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아/홍종윤, <지금 여기 힙합>을 읽고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 중 하나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어렸을 때(만 9세!) 비틀즈를 통해 팝에 입문했다는 것이다. 자칭 ‘비틀매니아’ 출신이므로 한때 나에게 팝송은 무조건 밴드 음악과 로큰롤이었다. 나는 락의 족보를 그리려고 여러 번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락 음악의 흐름과 지형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이답지 않게 이런 식의 우스갯소리가 낯설지 않다 – “세 보이고 싶다면 메탈리카, 메가데스, 슬레이어 같은 스래시 메탈을 좋아하는 척하면 된다. 이때 메탈리카는 살짝 무시하면서 슬레이어를 ‘빨거나’, 메가데스를 치켜세우면 그야말로 ‘락잘알’ 행세를 할 수 있다. 진짜로 ‘고인 물’인 것처럼 보이고 싶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딥퍼플이나 블랙사바스를 점잖게 지지하면 되는데, 동시대의 레드제플린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 지미 페이지 정도만 칭송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퀸을 ‘빨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좀 지적인 척하고 싶으면 핑크플로이드를 좋아하는 척하면 된다.” – 등등, 취향을 위계화해서 자신의 ‘고상한’ 취향을 과시하고 남들의 ‘저속한’ 취향을 폄하하는 ‘덕후’들의 ‘락부심’을 겨냥한 우스갯소리. 나 같은 경우 일찍이 주다스 프리스트, 아이언 메이든 쪽을 파면서 ‘센 척’하다가 지친 나머지 나가 떨어지고 말았고, 이후 잠시 ‘있어 보이는’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하다가, 요즘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얼터너티브, 블루스, 포크, 컨트리, R&B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뭐든지 다 들으며 ‘취향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은 CCM도 즐겨 듣는다!

비틀즈는 락 장르에만 국한되는 밴드가 아니다. 악기 하나 제대로 다룰 줄 모르면서 내가 나의 ‘듣는 귀’에 대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비틀즈를 오랫동안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비틀즈는 위대하니까! 대중가요도, 팝송도 익숙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부터 비틀즈는 정말 주구장창 들었다. 이 위대한 밴드의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명곡’으로 회자되는 곡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생기고, 그 속에서 나의 취향의 좌표를 찾게 된다.

나는 속칭 ‘음잘알’까지는 아니지만, 비틀즈 덕분에 장르를 가리지 않는 넓은 귀를 가지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재스러운’ 음악 취향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은 재즈와 락의 경계에 있는 톰 웨이츠나 닉 케이브를 듣거나, 신스팝을 찾아 듣는다. 특히 조이 디비전과 그 후신인 뉴 오더는 현대 대중음악의 ‘로제타 스톤’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로큰롤의 싸이키델릭하고 어두운 에너지와, 현대전자음악의 쿨함(?)이 절묘하게 겹쳐 있어 대중음악의 한 이행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달까. ‘음잘알’의 끝은 결국 재즈와 클래식이라는데, 여러 번 입문을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두 장르는 나에게 오르기 힘든 산인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올해 슈퍼 볼 하프타임 쇼를 보고 내가 ‘힙합’이라는 장르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고 매몰찼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닥터 드레’나 ‘스눕 독’이라는 아티스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14분간 그들의 공연을 보고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연은, 마치 90년대의 이른바 ‘올드 스쿨 힙합’을 공식적인 ‘팝의 역사’에 올리는 선포식처럼 느껴졌다(이미 올라와 있었는데 나 혼자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도). 힙합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조차 익숙한 ‘New Episode’나 ‘Still Dre’의 멜로디가 흐를 때 나는 나의 편협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투팍’과 ‘아이스 큐브’ 등 올드스쿨 힙합 아티스트들의 곡을 몇 곡 들어보았는데, 특히 ‘아이스 큐브’의 음악은 힙합에 대한 나의 편견을 단숨에 깨 버릴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나는 ‘힙알못’이며, 여전히 힙합을 일정 시간 이상 듣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모르는 채로 묻어 두고 넘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는 힙합도 ‘교양’이 된 시대가 아닐까. 그래서 가볍게 읽어본 책이 이 책, 『지금 여기 힙합』이다.

서론이 길었다. 『지금 여기 힙합』은 몇 년 전부터 ‘북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리즈로 출판되고 있는 문고본 도서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는 하나같이 시의성 짙은 주제들(중동 라이벌리즘, NFT, 인류세, MBTI 등등)을 다루고 있어서 늘 눈길이 갔었는데 이제서야 실제로 읽어보게 되었다. 저자는 언론정보학 박사들인데 보아하니 문화연구 계통의 논의를 취급하는 연구자들인 것 같다. 이 책은 힙합 장르의 정체성이나 역사를 체계적으로 살피는 ‘음악 책’이 아니라 현재 한국의 청년들이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에 대한 문화사회학적 탐구를 시도하는 ‘사회학 책’에 가깝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단행본으로서는 수준미달인 형편없는 책이므로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겠다.

이 책은 오늘날 힙합에 대한 청년 남성들의 열광으로부터 21세기 한국의 ‘청년-남성성’을 읽어내고자 한다. 아티스트들은 ‘랩’을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힙합은 태생적으로 ‘진정성’이 중시되는 장르이다. 미국 힙합에서 진정성은 ‘인종’과 ‘계급’ 등으로 표현된다. ‘흑인’ 아티스트가 자신의 ‘길거리’에서의 삶을 거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진정성의 한 요소인 것이다. ‘쇼미더머니’ 같은 오디션 방송에서 힙합의 진정성은 한국적인 방식으로 변주된다. 대형 기획사의 ‘아이돌’ 출신보다는 ‘인디’ 출신의 아티스트가, 가벼운 가사보다는 힘들었던 지난 삶과 현재의 성공에 대한 ‘자수성가 성공담’이 보다 ‘진정성’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지지를 받는다. 저자들은 한국 힙합의 ‘진정성’이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서사 및 여성혐오와 결부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건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뭉툭한 지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서사’라는 말은 문화연구 영역에서 일종의 전가의 보도 같은 용어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너무 크고 모호한 단어라서, 어디에다 들이대도 그럴 듯하다. 반대로 말하면, 이걸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성혐오’라는 용어 역시 이제는 닳고 달아서 더 이상 유의미한 분석적 틀을 제공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요즘 맥락에서는 ‘혐오’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가 정체 불명이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이 단어는 단지 상대방을 ‘혐오주의자’라고 낙인 찍기 위한 비난의 언어로 전락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성실한 저술가라면 출판물에 이런 단어들을 남발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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