고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과시하게 되고, 피고용인인 하층계급이 ‘선’을 넘을 때마다 냉정하게 대처함으로써 이 ‘초-계급적 우호’의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런 긴장이 계속되는 와중에 하층 계급은 결정적으로 자신들의 원래 ‘집’을 잃고 궁지에 몰린다. 『달콤한 노래』에서 루이즈는 방세를 지불하지 못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나고,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의 반지하방은 아예 침수되어버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하층계급은, 그들과 달리 여전히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고용주 가족을 목도하며 비로소 자신들과 고용주 사이의 ‘계급 차이’를 인식하고 이들에 대해 막연한 ‘적의’을 품게 된다. (이것을 계급적 각성이나 정치적 급진화가 아닌 ‘원한감정(ressentiment)’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은 정직하지만 문제적인 선택이다.) 이제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을 살해할 동기가 충분하므로(?),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노동자는 자신의 주인을 살해할 것이다. 『달콤한 노래』는 살해 장면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두는 반면, <기생충>은 살해의 정황과 그 수행을 노골적으로 재현한다. 이 ‘하층계급에 의한 우발적 살인’의 모티브는 최근 계급문제를 전면화 하는 유수의 예술작품들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데, 이창동의 <버닝>(2018)이나 토드 필립스의 <조커>(2019) 역시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을 살해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송강호의 얼굴

“상층계급 ‘집’으로의 진입 – 하층계급의 불행 – 우발적 살해”로 이어지는 이 서사패턴을 차용하는 일군의 ‘계급우화’들이, 그 대단원에서 구체적인 인과관계에 대해 무언가 얼버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루이즈는 왜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을 살해해야 했으며, 기택은 왜 박 사장(이선균)을 살해해야 했는가? 『달콤한 노래』는 살인 장면 자체에 괄호를 치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로 하여금 카뮈의 『이방인』의 첫 문장을 연상하도록 함으로써 루이즈의 살해동기를, 뫼르소의 그것과 같이, ‘인간 실존의 부조리’ 따위의 형이상학 아래에 은폐해버린다. 소설은 루이즈가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햇빛이 눈부셔서’ 그랬던 게 아니겠냐는 식의 능청을 떨고 있는 셈이다. 혹은, 우리는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우리는 타자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을 뿐’이라는 하나마나 한 답변에 만족해야 한다. <기생충>이 묘사하는 살해의 동기는 더욱 노골적으로 동문서답이다. ‘빈곤의 냄새’가 ‘선을 넘어갔고’, 박 사장은 순간적으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으며, 기택은 마찬가지로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했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오로지 배우 송강호의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만 설명한다. 봉준호는 앞서 기택 일가가 힘을 합쳐 기존의 가사도우미 문광(이정은)을 결핵환자로 몰아 쫓아내는 시퀀스를 탁월한 몽타주로 그려내며 관객을 ‘영화적으로’ 설득하는데 성공했으나, 보다 중요한 ‘폭력혁명’ 장면에 이르러서는 영화적인 설득을 포기하고 오로지 배우의 ‘얼굴’을 착취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기생충>의 문제성 – 희극적인 전반부와 비극적인 후반부의 불균형 – 은 사실 단순한 톤 조절의 문제가 아니고, 쇼트와 쇼트의 접합이 어떤 투쟁에 복무할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의 문제였다고 볼 수 있겠다. <전함 포템킨>에서 차르의 ‘오데사 학살’을 장엄하게 그리는 영화언어의 첨단이었던 몽타주는, <기생충>에 이르러 하층계급끼리의 투쟁을 희화화하는 도구로 전락했으며, 혁명의 순간에는 감독이 영화가 아닌 배우에 의존해 버림으로써 영화언어는 더 이상 좌파의 언어가 아니게 되었다.

이쯤 되면 두 작품이, 이미 전후 사정을 통해 계급적 긴장을 충분히 전면화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서 ‘진짜문제’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두 작품은 자본주의가 내포하는 계급적 적대와, 하층민의 혁명적 폭력 사이의 관계를 ‘인과’로 묶어 ‘불온한 예술’이 되기를 끝내 주저한다.

그렇다면 계급문제를 취급하는 모든 예술은 철 지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법을 따라 계급문제에 대해 얼버무리지 않고 과감하게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독려’하는 정치선전물이 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으며, 그럴 수 없는 시대에 예술작품이 계급문제를 어떻게 서사화할 것인지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달콤한 노래』와 <기생충>이 나아간 대조적인 지점들에 주목해야 하겠다. 『달콤한 노래』 속 ‘루이즈’는 가족이 없는(가족을 상실한) 여성 단독자이고, <기생충> 속 기택 일가는 단단히 결속한 4인 가족이다. 『달콤한 노래』에서 루이즈는 에르베, 와파와 같은 비슷한 하층계급 인물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 <기생충>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은 ‘하층계급끼리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달콤한 노래』에서 살해의 순간은 재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의 유비를 통해 그 동기가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라는 이름 하에 구조적으로 은폐된다. <기생충>은 살해의 정황을 하층계급끼리의 투쟁 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정도로 묘사하고, 살해의 주체를 선량한(심정적으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가부장적 아버지 ‘기택’으로 선정하여 기택의 살인이 지닌 정치적 급진성을 은폐한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이 결과적으로 두 작품의 ‘불온성’을 경감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관객이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작품의 ‘리얼한’ 요소들이, 대단원에서의 ‘폭력혁명’의 정당성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의 급진성을 거세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 메커니즘이야말로 정확히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근대사회’의 이른바 ‘총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달콤한 노래』와 <기생충>이 도달한 리얼리즘은 그러므로 ‘불온한 것’의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동어반복’으로서만 제한적인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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